육우당터찾기 자료<금사면 이포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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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5-08-15 07:41 조회1,751회 댓글0건본문
(금사면은 여주군의 서북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1. 이포리(梨浦里)
* 이포리(梨浦里) : 이포리는 본래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세곡과 물화를 싣고 풀던 큰 나룻터였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배나무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배나무 이(梨)자와 물가 포(浦)자를 합쳐 이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는 배개나루·배나루·배개 또는 이포진으로 불리우기도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구말·천양·근정리·서원·뒷골이 병합되어 이포리를 이루게 되었다. 현재는 법정리로 분리하여 수굿말·큰말을 1리로, 근정리·뒷골·서원을 2리로 나누고 있다.
☞ 이포(梨浦)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1914년 이후의 일이고 원래는 이호(梨湖)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문헌에 이호로 표기된 것을 자칫 강천면 이호리로 착각하기 쉽다. 강천면 이호(梨湖)의 원래 지명은 배미(梨山)이다. 배는 산(山)을 뜻하는 것인데 배 이(梨)자를 쓰게되어 유래나 전설에 엉뚱한 배(梨)나 배(舟 : 나룻배) 등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 이 곳을 배개(山邊) + 나루(津) = 배갯나루(山 가생이 나루라는 뜻)라고 부르고 또는 배나루(梨津), 배개(山)의 뜻을 이포(梨浦)라고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옛날 천령(川寧)이 여주로 병합되기 이전 고려 때부터 묵객들의 저서에 으레 시 몇 수씩은 올라있는 곳이다.
다른 지방의 이름 중에도 배(梨·舟)자가 붙은 지명이 무수하게 많다. 배말(梨村)·배내(梨川)·배고개(舟峴)·배미(梨山)·배안말(村)·배골(舟谷)·배꼬지(梨花)·배다리(舟橋洞)·배내고개(舟峴) 등 이러한 지명은 모두 산(山)과 관계된 지명인데 모두 이(梨)자나 주(舟)자를 붙인 것이다.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의 시 “이호(梨湖)에서 양화(楊花)로 거슬러 가면서”, 동정 염흥방의 시 “침류정 사절”, 둔촌 이집의 시, ahrr은 이색의 시, 백운거사 이규보의 시, 가정 이곡, 척약재 김구용 외 많은 명인들의 시에 모두 이포(梨浦)가 아니고 이호(梨湖)라고 표기하였다.
또한 나루터면 으레 모래톱(백사장)변이기 마련인데 배자가 붙은 나루터는 배가 바로 산(山)에 닿게 되는 곳을 말한다.
* 개터 : 이포초등학교 앞 갯가에 있는 들로 그 앞에 하천이 흐르고 있다.
☞ 개(浦) = 강이나 바다에 물이 드나드는 곳.
* 곰바위 : 이포다리 근처에 있는 곰처럼 생긴 바위.
* 곰부리 : 이포다리 근처에 있는 모롱이.
☞ 곰(큰) + 부리(부랭이, 모퉁이)
* 근정리(近汀里) : 천양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금사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
☞ 정(汀) = 물가 정
* 근정리 고개 : 근정리 북쪽에 있는 고개로 현재 지서 앞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양마을과 이어지고 있다.
* 기천서원(沂川書院) : 모현사 참조.
*김 안국 재실<사당> :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모재 김안국을 추향하는 사당.
* 대촌(大村) : 큰말 참조.
* 뒷골 : 기천서원 뒤쪽에 있는 마을.
* 뒷굴 : 뒷골 참조.
* 뒷능 : 수굿말 뒤쪽에 있는 산.
☞ 능(陵) = 보통 각 마을에서는 왕능을 연상하나 지명에서는 산능선을 뜻하는 것이 많다.
* 마상끝<산> : 이포리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말을 놓아 먹였던 곳이라고 한다.
☞ 마(큰) + 상(산) + 골(谷)
* 말방다리 : 이포리 뒷골에 있는 산으로 병자호란 때 홍명구(洪命耈)가 금화(金化)지역에서 전사하였는데 말이 주인의 시체의 머리를 물고 이곳까지 왔다고 전해진다.
☞ 말(큰) + 방(귀퉁이) + 다리(들) + 산 = 큰머리 고래의 산.
* 모현사(慕賢祠) :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산 15의2번지에 있다. 처음에는 마암서원이라 하여 조선 선조 13년(1580)에 건축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세워서 인조 3년(1625)에 기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그 후 화재로 인하여 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877년 4월 김영진씨가 사재(私財)를 기울이고 99인의 기금으로 다시 세워 모현사로 개명하여 문간공(文簡公)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외 7인의 명현을 봉안했으며, 봄·가을로 제향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옛 명현의 덕을 추모하게 하였다.
