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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4)우리 집과 내 어릴 적(2) - 아버지와 백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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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0-06 14:11 조회1,5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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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과 내 어릴 적(2) - 아버지와 백부들

또 한 번은 역시 그 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은 하고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먹으리라 하고 그 스무 냥 꾸러미를 모두 꺼내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三從祖)를 만났다.

"네, 이 녀석, 돈은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

하고 내 앞을 막아 서신다.

"떡 사먹으러 가요."

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아비가 보면 이 녀석 매맞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고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다가 아버지를 주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먹고 마음이 자못 불평하여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빨랫줄로 나를 꽁꽁 동여서 들보 위에 매어 달고 회초리로 후려갈기시니,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도 밭에서 아니 돌아오신 때라 말려줄 이도 없이 나는 매를 맞고 달려 있었다. 이때에 마침 장련(長連) 할아버지라는 재종조께서 들어오셨다. 이 어른은 의술을 하는 이로서 나를 귀애하시던 이다. 내게는 정말 천행으로 이 어른이 우리 집 앞을 지나시다가 내가 악을 쓰고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들어오신 것이었다.

장련 할아버지는 들어오시는 길로 불문곡직하고 들보에 달린 나를 끌어 내려 놓으신 뒤에야 아버지께 까닭을 물으셨다. 아버지가 내 죄를 고하시는 말씀을 다 듣지도 아니하시고 장련 할아버지는 나이는 아버지와 동갑이시지마는 아저씨의 위엄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치시던 회초리를 빼앗아서 아버지의 머리와 다리를 함부로 한참 동안이나 때리시고 나서야 비로소,

"어린 것을 그렇게 무지하게 때리느냐?"

하고 책망하셨다. 아버지께서 매를 맞으시는 것이 퍽도 고소하고 장련 할아버지가 퍽도 고마웠다.

장련 할아버지는 나를 업고 들로 나가서 참외와 수박을 실컷 사먹이고 또 그 할아버지 댁으로 업고 가셨다.

장련 할아버지의 어머니 되시는 증종조모께서도 그 아드님으로부터 내가 아버지한테 매를 맞은 연유를 들으시고,

"네 아비 밉다. 집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서 살자."

하고 아버지의 잘못을 누누이 책망하시고 밥과 반찬을 맛있게 하여 주셨다. 나는 얼마만큼 마음이 기쁘고 아버지가 그 할아버지한테 맞던 것을 생각하니 상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모양으로 이 댁에서 여러 날을 묵어서 집에 돌아왔다.

한 번은 장마비가 많이 와서 근처에 샘들이 솟아서 여러 갈래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나는 빨강이, 파랑이 물감통을 집에서 꺼내어다가 한 시내에는 빨강이를 풀고, 또 한 시내에는 파랑이를 풀어서 붉은 시내, 푸른 시내가 한 데 모여서 어울려지는 양을 장난으로 구경하고 좋아하다가 어머니께 몹시 매를 맞았다.

종조께서 이곳에서 작고하셔서 백여 리나 되는 해주 본향으로 힘들여 행상(行喪)한 것이 빌미가 된 것인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이르러는, 여기 와서 살던 바툰 일가들이 한 집, 두 집 해주 본향으로 돌아갔다. 우리 집도 이 통에 텃골로 돌아올 때에 나는 어른들의 등에 업혀 오던 것이 기억된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우리 집은 농사로 살아가게 되었으나 아버지께서 비록 학식은 기성명 정도지마는 허위대가 좋고 성정이 호방하고, 술이 한량이 없으셔서 강씨, 이씨라면 만나는대로 막 때려 주고는 해주 감영에 잡혀 갇히기를 한 해에도 몇 번씩 하셔서 문중에 소동을 일으키셨다.

