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5)우리 집과 내 어릴 적(3) - 글공부를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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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0-10 14:39 조회2,261회 댓글0건본문
우리 집과 내 어릴 적(3) - 글공부를 시작하다
이때쯤에는 나는 국문을 배워서 이야기책은 읽을 줄 알았고 천자(千字)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얻어 배워서 다 떼었다. 그러나 내가 글공부를 하리라고 결심한 데는 한 동기가 있었다.
하루는 어른들에게서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몇 해 전 일이다. 문중에 새로 혼인한 집이 있었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서울 갔던 길에 사다가 두셨던 관을 밤에 내어 쓰고, 새 사돈을 대하였던 것이 양반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그 관은 열파(裂破)를 당하고 그로부터 다시는 우리 김씨는 관을 못쓰게 되었다는 것이다.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울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고, 우리는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는가고 물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방아메 강씨도 그 조상은 우리 조상만 못하였지마는 일문(一門)에 진사(進士)가 셋이나 살아 있고, 자라소 이씨도 그러하다고. 나는 어떻게 하면 진사가 되느냐고 물었다. 진사나 대과(大科)나 다 글을 잘 공부하여서 큰 선비가 되어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된다는 대답이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부쩍 공부할 마음이 생겨서 아버지께 글방에 보내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지도 주저하지 아니할 수 없으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으니 이웃 동네 양반네 서당에를 갈 길밖에 없다. 그런데 양반네 서당에서 나를 받아줄지 말지도 알 수 없는 일이어니와, 또 거기 들어간다 하더라도 양반의 자식들의 등쌀에 견디어 낼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얼른 결단을 못하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 아이들과 이웃 동네 상놈의 아이들을 모아서 새로 서당을 하나 만들고 청수리 이 생원이라는 양반 한 분을 선생으로 모셔 오기로 하였다. 이 생원은 지체는 양반이지마는 글이 바투어 양반 서당에서는 데려가는 데가 없기 때문에 우리 서당으로 오신 것이었다.
이 선생이 오신다는 날 나는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서 마중을 나갔다. 저쪽에서 나이가 쉰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 한 분이 오시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인사를 하시고 나서 날더러,
"창암(昌岩)아, 선생께 절하여라."
하셨다. 나는 공손하게 너붓이 절을 하고 나서, 그 선생을 우러러보니 신인(神人)이라 할지 하느님이라 할지 어떻게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기로 하였다. 그 때에 내 나이가 열 두 살이었다.
개학하던 첫날 나는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다섯 자를 배웠는데, 뜻은 알든 모르든 기쁜 맛에 자꾸 읽었다. 밤에도 어머니께서 밀매가리 하시는 것을 도와드리면서 자꾸 외었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서 선생님 방에 나가서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서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먼 데서 오는 동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는 산골 신존위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기게 되어서 나는 밥그릇 망태기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에 가기까지, 서당에서 집에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 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글동무 중에는 나보다 정도가 높은 아이도 있었으나 배운 것을 강(講)을 하는 데는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이러한 지 반 년 만에 선생과 신존위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필경 이 선생을 내어 보내게 되었는데, 신존위가 말하는 이유는 이 선생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었거니와, 사실은 그 아들이 둔재여서 공부를 잘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것을 시기함이었다.
한 번은 월강 - 한 달에 한 번 하는 시험 - 때에 선생이 내게 조용히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내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잘못하고 선생이 뜻을 물어도 일부러 모르라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기러하오리다 하고 약속을 하고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서 이날에 신존위의 아들이 처음으로 한 번 장원(壯元)을 하였다.
신존위는 대단히 기뻐서 이 날 닭을 잡고 한 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신존위의 아들을 장원시키지 못한 죄로 이 선생이 퇴짜를 맞은 것이니 참으로 상놈의 행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불러 작별 인사를 하실 때에 나는 정신이 아뜩하여서 선생님의 품에 매어달려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나는 며칠 동안은 밥도 아니 먹고 울기만 하였다.
그 후에도 어떤 돌림 선생 한 분을 모셔다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신불수가 되셔서 자리에 누우시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전폐하고 아버지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근본 빈한한 살림에 의원이야 약이야 하고 가산을 탕진한 끝에 겨우 아버지는 반신불수로 변하여서 한편 팔과 다리를 쓰시게 된 것만도 천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반신불수시고는 살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은 고쳐야 하겠다 하여 어머니는 병드신 아버지를 모시고 무전 여행을 나서시게 되었다. 문전 걸식을 하면서 고명 의원을 찾아서 남편의 병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집도 가마솥도 다 팔아 없어지고, 나는 백모님 댁에 맡긴 몸이 되어서 종형들과 소 고삐를 끌고 산과 들로 다니며 세월을 보내었다.
부모님은 안악, 신천, 장연 등지로 유리 표박하시는 동안에 아버지 병환이 신기하게도 차도가 계셔서 못쓰던 팔, 다리도 잘은 못해도 쓰게 되셨다. 그래서 내 공부를 시키실 목적으로 다시 본향으로 돌아오셨다. 일가들이 얼마씩 추렴을 내어서 의지(義肢)를 장만하고, 나는 또 서당에를 다니게 되었다.
책은 남의 것을 빌어서 읽는다고 하더라도 지필묵(紙筆墨) 값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머님이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지필묵을 사주실 때에는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내 나이 열 네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벼 열 섬짜리, 닷 섬짜리, 하고 훈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학력을 평가하였다. 그들은 다만 글만 부족할 뿐 아니라, 그 마음씨나 일하는 것에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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