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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군 문광면의 김만협 효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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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9-28 15:47 조회1,6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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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때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에 있는 안렴사공파 문광문중의 김만협의 효자각을 다녀왔습니다. 사진 몇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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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각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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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각 김만협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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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협 효자 정려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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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자 김만협 행록>

 

김만협(金萬協, 1640-1693)
字는 世珍, 安東金氏 按廉使公 金士廉의 후손이며 金天海의 아들이다. 벼슬은 朝奉大夫 童蒙敎官으로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효성이 다하여 동분서주하며 온갖 약을 구하여 써보았으나 백약이 무효로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다. 천우신조하여 효성이 지극한 탓인지 5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당하여 20리 떨어진 괴산읍 질골에 묘를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의 복상동안은 한서풍우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3년 죽을 먹으며 지냈다 한다.
3년간 성묘 다니는 동안 하루는 묘소근방의 산에 불이 일어나 부친의 묘소가지 번져왔다. 너무나 놀란 그는 옷을 벗어 물을 적셔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그후 화상과 화기를 마셔 병을 얻게되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숙종조에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괴산군지, 1990>

■ 김욱, 김직, 김?, 김? (金稶·金稙·金 禾+ ?·金 禾+遂)
본관은 安東, 金萬協의 아들들로서, 모두 부모를 위하여 誠孝가 독실하여 旌閭했다. <괴산군지, 1990>

■ 부지런하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한 김만협(金萬協)
괴산읍에서 남쪽으로 미원행 도로를 따라 5km가면 문광국민학교가 있고 이를 지나 약 1. 5km를 가면 신기리가 나오고 좌측으로  구 신기초등학교가 나온다. 여기서 약 50m 좌측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고려말의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인 안렴사 오은 김사렴의 10대손 金天海의 아들 萬協의 것이다.
1640년에 출생하여 남달리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여 그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로서 1692년(숙종18) 3월 8일 문중에서 상의하여 세우게 되었다.

공은 자녀를 2남 5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남다른 효자였다. 독신 효자는 없다는 말도 있지만 金萬協이 효자로 교지를 받기까지는 아우되는 萬전의 뒷받침이 컸다. 아우 만전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 가계를 구기지 않게 뒷받침하였고 형 만협은 어버이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극진히 보살펴 드렸다고 한다.
만협은 순창조씨와 혼인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부인 조씨의 부친은 공조좌랑에 오른 덕망높은 분이었고, 그의 증조부는 사과 벼슬에 오른 이였다.
정부인 순창조씨는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후처로 전의이씨를 맞아들였다.
만협은 조봉대부 동몽교관의 벼슬에 올라 나라일을 보살피는 한편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행을 다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효성을 다하여 동분서주하여 온갖 약을 구하여 써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만협은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부친의 입에 넣어드렸다. 천우신조하여 효성이 지극한 탓인지 5일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를 20리 떨어진 괴산읍 질골에 정하고 예법에 따라 3년간 복상 동안은 한서풍우를 불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묘하였으며, 식생활에 있어서도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음식을 피하기 위하여 3년간은 밥을 먹지 않고 죽을 먹으며 복상기간을 마쳤다고 한다.
3년간 성묘 다니는 동안 하루는 묘소 근방의 산에 불이 났다. 산불은 부친의 묘소에까지 번져왔다. 너무나 놀란 만협은 옷을 벗어 물을 적셔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불을 껐다.
그후 만협은 화상과 화기를 마시고 병을 얻게 되어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169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행 사실은 정려 및 안동김씨 가보에 기록되어 있다.) <괴산군 내고장전통가꾸기, 1982>

■김만협 효자각(金萬協 孝子閣)
김만협-김일 효자정려 (괴산군 문광면 신기리)
이 정려각은 효자 金萬協 (1640-1693)의 정려로 숙종18년 (1692)에 세운 것인데, 1985년 효자 金溢(1719-?) 의 정려를 합설하였다.
김만협의 자는 世珍, 본관은 안동이며 金天海의 아들이다. 부친의 임종이 가까우매 단지주혈하여 5일을 더 연명하였다. 3년 복상동안 20리길을 매일 성묘하였으며 성묘중 산에 불이 일어나 묘소에 가까워지자 옷을 벗어 물을 적시어 불을 껐다. 이 일로 화상과 화기를 마셔 세상을 떠났다.
김일의 자는 益三, 김만협의 5세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극진하였다. 모친의 병이 깊었을 때 지성을 다하여 치료하였으며 천수를 다하매 10리 밖에 장사하고 궤연에서 잠을 자며 3년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정려각 안에는 孝子 贈朝奉大夫 童蒙敎官 金萬協之文, 孝子 贈嘉善大夫 通德郞 金溢之文 이라 쓴 편액 2점과 김만협의 행적을 적은 孝子金公行錄, 김일의 효행을 기록한 金溢孝行錄이 판각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2칸, 측면1칸의 목조와가로 보호철책을 둘렀다. <괴산의 문화재> <청주대학교박물관, 1994, <<괴산군 문화유적>>, 85.> <괴산군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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