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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 (6)우리 집과 내 어릴 적(4) - 과거 시험과 관상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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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0-13 15:11 조회1,78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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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과 내 어릴 적(4) - 과거 시험과 관상 공부

그 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밥 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행문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우명문표사단(右明文標事段)' 하는 땅 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右謹陳訴旨段)' 하는 솟장 쓰기, '維歲次敢昭告于(유세차감소고우)' 하는 축문 쓰기, '僕之第幾子未有伉儷(복지제기자미유항려)' 하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伏未審此時)' 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라 하시므로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하여서 무식촌 중에 문장이 되어서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하나는 하리라고 촉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글은 이제 겨우 속문 정도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뜻은 한 동네의 존위에는 있지 아니하였다. '통감(通鑑)', '사략(史略)'을 읽을 때에 '왕후 재상의 씨가 따로 있으랴(王侯將相寧有種乎)'하는 진승(陳勝)의 말이나, 칼을 빼어서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일이나,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나도 모르게 어깨에서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는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공부할 길이 하나 뚫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으로 10리쯤 되는 학골이라는 곳에 정문재(鄭文哉)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이는 문벌은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상놈이었으나 과문 - 과거하는 글 - 으로는 당시에 굴지되는 큰 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사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 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訓料) 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 망태기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대어 가는 일이 많았다.

제작 - 글짓기 - 으로 과문의 초보인 대고풍십팔구(大古風十八句)요, 학과로는 '한당시'와 '대학' '통감' 등이요, 습자에서 분판만을 썼다.

이때에 임진경과(壬辰慶科)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어느 날 정 선생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도 과거를 보기 위하여 명지 - 과거에 글 지어 바치는 종이 -를 쓰는 연습으로 장지 다섯 장을 구해 오셔서 나는 그 다섯 장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익혔다.

과거날이 가까워 오매 우리 부자는 돈이 없으므로 과거 중에 먹을 만큼 좁쌀을 지고 정 선생을 따라 해주로 갔다. 여관에 들 형편이 못되므로 전에 아버지께서 친해 두셨던 계방에 사처를 정하였다.

과거날이 왔다. 선화당 옆에 있는 관풍각(觀風閣)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 늘였다. 정각에 부문(赴門)을 한다는데 선비들이 접을 따라서 제 접 이름을 쓴 백포기를 장대 끝에 높이 들고 모여들었다. 산동접(山洞接), 석담접(石潭接) 이 모양이었다. 선비들은 검은 베로 만든 유건(儒巾)을 머리에 쓰고, 도포를 입고 접기를 따라 꾸역꾸역 밀려들어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앞장선 용사패들이 아우성을 하는 것도 볼 만하였다. 원래 과장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 - 과거에 급제를 시켜달라고 비는 것 - 라는 것이다. 둘러늘이 새끼 그물 구멍으로 모가지를 쑥 들이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생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참과 못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한 번 합격이 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 모양으로 혹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편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편 가련도 하였다.

내 글은 짓기는 정 선생이 하시고 쓰기만 내가 쓰기로 하였으나 내가 과거를 내 이름으로 아니 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지(名紙)를 드린다는 말에 감복하여서 접장 한 분이 내 명지를 써 주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글씨가 낫기 때문이었다. 제 글과 제 글씨로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차작(借作)으로라도 아버지가 급제를 하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차작으로 말하면 누구나 차작 아닌 것이 없었다. 세력 있고 재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글을 빌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글씨를 빌어서 과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편이었다. 글은 어찌 되었든지 서울 권문세가(權門勢家)의 청편지 한 장이나 시관의 수청 기생에게 주는 명주 한 필이 진사나 급제가 되기에는 글 잘하는 큰 선비의 글보다도 빨랐다. 물론 우리 글 따위는 통인의 집 식지(食紙)감이나 되었을 것이요, 시관의 눈에도 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진사 급제는 미리 정해놓고 과거는 나중 보는 것이었다.

이번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發闡)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해서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 되는 것이 상지상(上之上)일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고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성인군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님께 청하여 '마의상서(麻衣相書)'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 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 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격, 빈격, 흉격 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나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 중에 있는 다음의 구절이었다.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사람으로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서 마의상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래서 상서는 덮어 버리고 '지가서(地家書)'를 좀 보았으나 거기도 취미를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병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삼략(三略)' '육도(六韜)' 등을 읽어 보았다. 알지 못할 것도 많으나, 장수의 재목을 말한 곳에,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이 동치 말고, 사졸로 더불어 달고 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남을 범과 같이 하며, 남을 알고 저를 알면 백 번 싸워도지지 아니하리라(泰山覆於前 心不妄動 與士卒同甘苦 進退如虎 知彼知己 百戰不敗).'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 일곱 살, 나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서 훈장질을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읽고 1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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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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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연일 감사합니다. 백범일지 다시 잘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본 홈에 어떻게 활용할까 연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