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당 金質 (익원공파)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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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05 03:11 조회1,618회 댓글0건본문
영모당 金質 (익원공파)-01
요즈음 지나간 대종회보를 다시 훓어보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익원공파이신 영모당 金質 (1496-1561) 관련 내용이 있어 여기저기서 관련내용을 모아 보았습니다.
영모당 金質 선생의 행장이 포암 윤봉조가 지은 포암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검색결과 이 포암집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4월 14일 국립중앙도서관 행사때 한번 찾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 대종회보 제63호 (1999년 1월호)
⊙ 영모당 김선생 행장
永慕堂의 휘는 質이며 자는 文素로 익원공 휘士衡의 둘째 손자 휘宗漢의 현손으로 효행이 출천지대효로 널리 알려져 있는 어른이시다.
공의 저서에는 永慕錄(영모록)과 六事自責說(육사자책설)의 저서가 있는데 현재까지 발견을 못하여 각방으로 추신하던 중
뜻밖에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지금으로부터 267년전에 전 참판인 포암 윤봉조가 지은 영모당 김선생의 행장을 발견하여 너무고 기쁜 나머지 널리 알리고 싶어 유작시를 소개하는 바이다.
題目 竹院
一生天所命何物敢吾侵 (일생천소명하물감오침)
--- 한평생 하늘이 명한 바에 무엇이 나를 침노하랴
風月深己知江山亦許心 (풍월심기지강산역허심)
--- 풍월이 이미 깊이 알고 있고 강산도 마음으로 허락했네
閑匕 ? 自適役匕更焉尋 (한 ? 류자적역비경언수)
--- 한가히 애오라지 자적커든 힘겹게 다시 무얼 찾을손가
半 ? 園林不優遊日獨吟 (반 ? 원림불우유일독음)
--- 반묘의 동산이 있어 수풀 아래 노닐며 날로 혼자 시를 읊네
竹院口+宣塵隔紫門車馬稀 (죽원 ? 진격자문차마희)
--- 죽원에 세상 티끌 멀리하니 사립문 찾는 마차 드물더라
詩書爲我伴身世與時違 (시서위아반신세여시위)
--- 시서가 나를 위해 친구가 되니 세상사이 한 몸과 멀어졌네
歲月閑中去悲歎夢裏歸 (세월한중거비탄몽리귀)
--- 세월은 한가하게 지나가고 시비는 꿈속으로 사라졌네
? 堂供白髮惟欲舞班衣 ( ? 당공백발유욕무반의)
--- 어머님 흰 머리 이셨으니 이롱옷 바쳐입고 춤을 출까
위의 시문을 새로이 발견하니 잊혀졌던 문헌이 더 함은 물론, 현재 고창군 공음면 도암사에 명나라 황제가 친필사액한 효 현판이 봉안되어 있다.
이 글은 공의 15대손인 滿吉 현종이 제공하였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김질(金質){2}
1496(연산군 2)∼1561(명종 1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 안변부사 언룡(彦龍)의 증손, 통례원찬의(通禮院贊儀) 복중(福重)의 아들이다.
평양 토관(土官)으로 1508년(중종 3)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묘소에서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는 동안 부인마저 멀리하여 동네 사람들은 지극한 효도에 감동, 묘소가 있는 산을 제청산(祭廳山)이라 하였다.
홀아버지를 효성으로 모시다가 그마저 죽자 옷이 해어지도록 갈아 입지 않고 풀과 채소로 연명하며 3년간 여묘(廬墓)하면서 삭망·4명절·소상(小祥)때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집이 가난하여 제사에 쓸 제물이 없어 통곡을 하니 날던 꿩이 떨어졌다 하며, 제사에 쓸 장을 쥐가 흐려놓아 이를 한탄하니 밤 사이에 쥐들이 무리를 지어 장독 아래에 죽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인물됨을 높이 사서 김인후(金麟厚)는 그의 집을 영모(永慕)라 하였으며, 유희춘(柳希春)도 그의 행위를 경모하였다. 한때는 기대승(奇大升)·양응정(梁應鼎)과도 교유하였다.
저서로는 《영모록 永慕錄》·《육사자책설 六事自責說》이 있다. 사후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정문이 세워졌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圃巖集. 〈文守弘〉
▣ 고창군청 홈페이지 (http://www.gochang.chonbuk.kr/)
⊙ 김질(金質)
자는 문소, 호는 영모당, 본관은 안동이니 상락백 사형의 5대손이요 통례원통찬 복중의 아들이다. 1496년 공음면 개가리 출생.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등창을 ㅃ짤아 낫게 하고, 아버지의 상사에 흙을 가져다 성분하고 여묘했는데 어느날 제사 지내는 간장그릇에 쥐가 빠지매 공이 그 그릇을 안고 통곡하니 근처의 쥐가 모두 와서 그릇밑에서 죽었고,
아버지가 꿩고기를 좋아하여 젯상에 반드시 꿩고기를 올리는데 한번은 눈이 많이 내려 저자에 갈 수 없으매 불료를 한탄하니 꿩이 부엌으로 날아 들었다.
