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흔 선조님과 같이간 인질(뚤루게(禿魯花)(8)이존비(李尊庇)의 아들 우(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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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08-29 16:04 조회1,565회 댓글0건본문
김흔 선조님과 함께 원나라에 뚤루게로 간 분 중에 이존비의 아들 이우가 있습니다.
이분의 행적을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존비는 고성이씨로서 벼슬이 지공거를 지낸후 판밀직사사에 이르신 분입니다.
이우는 이존비의 아들인바 고성이씨 자료에는 문하시중을 지내고 철원군, 철성부원군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으나
역사 자료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이우의 아들이 문정공 행촌 이암공과 형부상서를 지낸 이교인바 이분들에 의해 추증된 직위가 아닌가 생각되나
여러분들의 자료를 기다랍니다.
이존비(李尊庇)
1233(고종 20)~1287(충렬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인성(仁成), 자는 지정(持正). 부인은 좌복야 한림학사(左僕射翰林學士) 이주일(李湊一)의 딸이며, 아들은 우(瑀)․정(精)․숙(璹)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백문절(白文節)에게 글을 배워 문장과 예서(隷書)에 능하였으며, 유경(柳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학에 밝았다.
1260년(원종 1)과거에 급제한 이후 내시(內侍)에 입적되었으며, 이어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호부(戶部)․병부(兵部)․이부(吏部)의 시랑을 역임하고 1275년(충렬왕 1) 상서우승(尙書右丞)․예빈경(禮賓卿)을 거쳐 좌승지에 올랐으며, 이때 필도지(必#도62赤)의 일원이 되었다.
1279년 밀직부사로서 장군 정인경(鄭仁卿)과 함께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사행하였으며, 이듬해 지밀직사사․세자원빈(世子元賓)에 오르고, 1282년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1284년 감찰대부(監察大夫), 1287년에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의 도순문사가 되어 여몽군(麗蒙軍)의 일본정벌을 위한 병량(兵糧) 및 군선(軍船)의 조달을 담당하였는데 제반조치가 적의하여 민원을 사지 않았다.
그뒤 벼슬이 판밀직사사에 이르러 죽자, 그의 죽음에 대하여 특히 세자가 울면서 심히 애석해하였다고 한다.
묘지명이 현재 전하며 회당화상(晦堂和尙)에게 보낸 칠언율시가 《동문선》에 실려 있다.
이암(李嵒)1
1297(충렬왕 23)∼1364(공민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侅).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監察大夫世子元賓)인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이다.
1313년(충선왕 5)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 재주를 아끼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성교감(秘省校勘)에 임명한 뒤 여러 번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올랐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여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여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知申事)·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충혜왕이 전교부령(典校副令)에 무인(武人) 한용규(韓用規)를 임명하므로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로 제수되어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지만,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공평하지 못하게 처리한다고 왕에게 진언한 일로 인해서 밀성(密城)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서자 저(㫝:뒤의 충정왕)를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원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정방의 제조에 임명되는 한편,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며, 그뒤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하여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하므로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 겁이 많아 도원수로서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여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핍박하므로 왕을 따라 남행(南行)하였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하였고, 필법은 조맹부(趙孟頫)와 대적할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우왕 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교(李嶠)
?∼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모지(慕之), 호는 도촌(桃村).
판밀직사사감찰대부(判密直司事監察大夫) 존비(尊庇)의 손자로, 원나라의 금부(金符)를 받고
만부장(萬府將)이 된 판삼사사(判三司事) 박지량(朴之亮)의 외손이고,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이며, 충혜왕의 배향공신인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의 사위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1357년 형부상서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0년 어사대부로서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그의 가문은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문벌세가)일 뿐 아니라 조선건국과 함께 중추적 세력으로 영입된 세력가로서 조선의 명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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