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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파 판서공(휘계현)의 영암 선정비 사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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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10-06 17:09 조회1,693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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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2일 익원공파 완식 종친님으로부터 엄정출신이신 판서공(휘 계현)의 영암 선정비 사진을 이메일로 받고 이제서야 보정작업을 하여 올렸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완식 종친님께서 당시에 올리셨던 글도 함께 게재합니다.

완식 종친님 죄송합니다.

 

김계현(金繼賢)  (嘉靖丙寅(1566.명종21년)생-萬曆戌申(1608.선조41년)

본관 안동. 字 善承(선승). 충주 엄정 출생. 고조는 영흥부사 智童(지동) 증조 滂(방) 조 운봉현감 彦淸(언청). 부 愼(신) 모 파평윤씨.

25세 때 무과 급제하여 임진왜란 시 갑사(甲士)로써 선조임금을 호위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이후 선전관을 거쳐  도총도사(선조25),  의주판관(선조26), 호조 좌랑, 정랑, 군리첨정, 군자감정, 봉산군수(선조 27년), 여주목사, 개천부사, 단천군수를 지냈다. 선조 34년 영암군수를 지낼시 전염병을 목민관으로써 잘 처리한 공로로 선조로부터 표리(表裡)를 하사받았다. 봉산군수 및 남원부사, 만포진첨사(병마절제사)를 지냈으며 선조41년 43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2남 1녀를 두었다.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 를 증직 받았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선무원종공신녹권(규장각소장) 안동김씨 익원공파보, 안동김씨 대동보, 엄정면 논강리 논동(논리동) 소재 비문.


 * 계현공 선정비 탐방기 (2005. 9. 12. 완식(익) 제공)

 

2005. 8. 23

지난 주말에  다녀오고자  했던 전남 영암을 다녀왔습니다. 십 수년만에 식구들과 호남 고속도로를 달려백양사 그늘 아래 툇마루가 있는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습니다. 고추장으로 얻은 힘을 모아 광주로 달려  5.18 국립묘지를 들렀습니다. 그 일을 고3 때 듣고, 돌던지면서 거리에서 대학 생활을 한 지 25년 만입니다. 비문 하나 하나를 보면서 절절한 사연에 눈물이 흘렀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녀석은 왜 그러시냐고 묻고.... 망월동 묘지에서 낯익은 이름들을 봅니다. 잡초속에 덮혀진 이한열과 김남주시인과......


나주를 들러 여러 고분군을 바라보니 무한한 상상력이 넘칩니다.  영암에 들러 영암군청을 갔습니다. 13대 조의 형님이신 휘 계 현 공이 선조대에 임란 공신 3등에 책 되신 후 조야의 많은 사람들이 시기했는지 왕조실록에는 여주목사를 제수받고 가실 때 시골인 엄정에 들러서 갔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셨지요. 그런 후 선조 34년에 영암군수로 가셔서-직급 상 행군수 라 여겨집니다- 역병을 잘 다스렸다고 선조임금으로부터 표리를 하사받기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만큼 계셨는지 아득했는데  군청에 부탁을 몇 번해서 창고에서 남아있는 여분이라고 영암군지를 보내주셔서 확인해보니 선조 38년까지 약 4년여를 근무하셨습니다. 그 때 향교도 복원하시고 여러 정자나 누각 등을 복구하신 것 같습니다. 선정비라도 남아 있을 까 찾아보니 군청에는 없고 영암 읍 사무소 담장켠에 근세의 선정비 몇 점이 있습니다. 군청앞 중원회관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음식 맛이 입에 착 붙습니다. 김치와 젓갈과 음식의 간이 충청도 토박이인 제게도 딱 맞습니다. 읍사무소 직원이 일러준 여관에서 하루를 묵고 월출산을 돌아 구림과 왕인 박사 유적지를 들렀습니다. 경치와 멋과 역사와 충절이 어딜가나 넘칩니다. 월출산 입구 상가에서 식사를 낙지해장국으로 들자니 매콤함과 낙지의 맛과 무우의 시원함이 입에 그득합니다. 향교에 들러 선정비등을 보고자 했으나 아 일요일.......


해남으로 달립니다. 윤선도와 윤두수와 대흥사와 미황사를 거칩니다. 땅끝으로 달려가자니 해수욕장이 한산 합니다. 바다를 못보았던 아이들을 하냥 놀자 합니다. 땅끝들러 큰 숨 한번 쉬고 고구마 하나물고 달리자니 3000원만 내면 바지락을 잡는 체험을 할 수 있답니다. 식구들 저마다 호미하나 씩 들고 갯벌에서 신나게 잡았습니다. 바지락 칼국수를 생각하면서.....


