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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강공 행장(仁齋姜公行狀) - 복창군 김수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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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5-08-24 16:31 조회1,46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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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강공 행장(仁齋姜公行狀)
공은 휘가 희안(希顔)이고 자는 경우(景愚)이며 호는 인재(仁齋)이니 대민공(戴愍公)의 큰 아들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부터 지식이 뛰어나  나이 겨우 두 서너 살에 담장 벽에 손을 휘둘러 물을 뿌리면 글씨가 되고 그림이 되는데 모두 법도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장하자 스승을 따라 학문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크게 떨쳤다. 무오년(세종 20, 1438) 공의 나이 21세때 새로 설립한 ‘시부진사시(詩賦進士試)에 단번에 급제하고 신유년(세종23, 1441) 공의 나이 24세때 이석형(李石亨) 방의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翰林院)에 보직 되었다. 임기가 다 되자 사섬시 주부(司贍侍注簿)를 제수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르렀다. 이때 세종대왕이 보옥을 얻어 국새(國璽)를 만들고자 ‘체천목민 영창후사(體天牧民 永昌後嗣)’의 여덟 자를 새기려고 하였으나 ‘전자체(篆字體)’로 쓸 사람을 얻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논의하여 공을 천거하니 공은 예조정랑으로 바쁜 직무이기 때문에 한직인 돈영주부(敦寧主簿)가 되었고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승진 하였으며 임기가 다하자 부지돈영부사(副知敦寧府事)를 배수했다. 때 마침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자리가 결원이 되어 정부에서 공을 첫 번째로 천거하여 발령하려 하니 공은 영화로운 자리에 진급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굳이 사양하였다. 여러 제상들이 괴이하게 여겼으나 공의 성실한 뜻을 알고 곧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지병조사(知兵曹事)를 두루 역임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어머니 병환으로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를 배수했다가 바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여 행상호군(行上護軍)이 되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 중국의 선비들이 공의 풍채와 태도를 보고 비상한 사람임을 알았으며 그 글씨와 그림을 보게 되자 크게 칭찬하며 얻으려는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공은 겸손하며 모두 물리쳤다. 조정에 돌아와 인수부윤(仁壽府尹)을 배수하였고 을유년(세조11 1465) 겨울에 등창으로 졸하니 향년 48세이다.
공은 천성이 침정아담(沈正雅淡)하고 관평낙이(寬平樂易)하였으며 일을 당하면 감히 남보다 먼저 하지 않았으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계략을 도모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면 공은 말하기를 “궁달(窮達)은 모두 분수에 있는 것이지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양 한다고 피할 수도 없다. 혹 분수에 지나치면 재난이 따르니 어찌 고생스럽게 경영하여 분수 아닌 일을 필요로 하겠는가” 하였고 간혹 어떤사람이 나약한 것처럼 기만하더라도 공은 오히려 태연하게 대처하였다.
공은 문장과 시를 짓는 재능이 정수를 얻었고 전서 예서 해서 초서와 회화의 묘에 이르기까지 당세에 독보를 이루었으나 공은 모두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자제가 글씨나 그림을 구하면 공은 이르기를 “글씨나 그림은 천한 기술이니 후세에 전하게 되면 도리어 이름만 욕 될뿐이다.”하여 그의 작품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공은 사물의 이치가 정밀하거나 거친 것 이라 할지라도 한번 보면 스스로 해득하였으나 오직 음률은 알지 못하였다. 한번은 악공이 비파를 타는 소리를 듣고서 이르기를 “네가 비파를 가능한 한 천천히 타 보라” 하고 자세히 듣고 나서 한 동안 있다가 이르기를 비록 소리는 이룰수 없으나 대강은 할수 있다.” 하고 손으로 한번 한번 타는데 그 곡조가 틀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민첩함에 탄복하였다.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지었는데 화초를 심고 기르는 법을 곡진히 하여 사물의 조화하는 뜻을 붙였다. 하루는 아우인 나(경순)에게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하므로 내가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내가 꿈에 어느 관청에 들어가니 여러 관원이 늘어 앉았는데 그 사이에 빈 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여 이르기를 “여기에 앉을 사람이 잠시 다른 곳에 나갔는데 금년에 돌아올것이다.” 하였다. 그 자리의 이름표를 보니 즉 나의 성명이었다. 이것이 어찌 오래 살 징조이겠느냐” 하더니 그 해에 과연 졸 하였다.
공의 전취는 지통예문사(知通禮門事) 이곡(李谷)의 딸인데 자녀가 없고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후취는 전 주부(前主簿) 김중행(金仲行)의 딸이니 4녀를 낳았다. 장녀는 참봉 조중휘(趙仲輝)에게 출가하고 그 다음은 생원 송윤종(宋胤宗)에게 출가 하였으며 그 다음은 유학 어맹렴(魚孟濂)에게 출가 하였는데 모두 이름 높은 집안의 자제로 학문과 행의가 있는 사람들이다.
임진년(성종3, 1472)정월 하순

순성좌리공신 가정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복창군 김수녕 삼가 짓다.

출전:국역진산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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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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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이어지는 새로운 자료 발굴,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