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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당 김선생(수녕) 간략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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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5-09-28 12:33 조회1,47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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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養堂 金先生(壽寧)幹略年譜  왕조실록발취

1歲 1436年[世宗18 丙辰]
아버지 절충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과 어머니 순흥안씨와의 4男2女중 次男으로 태어났다. 
이 해(歲) 正月26日에 할아버지 김익정(金益精)이 卒하였다. 할아버지는 1396年(太祖5年)5月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고 대사헌과 3조참판을 역임 하였다.

2歲 1437年[世宗19 丁巳]
물시계인 행루(行漏)· 앙부일구등을 제조, 간의대(簡儀臺)를 설치.

3歲 1438年[世宗20 戊午]
왜선의 삼포평균분박(三浦平均分泊) 엄수를 지시. 장영실,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제작.

6歲 1441年[世宗23 辛酉]
장영실 등이 세계 최고(最古)의 측우기(測雨器)를 설치하고, 양수표(量水標)를 세움.

7歲 1442年[世宗24 壬戌]
이 때에 이미 글을 잘지어 신동(神童)이라 일컬어으며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며 “이 아이가 훗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것이다.”라고 하였다.

8歲 1443年[世宗25 癸亥]
통신사와 대마도주가 계해조약(癸亥條約) 체결. 세견선(歲遣船)을 5척으로 약정.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9歲 1444年[世宗26 甲子]
양전산계법(量田算計法) 제정. 무과삼관법(武科三官法) 실시.

11歲 1446年[世宗28 丙寅]
수양대군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
훈민정음 반포(頒布).

12歲 1447年[世宗29 丁卯]
《용비어천가》의 주해 완성.

15歲 1450年[世宗32 庚午]
동활자 경자자(庚子字) 주조. 정음청(正音廳)을 설치.

16歲 1451年[文宗1 辛未]
독서당에 들어가다. 최항.김수온.서거정.유성원.이극감.이승소.강희맹.허조등13인이며 이 때의 대제학은 정인지였다.

국방강화를 위해 군사(軍士)를 늘림. 문종이 창안한 화차(火車)를 제작하여 배치. 김종서(金宗瑞) 등이 《고려사》 136권을 개찬.

17歲 1452年[文宗2 壬申]
김종서 등이 《고려사절요》편찬.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과거과목 신설.

18歲 1453年[端宗1 癸酉]
봄(春)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이 해(歲) 가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뽑혀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 인 등을 죽이고 정권장악. 안평대군(安平大君) 사사(賜死)됨. 이징옥(李澄玉)의 난.

20歲 1455年[世祖1 乙亥]
9月에 수찬(修撰)이되어 병조판서 이계전, 예문제학 박팽년, 예조참판 하위지, 직제학 강희안, 직집 이승소 응교 서거정등과 관제(官制)를 편찬하다.

21歲 1456年[世祖2 丙子]
사육신(死六臣)사건.

22歲 1457년[世祖3 丁丑]
正月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어 춘추관사 신숙주, 춘추관 편수관 이극감, 춘추관 기주관 한계희, 강희맹, 성임, 김지경,과 더불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술(撰述)하다.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영월로 유배. 노산군(단종) 죽음.

23歲 1458年[世祖4 戊寅]
正月에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이 완성되자 각기 1자급을 제수받다.  2月에 직강(直講)이 되어 전지15결을 받다.
4月에 세조(임금)를 윤대하여 책을 만들어 나누어 주어 익히게 하고, 가뭄에 기황이 심하니 사치를 경계하고, 음란한 풍속이 방종하니 예전의 좋은 풍속을 위해 통금을 해야 한다고 논 하다. 

25歲 1460年[世祖6 庚辰]
5도(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체찰사인 한명회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다.

하삼도민(下三道民) 4,500호를 평안·강원·황해도에 이주시킴. 여진정벌

26歲 1461年[世祖7 辛巳]
正月에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고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하삼도 백성을 서북으로 옮기는데 대한 계책에 대해 출제하다.
7月 변방의 방비에 대해 치계하다.

월간경도감(刊經都監) 설치.

27歲 1462年[世祖8 壬午]
세자필선(世子弼善)이 되어 月2회 친강과 부시를 짓도록 하다.
5月에 경회루에서 대소 신료들이 입시한 가운데 《중용(中庸)》을 진강(進講)하다.
8月에 오탑.호(醐)철릭 2령을 하사 받다.

28歲 1463年[世祖9 癸未]
4月 관직을 집의(執義)로 다시 6月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제수 받고 당상관에 오르다.
7月 《오월춘추(吳越春秋)》를 수교(晩校)하다.
9月 서거정(徐居正)등과 함께《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을 명 받다.  

홍문관(弘文館) 설치.

29歲 1464年[世祖10 甲申]
2月에 관직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10月에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제수 하다. 

전폐(箭幣)를 주조.

30歲 1465年[世祖11 乙酉]
4月 관직을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삼고 5月에 다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제수하고 11月에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삼다.

31歲 1466年[世祖12 丙戌]
모친(母親) 상(喪)을 당 하였다.
밀산군(密山君) 박중손(朴仲孫)의 신도비(神道碑)를 찬(撰)하다.

전법(科田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32歲 1467年[世祖13 丁亥]
12月 예조참판(禮曹參判) 이함장(李諴長)의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다.

이시애(李施愛)의 난. 규형(窺衡)과 인지의(印地儀)를 이용한 삼각측량법을 발명.

33歲 1468年[世祖14 戊子]
2月 상정소(詳定所)에 나아가 《주역구결(周易口訣)》을 참정(參定)하다.
8月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 하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제수 되다.

남이(南怡)· 강순(康純) 등이 반역으로 사형됨.

34歲 1469年[睿宗1 己丑]
관직을 중추부 동지사(中樞芬知事)로 삼았다.
4月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찬술(撰述)하는데 참여하다.
《경국대전》 완성

35歲 1470年[成宗1 庚寅]
正月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사간원 대사간(行司諫院大司諫)으로 삼다.
대사간으로서 40여 건의 명상소문을 남기다.

36歲 1471年[成宗2 辛卯]
4월 좌리공신(左理功臣) 4등에 책록 복창군(福昌君)으로 관작을 제수하다.
6月 가정대부(嘉靖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 하다.
9月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제수하다.

37歲 1472年[成宗3 壬辰]
春正月 인재(仁齋)(강희안姜希顔)의 행장(行狀)을 엮다.
5월 신숙주.한명회.강희맹.양성지.정난종등과《예종실록》편찬에 참여하여 완료하다.
3月 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하다.

38歲 1473年[成宗4 癸巳]
7月 3日에 卒하니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문도(文悼)라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일찍 죽은 것을 도(悼)라 하였다. 슬하에 1男2女를 두었다.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조숙하여 반고(班固)의 문을 본받아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않았다. 사조실록(四朝實錄)을 편찬할때에 대개의 서사는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이름을 세상에 내어 일대의 문학에 용모와 재주가 뛰어났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시문(詩文)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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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김태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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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