시원한 길로 올라서니 비는 하염없이 옵니다. 광주를 지나 백양사를 지나 전주를 와도 비는 옵니다. 향교의 선정비를 못본것이 눈에 밟힙니다. 그곳에는 아마도  계현 공의 선정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돌아와 향교에 전화를 드려보니 10여개 이상의 선정비가 있답니다. 하지만 와서 확인하라는 말씀에 내일 또 달려 볼렵니다. 남도로.


참고로 충주 엄정 출신의 익원공파 문정공 - 지동- 방- 언청 -신 공의 장자 휘 계 현 공의 약력은 충주시 홈페이지에 게시한 데로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계현공의 2남 중 장자 인 휘 적 공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겸 삼도수군 통제사를 지내셨으며 동생 휘 일 공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북병사)를 지내셨습니다.


2005. 8. 25

 이른 아침 들뜬 마음에 아침을 먹는지 마시는지 허겁지겁 서두릅니다. 대충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집을 나섭니다. 기름값 타령을 할 마누라에게는 학교에 가노라고 해놓고 유성 톨게이트를 올라 호남 고속도로를 내려 갑니다. 모악산이 나오고 내장산이 나올 때쯤은 서서히 휴게소의 커피 한잔이 생각 납니다. 백양사 휴게소에서 자동판매기의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자니 하늘이 유난히 푸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서가 지났다드니 가을인가 봅니다.

 광산 나들목을 나가 나주로 갑니다. 왕건의 전설같은 얘기와 조선시대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를 총괄하던 너른 벌판 위 아늑하게 자리잡은 나주의 전경이 새삼 눈에 들어옵니다. 영산포를 지나고 조금 더 달리니 영암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 옵니다. 영암가는 길 섶의 통나무집 식당에서 5천원 짜리 백반을 시키니 반찬이 스무가지는 넘게 나옵니다. 시원한 냉수 한 잔까지 곁들이니  포만감이 넘실댑니다.

 영암에 도착해서 먼저 영암 향교를 갑니다. 사무국장 님께는 사전에 전화를 드려 놓았었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리니 어렵지 않게 "선정비가 비림속에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열 두어개의 선정비와 중건비 등이  홍살문을 지나  전각 옆 담장 밑으로 깔끔하게 일열로 서있습니다. 사무국장 님 말씀으로는 17-8년 전에 영암 읍내에 산재해 있던 것들을 향교내로 이설을 했는데 마모되거나 파손될까 노심초사 해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좌측 세번째 것이 휘 계현 공의 군수 선정비라 하시길래 긴가민가 합니다. 글씨가 마모되어 흐릿하게 보이고 내리는 빗자락에 글자가 더욱 않보였기 때문 입니다. 국장님이  '전남향교문화사' 라는 두툼한 두권의 책을 꺼내시더니 영암향교 편의 선생안을 펼쳐보이십니다. 관안이라고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영얌향교에 실린 기록으로는 1476년(성종7년) 부터 1972년까지 총 296명이 군수를 지냈답니다. 평균 재임기간은 20개월 이고 조선시대에는 264명이 군수를 지내셨고  왜정.미군정기 동안은 14인, 정부수립이후 37인 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군수 264 명 중 순직1명. 병사 4명. 처귀(관직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감) 는 68명. 파면 79명. 영전33명. 전근.기타 81명 이라 합니다. 파면된  79명 중에서도 체포되어 형벌을 받은 자가 13명.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파면시킨자가 23명. 기타 각종 사유의 파면이 28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군수의 대부분이 행군수 이고 수군수는 단 3명이었다고 합니다.이는 조정에서 영암을 다른 군에 비하여 같은 군이라도 높이 대우하였음을 반증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계가 높고 직이 낮은 것은 행이라 하고 계가 낮고 직이 높으면 수라 하는 행수의 제도가 조선 세종때 정립되어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휘 계현 공은 임란 시의 공적으로 선무원종호성공신 3등에 책되시어 여주목사로  부임시 향리인 충주 엄정을 들렀다고 비판을 받으나 선조께서 너그러이 봐주신것이 왕조실록에 나옵니다만 그 이후 이곳 영암군수로 오시니 공신을 특별하게 중요한 지역으로 보내신 듯 합니다. 이곳 영암은 육지로는 평야와 산물이 많고 바다로는 왜적의 출입로니 중요한 곳일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전남향교문화사' 중의 영암의 역대 군수 기록을 보니 선조 34년(1601) 에 취임하셔서 선조 38년 (1605)에 이임하신것으로 나오고  요적 항목에는 "만포첨사로 이임. 비가 세워짐" 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어사의 계로 부정으로 파면된 사람 등등 역대 군수의 치적이나 공과가 짧지만 적시된 요적에 우리 조상님은 안동 김문의 선조님은 자랑스러이 적혀 있었습니다.  긍지와 뿌듯함이 부풀어 오릅니다.

