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일기 34---사천지방 여행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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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0-13 14:15 조회1,667회 댓글0건본문
10월 6일 (목) 사천여행 6일차
오늘은 성도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침 8시반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공항으로 향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수려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산자락 허리에서부터 정상까지 물안개인지 구름인지 걸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는 길에 들린 특산 기념품점, 전통 약재점, 특산 식료품점에는 인파가 가득했다. 특히 이곳 일대의 해발 3,000m 이상에서 방목되는 모우 소고기는 고가에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약재점에는 一字無學이나 이곳에서 17대째 가업으로 의술을 전해가는 얼굴에는 부티나고 건강미 가득한 중년 여인이 특히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 여인은 손톱을 짚어 보고 손바닥만 한두군데 만져보고는 진찰을 하고 있는데, 나도 불쑥 손을 내어 보았다. 통역자의 설명을 들어보니, 나는 수축형(?) 위염이 있어서 아무리 먹어도 영양 흡수가 안되어 살이 붙지 않고, 조금만 움직여도 항상 피곤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장이 안 좋아서 그런지 알았는데, 증상만은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약재값을 물어보니 너무 비싸서 물러섰다. 한국에 돌아가서 확인하고 치료해볼 일이다.
오후 1:40분 해발 3,800m의 구재황룡공항을 이륙해서 한시간 만에 사천평야지대 한복판 성도공항으로 내려가 도착했다. 이번 일정중에 세 번째로 성도에 들어온 것이다. 먼저 묵었던 호텔에 짐을 또 풀었다. 카운터 여직원이 눈웃음을 치며 반갑게 아는체를 했다.
내일 하얼빈으로 돌아갈 비행기표 시간이 나오지 않아서 이리저리 확인하다가 둘이서 성도시내 구경을 나갔다. 택시를 잡아타고 성도시 서남쪽에 있는 두보초당으로 향했다.
한해 모자란 60평생을 산 두보는 후반생을 전란과 혼란과 방랑으로 일관하다 이곳 성도에 5년 살다가, 양자강을 따라 이리저리 5년을 더 살다가 양자강 배 속에서 죽었다고 한다. 말년에 고생 고생 끝에 이곳 성도에 도착해 완화계 라는 개울가 근처의 절간 빈방에 몸을 푼 두보는 백리 밖에서 고을살이를 하는 친구와 성도에 사는 종질의 도움으로, 그 절간 이웃에 오두막, 곧 초당을 짓고 정착을 해서 1백80여 평 남짓의 개울가에 남새밭, 약초밭, 죽통으로 물을 끌어댄 연못에 꽃길까지 만든다. 두보는 성도에 있었을때 공부(工部), 요즈음 같으면 토목과의 서기쯤 되는 원외랑 관직을 가졌었다고 한다. 이렇게 5년 남짓 살다가 양자강 강상(江上) 방랑길을 떠난다. 가다 머물러 살고 다시 가길 5년동안 하다가 그 배 속에서 죽었다.
1백80여 평 남짓 했다는 두보 초당은 현재 6만평에 전각이 30여개나 들어차 있었다. 건물마다 고풍기가 가득하고 두보의 시문과 글씨가 가득가득했다. 특히 10여년전 당나라 시대의 건물터를 발굴하여 유지(遺址)와 정자 터 초석을 발굴해 놓고 건물을 씌워 박물관으로 조성해 놓았다. 충렬공 정자가 있었다는 회곡리 앞 상고산 정상 정자가 있었던 곳을 발굴해 보면 그 초석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유비와 제갈량을 모시고 있는 무후사(武侯祠)를 찾아갔다. 대문으로 들어가 유비를 모신 유비전 <한소열묘>에 들어가니 중앙에 유비의 상이 오른쪽에 손자 유심의 상이 놓여 있고, 아들 유선(초명 아두)의 상이 있어야 할 왼쪽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촉나라를 뒷받침하던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 대군이 처들어 오자 유비의 아들 유선은 관을 몸에 묶고 나아가 투항하여 생명을 구걸했고, 손자 유심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그 길로 유비묘를 찾아와 통곡을 한 다음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목을 스스로 날려 순국했다고 한다. 신라의 마의태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에 유비릉 <한소열황제릉>이 있었다. 벽돌담으로 둘러쌓인 180m 둘레에 높이 12m인 유비릉은 사람의 손이 가지 않아 나무도 덩굴도 제멋대로 자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유비전 <한소열묘> 바로 뒤에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가 있었다. 제갈巾을 쓰고 제갈扇을 든 온후한 표정의 제갈량이 오른쪽에 아들 제갈섬, 왼쪽에 손자 제갈상을 거느리고 앉아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서 유비전 못미쳐 왼쪽에는 <명비>라 하는 비각이, 오른쪽에는 <당비>라 하는 비각이 여럿 서 있는데, 이 <당비>는 삼절비라고도 한다. 초나라에 원수를 갚고 투신한 오자서, 춘추시대의 노국대부 추호, 그리고 촉한 때 무도진을 지키는 장수 마모의 아내의 절개를 기리는 비이다.
