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법일지(7)우리집과 내 어릴 적(5) - 동학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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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0-15 11:05 조회1,379회 댓글0건본문
우리집과 내 어릴 적(5) - 동학과의 만남
이때에 사방에는 여러 가지 괴질이 돌았다. 어디서는 진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달리는 화륜선(火輪船 - 汽船)을 못 가게 딱 붙여놓고 세금을 받고야 놓아주었다는 둥, 머지 아니하여 계룡산에 정도령이 도읍을 할 터이니 바른목에 가 있어야 새 나라의 양반이 된다 하여 세간을 팔아 가지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둥, 이러한 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吳應善)과 그 이웃 동네에 사는 최유현(崔琉鉉)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崔道明)이라는 동학(東學)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는 이 동학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남에게 들은 말대로 누린 것, 비린 것을 끊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야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내 행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 여덟 살 되던 정초였다.
갯골 오씨 집 문전에 다다르니 안으로부터 무슨 글을 읽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경전이나 시를 읽는 소리와는 달라서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았다. 공문(拱門)에 나아가 주인을 찾았더니 통천관(通天冠)을 쓴 말쑥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맞는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한즉, 그도 공손히 맞절을 하기로 나는 황공하여서 내 성명과 문벌을 말하고 내가 비록 성관(成冠)을 하였더라도 양반댁 서방님인 주인의 맞절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편발( 髮) 아이에게 이런 대우가 과도한 것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비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는 동학도인이라 선생의 훈계를 지켜 빈부 귀천에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니, 미안해 할 것 없다고 말하고 내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도를 들으러 온 뜻을 고하니 그는 쾌히 동학의 내력과 도리의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 도는 용담 최수운(龍潭 崔水雲) 선생께서 천명하신 것이나, 그 어른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님 최해월(崔海月) 선생이 대도주(大道主)가 되셔서 포교를 하신다는 것이며, 이 도의 종지(宗旨)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서 새 백성이 되어 가지고 장래에 진주 - 참 임금 -를 뫼시어 계룡산에 새 나라를 새우는 것이라는 것 등을 말하였다.
나는 한 번 들으매, 심히 환희심이 발하였다. 내 상호가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맹세한 나에겐는 하느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일뿐더러 상놈 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진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나도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입도 절차를 물은 즉 쌀 한 말,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가지고 오면 입도식을 행하여 준다고 하였다. '동경대전(東經大典)' '팔편가사(八編歌詞)' '궁을가(弓乙歌)' 등 동학의 서적을 열람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여쭙고 입도할 의사를 품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서 내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 - 전도 - 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 지 불과 수월에 연비(連臂) - 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 - 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내게 대한 무근지설(無根之說)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대가 동학을 하여 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는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언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창수(金昌洙) - 창암이라던 아이명을 버리고 이때부터 이 이름을 썼다 - 는 한 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섞어 전하여서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 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남북도에까지 현자하여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이나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나를 애기 접주라고 별명지었다. 접주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이듬해엔 계사년(癸巳年) 가을에 해월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 단자 - 명부 -를 보고하라는 경통(敬通 ; 공함이라는 뜻)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道儒) 열 다섯 명을 뽑을 때에 나도 하나로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 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목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報恩郡) 장안(長安)이라는 해월 선생 계신 곳에 다다랐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하는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해월 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사람으로 꽉꽉 찼었다. 우리는 접대인에게 우리 일행 15명의 명단을 부탁하여 대도주께 우리가 온 것을 통하였더니, 한 시간이나 지나서 황해도에서 온 도인을 부르신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 일행 열 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수고로이 왔다고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 - 신비한 재주- 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年紀)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는데, 약간 검은 터럭이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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