인근 양반들이 아버지를 미워하지마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때 시골 습관에 누가 사람을 때려서 상처를 내면 맞은 사람을 때린 사람의 집에 떠메어다가 누이고 그가 죽나 살아나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한 달에도 몇 번씩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 죽게 된 사람을 메어다가 사랑에 누이는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사람을 때리시는 것은 비록 취중에 한 일이라 하더라도 다 무슨 불평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신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도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보시고는 참지 못하여서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 식으로 친불친을 막론하고 패어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불 같은 성정이신 줄을 알므로, 인근 상놈들은 두려워 공경하고 양번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

해마다 세말(歲末)이 되면 아버지는 달걀, 담배 같은 것을 많이 장만하여서 감영의 영리청, 사령청에 선사를 하였다. 그러면 그 회사(回謝)로 책력이며, 해주먹 같은 것이 왔다. 이것은 강씨, 이씨 같은 양반들이 감사나 판관에게 가 붙는 것에 대응하는 수였다.

영리청이나 사령청에 친하게 하는 것을 계방(契房)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계방이 되어 두면 감사의 영문이나 본아에 잡혀가서 영청이나 옥에 갇히는 일이 있더라도 영리와 사령들이 사정을 두기 때문에 갇히는 것은 명색뿐이요, 기실은 영리, 사령들과 같은 방에서 같은 밥을 먹고 편히 있고 또 설사 태장, 곤장을 맞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령들은 매우 치는 시늉을 하고, 맞는 편에서는 죽어가는 엄살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뿐더러 만일 아버지께서 되잡아 양반들을 걸어서 소송을 하여서 그들이 잡혀오게 되면 제아무리 감사나 판관에게 뇌물을 써서 모면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편인 범 같은 영속들에게 호되게 경을 치고, 많은 재물을 허비하게 된다. 이렇게 망한 부자가 1년 동안에 10여 명이나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인근 양반들은 그를 달래려 함인지 아버지를 도존위(都尊位)에 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도존위 행공을 할 때에는 다른 도존위와 반대로 양반에게 용서 없이 엄하고, 빈천한 사람들에게는 후하였다. 세금을 받는 데도 빈천한 사람의 것은 자담하여 내는 수가 있었지마는, 그들에게 가혹히 하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3년이 못 되어서 아버지는 공전흠포(公錢欠逋) - 공금 횡령 - 로 면직을 당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양반들의 꺼림과 미움을 받아서 그들의 아낙네와 아이들까지도 김순영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아버지의 아이 적 별명은 효자였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께서 왼손 무명지를 칼로 잘라서 할머니의 입에 피를 흘려 넣으셨기 때문에 소생하셔서 사흘이나 더 사셨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4형제 중 백부 - 휘 백영 - 는 보통 농군이셨고, 셋째 숙부도 특기할 일이 없으나 넷째 계부 - 휘 준영 - 가 아버지와 같이 특이한 편이셨다. 계부는 국문을 배우는 데도 한 겨울 동안에 가자에 기역자도 못 깨우치고 말았으되, 술은 무량으로 자시고, 또 주사가 대단하여서 취하기만 하면 꼭 풍파를 일으키는데 아버지는 양반에게만 주정을 하셨지마는, 준영 계부는 아무리 취하여도 양반에게는 감히 손을 못 대고 일가 사람에게만 덤비셨다. 그러다가 조부님께 매를 얻어 맞으시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아홉 살 적에 조부님 상사가 났는데 장례날에 이 삼촌이 상여 메는 사람들에게 야료(惹鬧)를 하여서 결국은 그를 결박을 지어놓고야 장례를 모셨다. 장례를 지낸 뒤에 종증조의 발의로 문회(門會)를 열고 이러한 패류(悖類)는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단단히 정치를 하여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 하여 의논할 결과로 준영 삼촌을 앉은뱅이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발 뒤꿈치를 베었으나 분김에 한 일이라 힘줄은 다 끊어지지 아니하여서 병신까지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부댁 사랑에 누워서 호랑이처럼 영각을 하는 바람에 나는 무서워서 그 근처에도 못가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상놈의 소위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때에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집의 허다한 풍파가 모두 술 때문이니, 두고 보아서 네가 또 술을 먹는다면 나는 자살을 하여서 네 꼴을 안 보겠다."

나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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