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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흥시> 속에 들어 있는 김충갑 선조님의 발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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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9-07 08:37 조회1,5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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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1일 경북 봉화에 사시는 태석(정의공파)종친으로부터 김충갑 선조님이 쓰신 발문이 들어 있는 서적의 복사본을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이에 이를 소개합니다. 이 서적을 통해 제작 당시인 1553년에 공께서는 공과 호가 같은 구암 이정과 깊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초 정보를 주신 괴산의 규문아저씨와 자료를 주신 태석님께 감사드립니다.

 

<感興詩>(중간본)속에 실린 구암공(휘 충갑)의 발문

   *<감흥시> 소개

    (1)서적소개 : 주문공(주희) 선생의 시(20 가지)와 무이구곡가를 해설한 책

    (2)<감흥시>(초간본) 제작자 : 門人 蔡模學

    (3)<감흥시>(초간본) 제작 연대 : 1304년(大德 甲辰 仲秋. 고려 충렬 30).

    (4)<감흥시>(중간본) 제작자 : 李楨 (1512-1571)

    (5)<감흥시>(중간본) 제작일 :  1553년(명종8, 39세). 12월(臘月) 하한(下澣)

    (6)<감흥시>(중간본) 발문 찬자 : 金忠甲

    (7)<감흥시>(중간본) 소장자 : 김태석(정의공파. 경북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거주. <충렬록>등 소장) . 2005. 9. 1. 복사본 입수.

    *이정(李楨)   (출전 : 디지털 한국학)
1512(중종 7)∼1571(선조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담(湛)의 아들이다.
1536년(중종 31)진사로 별시문과에 장원, 성균관전적에 보임되었다. 다음해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예조정랑을 거친 뒤 연로한 부모봉양을 위하여 경상도 선산부사로 나갔다가 1552년(명종 7)사성, 이듬해 청주목사를 지냈다.
이때 선정을 베풀고 효행이 뛰어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되었다.
1555년 왜구가 호남성에 침입하자 이를 구원하러 갈 때는 군기가 엄정하여 그 위엄에 눌려 왜구들이 도망하였다.
1559년 우부승지·형조참의·좌부승지 등을 거쳐 이듬해 병조참의·대사간·호조참의·예조참의를 지내고, 경주부윤으로 나가 옛 신라의 열왕묘(列王墓)를 보수하고, 서악정사(西嶽精舍)를 세워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1563년 중앙의 요직에 잠시 있은 뒤 다시 전라도 순천부사로 나가 갑자사화 때 사사된 김굉필(金宏弼)을 위하여 경현당(景賢堂)을 건립, 그를 제사하게 하였다.
1568년(선조 1)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지어 동쪽에는 거경재(居敬齋), 서쪽에는 명의재(明義齋)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어릴 때에는 송인수(宋麟壽)로부터 배우고 성장한 뒤에는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성리학에 밝았다. 사천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구암문집》을 비롯하여 《성리유편 性理遺編》·《경현록 景賢錄》·《논상례 論喪禮》·《한훤보록 寒暄譜錄》·《열성어제 列聖御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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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와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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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암공 (휘 충갑)의 발문(맨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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