무후사를 나오니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무후사 담장을 끼고 이어진 옆길로 들어서니 옛날을 그대로 이어온 듯한 좁은 길에 옛 건물들, 그리고 휘황찬란한 붉은 등이 가득한 거리가 나타났다. <진리고가>였다. 서울의 인사동과 비슷한 거리였다. 골동품과 식당이 즐비한 거리로 장비 소고기도 썰어내는 모습도 보였다.
좌판 하나를 지나는데 성씨 소개하는 빨간색 팜프렛을 가득 진열하고 있는 곳이 있어서 다가가 金씨편을 구입했다.
김씨는 현재 중국의 제69 대성. 김씨 기원은 곡부(산동성)으로 祖宗은 金日石+單(김일제), 彭城郡(절강성 서주)에 鴻丈堂, 麗?堂 등이 있다는 소제목이 보이고, 김씨 기원을 설명하는 글에 少昊金天氏의 후예다. 소호는 원래 皇帝의 아들로 황제를 계승하여 재위 84년. 곡부(산동성)에 도읍을 세웠다. 惜金制度를 創建하였다는 내용도 보이고 있다. ‘惜金制度’가 혹시 삼국사기에 보이는 석탈해왕때 서라벌 계림 금궤에서 김알지가 탄강하였다는 신화로 표현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스쳐갔다. 기원전 200여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 때에 휴도왕과 그의 아들 김일제에게 김씨를 賜姓했다는 내용도 보였다. “新羅國王姓金”이 <구당서>에 보인다는 내용도 있었다.
우리 신라김씨와 구체적인 연관은 알수 없었으나, 만리장성을 쌓고 서안 병마용을 세우던 진시황 후 200여년후 신라 석씨 탈해왕때 한반도 서라벌 계림에서 신라김씨의 비조 김알지가 금궤에서 태어났다고 <삼국사기>에 신화로 적혀 있으니 중국의 김씨 기록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으나 더 이상의 자료는 알수 없었다.
김일제의 묘는 현재 섬서성 서안에 있는 한 무제의 능 옆에 있다고 하고, 중국여행 책자에 산동성 곡부에 있다는 少昊陵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소호는 4000년 전에 중국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중국의 전설적인 다섯 황제 중 하나이다. 그의 피라미드형 능(입장료 5원)은 곡부에서 북동쪽으로 4km 떨어져 있고 송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 능은 바닥이 25m 폭에 높이 6m인 커다란 돌 벽돌로 만들어졌고 꼭대기에 작은 사원이 하나 있다. 일부 중국 역사학자들은 곡부가 소호의 폐허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약하다. 오늘날 사원은 버려져 있지만 주변 경치는 고요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九線(9번)’ 이라고 씌여있는 미니버스를 타면 능에서 남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서 내려준다
식당 2층에 올라가 옛거리를 내려다보며 사천요리를 잔뜩 시켜놓고 먹었다. 입안에 매운 맛이 확 번지는 사천요리로 저녁을 먹고 돌아나와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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