어머니의 상사에 여묘와 집의 거리가 들 하나 사이임에도 한번도 집에 온 일이 없었고 부인과 여비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는데 부인 김씨가 긴히 알릴 일이 있어 여비를 보내매 공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부인이 직접 나아갔으나 더욱 깊이 숨어 만나지 못했다.
어느날 밤 눈이 많이 내렸는데 그 묘 주위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그 산을 제청산이라 이름하였다. 해서 김인후가 그 집에 영모당이라 현판하고 미암 유희춘이 형소공의 효를 사모하던 중 무장현감으로 오게 되어 자주 상종하며 글을 지어 벽에 걸어주었고, 고봉 기대승, 송천 양응정이 모두 공의 효에 감복했다.
이때 명나라에서 우리나라 제일의 행의를 알리라 하여 전라도 안찰사 민성희에 의해 공의 효가 추천되어 1546년 명나라로부터 정려가 내려 공음면 칠암에 [孝子 進士 金質之閭]가 서고, 1613년 그곳에 도암사를 일으켜 주벽으로 향사한다. 저술로는 영모록과 육사자책설이 전한다.
⊙ 김경철(金景哲)
자는 윤보, 호는 청송당, 본관은 안동이니 진사 질의 증손이다. 1575년 공음면 개가리 출생.
부모의 상사에 6년을 여묘하고 복을 벗은 뒤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효로 남원교수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또 복호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선조 정유재란에 인근 선비와 함께 영광성을 지키고, 이괄의 난에 신유일 등과 함께 창의하여 군량을 모집하다가 난이 평정되자 양곡을 관아에 바쳤다. 도암사에 배향되었다.
⊙ 김익철(金益哲)
자는 우보, 호는 현무재, 본관은 안동이니 진사 질의 증손이요 은송당 경철의 아우이다. 1595년 공음면 개가리 출생.
나이 18에 무과에 올라 봉사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에 어가가 의주로 파천할 때 지존을 모시고 80리를 달려 신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고,
정유재란에도 창의하여 공적이 많았으므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주부를 제수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귀향했다. 도암사에 배향되었다.
⊙ [공음면] 하늘도 감동한 효자
소재지에서 한1.5키로 가면 개가비라고 허는 장터가 있어요. 유래는 안동 김씨에서 김직위라는 분이 효자였어요.
아버지가 평상시에 꿩고기를 좋아 허셨는데 제사 때마다 알미장터라고 거그를 매년 섣달에 짚신을 삼아 가지고 알미장터에 가서 팔아 가지고 꿩을 사다 제사 지낼라고 하는데, 한 때는 원청 눈이 많이 와서 가다가 못 가고 거그(기) 앉아서 울게 되얐단 말입니다.
그때 무장 원님이 행차하시다가 개가비 장터, 바로 그 자리에다가 장터를 하나 세워 줬는데 그 장터가 상당히 컸더랍니다.
그 양반이 그렇게 하고 집에 왔는데 꿩이 한 마리 집에 들어왔더래요. 그래서 효성이 지극하다고 해서 효자각을 지었어요. 그쪽으로 원님도 가실라면 하마를 했더라는 얘기인데,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면 하늘에서 도와준다는 얘기입니다.
⊙ [무장면] 개가리 장터 이야기
조선조에 무장고을과 법성창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개를 낀 창촌이 있고 그 동남간에 당시에 크게 번성했던 개가장터가 있었다.
그때 이 고장의 출천지효로 이름나 있는 영모당 김질은 안동김씨이며 1496년에 공음면 개가리에서 출생한 분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과 조부모의 승중상 도합 12년간을 시묘살이를 한 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꿩고기를 몹시 좋아했기에 그는 매년 12월 제삿날에는 짚신을 삼아 그곳에서 8km나 되는 안자시장에 가서 짚신을 팔아 꿩을 사서 제물로 쓰곤 하였다.
어느해 눈이 많이 내려 시장이 서지 않아 제물을 구할 수가 없어서 크게 걱정하면서 그는 그의 불효로 인하여 하늘이 내린 벌로 알고 제삿날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린 그날 석양 무렵에 갑자기 꿩 한 마리가 부엌으로 날아들어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김질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꿩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를 모셨다. 그 다음 해에도 짚신을 등에 지고 눈길을 헤쳐 제물을 구하기 위하여 해리시장에 가는 도중 때마침 무장원님이 그곳을 행차하다가 김질의 모습을 보고 이 추운 날씨에 무엇 하러 가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원님은 김질의 효성이 지극함을 극찬하고는 그를 위하여 개가리에 장을 세워 평생동안 눈길에 저자를 보러 가는 고생을 덜게 되었다.
그 뒤로 퍽 성해 오던 개가리 장터는 한일합방 후 구한말의 의병활동을 위한 보급소와 연락처로 낙인이 찍혀 일본 사람들이 중앙지가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끝내 폐쇄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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