 향교를 나서서 영암군청으로 갑니다. 문화관광부 문화예술 담당자께 영암군지를 보내준 것을 감사인사 여쭙고 영암지역의 금석문 등을 조사한 자료등이 있는지 물어보니 1996년 12월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고한 '영암군 금석문 조사 보고서'를 보여 줍니다. 그것을 살펴보니 앞부분에 2번째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 군수 김공 계현선정비" 소재지: 영암읍 교동리 365 영암향교내.

   실측: 비좌: 100x50x12. 비신:124x53x15. 비향:서. 건립연대:조선선조38년(1605). 기타: 1601 - 1605 군수 역임. 만포첨사로 이임. 전면에만 음각하여 새김. 마멸이 심한 상태. 자경은 12.5 cm. 전면(서): 군수김공계현선정비" 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찾고자 하니 찾아 지는가 봅니다. 담당 직원에게 감사드리니 자신의 일인 양 기뻐 합니다. 영암군의 곰무원들이 모두 친절하신 것 같습니다. 일회용 카메라를 하나 구입해  다시 향교로  옵니다. 비석 앞에 서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글자가 조금씩 눈에 들어 옵니다.  사진을 찍고 사무국장님께 그런 사정을 말씀드리니 축하를 하십니다. 그러면서 안동김씨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씀들을 해주십니다. 대성 벌족이고 유명하신 학자와 경세가와 충신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니 하나같이 정확하고 확실하십니다. 또  마음이 뿌듯해 집니다.  향교문화사가 잘 만들어진 것 같아 인쇄비만 드리고 책을 한질 구해 길을 나섰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나주를 지나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멋진 분재원이 있어 잠깐 들렀습니다. 화신 분재원 이랍니다. 이곳에 들러 분재를 구경하고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같이 구경하신 분이 광주로 가는 지름길을 일러줄테니 따라 오라는 군요. 그분의 BMW 승용차를 따르니 얼마안되어 고속도로 나들목이 나옵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고속도로에 올라 살살내리는 빗길을 달립니다.

 백양사에서 빠져나와 담양을 갑니다. 메타스퀘이어 가로수길을 달려 담양을 거쳐 순창으로 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아찌 반찬을 몇 개 사고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아주머니는 덤으로 된장도 맛보라며 한봉지 담아 주십니다. 인정을 담아 다시 전주를 향합니다. 강천산을 지나니 모악산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전주를 돌아 대전으로 오니 유성 나들목 앞 월드컵 경기장 불 빛이 환합니다. " 아, 오늘이 k-리그 축구가 있는 날이지" 경기장에 들어서니 후반전이라고 입장료도 안받습니다. 대전과 대구의 시합이 있습니다. 빗물먹은 푸른 잔디가 싱싱합니다. 대전이 2:1 로 이겼지요. 경기장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 오늘만 같아라". 조상을 알고, 사람살이를 느끼고, 사람의 정을 맛보았던 오늘만 같아라.

 집으로 돌아와 "향교문화사"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전라우도 수군절제사를 지내셨던 휘 계현 공의 아드님 휘 일(초명 술) 이 생각 납니다. 공의 기록을 찾다보니  상권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휴가 땐 공의 흔적을 찾아 전라 우수영 을 또 찾아 헤메야 할 것 같습니다. 영암은 제게새로운 임무를 주는 곳 같습니다. 그렇듯  영암은 저의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올 여름엔......

 

  <사진 소개> (2005. 9. 12. 완식(익) 촬영. 10. 6. 항용(제) 편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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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 향교 내의 선정비군, 좌측에서 세번째가 판서공(휘 계현)의 선정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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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서공(휘 계현)의 선정비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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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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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 향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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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교 내의 누각>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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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완식종친님, 보내주신 사진을 포토샵으로 자르고 색과 명암을 최대한 보정하는 작업을 했으나 최초 사진상태의 한계로 위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추후 디카로 다시 찍어 주시면 교체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문의 글씨가 나오도록 근접촬영을 바랍니다.

김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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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항용종친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너무 근사하고 고맙기 한량 없습니다.
다만 비문은  세월의 탓으로 거의 마모가 되어 있는 상태 였고 탁본으로 순천대 박물관에서도 확인했던 모양입니다. 간혹 글자가 흐릿하게 보입니다만 사진을 찍던 날 비가 내려서 그 글씨가 더욱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멋지게 작업을 해주셔서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대전에서 김완식 배

김완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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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글을 대종회보에 실어주실 수 있으실런지요?
항용 종친님의 노고가 좀 풀어지실 수 있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