현판은 서은(西隱) 장홍식(張鴻植)이 새겼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제향을 올리는 명현은 다음과 같다.
문경공(文敬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충공(文忠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증영의정(贈領議政) 치재(恥齋) 홍인우(洪仁祐)
문숙공(文肅公) 수몽(守夢) 정엽(鄭燁)
문정공(文靖公) 택당(擇堂) 이식(李植)
충열공(忠烈公) 나재(懶齋) 홍명구(洪命耈)
문간공(文簡公)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 묘련암(妙蓮庵) : 이포리 수굿말 뒤에 있는 암자로 원래의 암자는 폐사되었다.
* 박석고개 : 천양 마을 북쪽에 있는 고개로 마을 뒤쪽 새로난 길과 이어진다.
☞ 박(받 : 山) + 석(새 : 間)
* 배개 : 이포리 참조.
* 배나루 : 이포리 참조.
* 범사정(泛槎亭) : 금사면 이포리에 세워졌던 정자로 모재 김안국이 벼슬에서 물러나 점동면 원부에 은거할 때 세워졌던 건물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벼락바위 : 이포 근정리에 있는 바위로 벼락을 맞았다고 하여 벼락바위로 불리우며 바위가 강쪽으로 돌출되어 강물이 굽이쳐 흐르며 물살이 빨라 옛날 이곳을 왕래하던 배들이 종종 부딪쳐서 침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비석거리 : 비선거리 참조
* 비선거리 : 이포리 뒷골에 있는 들로 남양홍씨인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신도비(神道碑)가 있는 부근을 말한다.
* 삼선당 : 금사면 이포리 192번지인 서원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에 세워진 것은 고려 말기라고 전해지며 원래 삼선은 성황신·산신·용왕신을 일컫는 말이나 이 마을의 전설을 통해 볼 때 동민을 안녕케하는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최씨 부부와 그의 묘소를 잡아준 나옹선사 및 산신을 제사하는 당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협소한 초옥이었던 것을 주민 오도성이 세웠다가 다시 기와집으로 세운 것이 1728년 무신정변 때 소실되었고, 그 후 주민들이 협력하여 새로 3칸을 세움으로서 1칸은 영정을 봉안하고 2칸은 비워두고 있다. 또한 삼선당의 부근에는 전설과 관련된 최씨 묘소와 침벽루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 새뫼 : 새매 참조.
☞ 새(가운데 사이) + 뫼(山)
* 새매앞 : 수부촌 뒤쪽의 태봉 밑에 있는 산등성이.
* 새터 : 서원 서남쪽에 새로된 마을을 말함.
* 서원(書院) : 천양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기천서원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
* 성선암(聖禪庵) : 천양 동북쪽에 있는 절로 조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 소탱이꿈치 : 큰말(천양) 앞에 있는 빨래터로 깊은 소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소탱이 = 소댕이, 소덩이(沼가 있는 목)
* 수굿말 : 이포에서 오래된 마을중 하나로서 뒷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포대교와 함께 남한강 물가를 향하여 있는 마을.
☞ 수(물水) + 구지(곶이 튀어 나온 곳) = 수구지 - 수곶이 - 수구
* 수부말 : 수굿말 참조
* 수부촌(水夫村) : 수굿말 참조
* 술천성지 : 금사면 외평리와 외포리 사이에 태봉이라고 부르는 해발 285m의 산에 있다.(하략)
* 아랫말 : 수굿말 아래쪽에 있는 마을.
* 아랫벌 : 천양 아래쪽에 있는 들.
* 여수고개 : 이포리 수굿말에서 외평리로 넘어가는 산길로 옛날 고개 근처에 여우가 많이 나타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여수(느린머리) - 너수(汝) - 여수
* 옻물터 : 이포리 수굿말에 있는 약물터로 약수가 옻오른데 효과가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우렁바위 : 이포 천양마을에서 이포대교로 가는 길 오른쪽 아래의 강에 있는 바위로서 강물이 많을 때면 물에 잠겼다가 강물이 적을 때에만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우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우렁 = 울림
* 웃말 : 수굿말 위쪽의 마을.
* 육우당(六友堂) :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 김구용(1338-1384)이 우거하던 곳이다. 그는 고려와 명나라의 국교가 난관에 봉착하자 행례사(사신)로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요동에서 체포되어 남경으로 압송되었고, 그 후 명제의 명령으로 대리로 귀양을 갔었으며 고국으로 귀환한 후 여주 영녕현으로 와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먼저 친명파로 북원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로 유배된 바 있었다. 석방된 후에는 여주 외가에 있으면서 천령에 당을 지었는데 처음에 설(雪)·월(月)·풍(風)·화(花)의 네가지 벗을 삼아 사우당(四友堂)이라 하였다가 강(江)·산(山)을 더하여 육우당(六友堂)이라 하였고 목은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받았다. 이후 어느 시기에 훼철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척약재(惕若齋) 할아버지께서는 중국 윈난성 따리(대리)로 귀양을 가시다가 1384년(우왕 10) 사천성 노주 영녕현 강문점(氵+盧州 永寧縣 江門坫)에서 병환이 나시어 47세를 일기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귀환을 하지 못하셨고, 육우당은 1375년(우왕 1) 언사로 죽주(竹州)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어머니의 고향인 여흥군(驪興郡)으로 이배되었을 때 지으셨다.《출처 : 가보》
* 원촌(阮村) : 서원 참조.
☞ 원(院) = 옛날 여관의 역할을 하던 곳.
* 은행나무 : 삼선당 뒤쪽에 있는 은행나무로 이포리 나룻터 위쪽 강변 암석 위에 서있으며 지상에서 2m까지 썩은 홈이 있고 수목의 상단은 고사되어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높이 35m, 나무둘레가 5.8m로서 고려시대 나옹선사가 이 나무 위의 산을 오르면서 바위틈에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천령최씨의 시조묘와 관련되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나무속에는 귀달린 뱀이 산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나옹선사가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줄 알아라”하고 이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 이포(梨浦) : 이포리 참조
* 이포나루터 : 이포 천양 앞에 있는 나루터로 과거에는 강 건너편 대신면 천서리 강가로 철선이 건너다니던 곳으로 사람은 물론 자동차까지도 유일한 도강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포대교가 개통되어 그 입구에 이포나루터라고 적혀진 조그만 표석만이 남아있어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 이포느티나무 : 이포리 281번지에 있는 느티나무로 현재 금사 농협 앞쪽 도로변에 있다. 수령은 500년, 높이가 20m, 나무 둘레가 2.8m로 현재 김창선씨가 소유하고 있으며 지상 1m 높이에 태와 같은 둘레가 있으며 수간에 길게 홈이 나 있다. 이 나무 또한 나옹선사의 전설과 관련되어 강변의 은행나무와 함께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장터거리 : 큰말 또는 대촌으로 부르기도 하며 과거 이포장이 열렸던 장소로 마을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 절고개 : 수굿말에서 외평리 묘련암으로 가는 고개.
* 제비다리 : 이포2리에 소재하고 있는 현 복지회관에서 천양마을로 가는 방향에 있는 다리로서 현재는 새 도로가 나있어 없어졌으며 주변에 주유소가 위치하고 있다.
☞ 제비 = 좁은
* 차말(車馬) : 천양에서 삼선암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빨래터.
☞ 차(찬물) + 말(마을)
* 천령 : 천양 참조
☞ 처음 지명은 성지매로서 이후 술천, 기천, 천령 순으로 지명이 변하였다.
* 천양(川陽, 天陽) : 이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그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 무열왕이 663년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곳에 술천성을 쌓고 지방 군단인 골내근정을 드었으며, 경덕왕 16년(757)에는 천령현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천양에는 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마을을 천양이라고 불리는 것은 천령이 변음되어 천양으로 불리운 것 같다.
* 침벽루(枕碧樓) : 이포리 삼선당 옆에 세워진 누각으로 옛날에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훌륭한 시와 문장을 지었던 곳으로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목선을 타고 오는 왜병들과 맞서 이곳의 의병들이 싸워 승리를 거둔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의 건물은 없어졌으나 1994년 이포리에 거주하고 있던 뜻있는 인사들이 과거의 누각 터에 새로 세운 것이 현재 남아있다.
* 큰말 : 대촌, 장터거리라고도 불리우며 천양의 가장 큰 마을로 예전에는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 탑선대 : 이포장터 뒤쪽 산에 있는 고목아래의 지역으로 과거에는 탑이 있었다고 한다.
* 태봉<산> : 수굿말의 묘련암 뒤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옛날 왕자의 태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후곡(後谷) : 뒷굴 참조
2. 궁리
<이하 생략>
《출전 : 금사면지/여주문화원/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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