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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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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5-10-22 10:16 조회1,476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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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임진왜란때 함경도 회령(會寧)에 국경인(鞠景仁) 국세필등의 숙질(叔嫉)이 강성하고 재물이 많아 고을에서 토호(土豪)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반역을 하여 피난와 있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묶어 왜장에게 넘기고 항복하니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크게 기뻐하며 판형(判刑 왜놈의 벼슬)을 주어 북도 회령(會寧)과 경성(鏡城)를 통제하게 하였다. 이때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경성 유생 지달원(池達源)과 의병을 모집하여 경인.세필 숙질을 비롯,일본측에 붙은 육진(六鎭)의 반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했다. 그러자 민심이 결집되고 의병수가 불어나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섬멸하였다. 북관대첩에 관한 내용은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 선조님의 부계기문(涪溪記聞) 연려실기술에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난중의 북관 사정과 대첩사실을 적은 이 북관대첩비를 일본이 굳이 약탈해간 것은 문화재로서보다 역사적 치욕을 은폐하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 대첩비를 전쟁 망혼들의 집합소인 야스쿠니 신사에다 버려둔 저의는 당시 북관에서 죽은 왜 병사들의 한을 달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 버려진 대첩비의 환국(還國)은 뒤늦은감이 있지만 매우 다행한일이다.
훗날 본래 서 있던 대첩의 땅 길주에 돌아가 제자리를 찾아 세우고 정평사와 의병의 초혼제를 거행하여 민족혼의 자긍을 심어야 하지 않을까..!

1926년 동아일보 기사를 옮겨 보았습니다.
北關大捷碑
李生
日本 東京에 靖國神社라 하는 神社가 有하니 此는 國家戰死將卒의 招魂祭를 每年 春秋로 擧行하는 處이다. 其 內部에는 朝鮮 古代의 甲胄軍旗槍銃 大砲等과 淸露獨 戰爭時에 獲得한 戰時機械를 多數로 陳列하여 一般에게 觀覽 식힌다. 筆者도 求景次로 입거한즉 其 後面 庭園에 高가 五尺 廣이 二尺 厚가 五寸 假量되는 嚴莊한 碑石이 立하엿슴으로 其 碑石正面에 立하야본즉 額號를 北關大捷碑라 하엿기에 驚愕千萬에 其 碑文을 仔細히 보려하다가 憲兵에게 禁止를 當하야 不得己 中止하엿다. (此碑石도 一般에게 觀覽을 許하나 지금 공사중임으로 禁止하는듯) 其碑石 左側에 木牌를 立하엿는대 其意가 大略 左와 如하다. “北關大捷碑 此碑는 咸鏡道 明川郡 臨溟津에 在함. 朝鮮과 戰爭時에 李鵬等이 勤王의 兵을 起하야 戰爭한 事實을 記載하엿는데 此碑文에는 大捷이라 하엿지마는 其時의 事實과는 全然相違가 되니 世人은 此碑文을 信치 말라”하였다. 然하지마는 우리 朝鮮人은 古來로 敗하고서 勝하엿다고 立碑自讚하난 陋習이 업는 것이 事實인 以上에 此碑文의 堂堂한 精神을 우리가 充分히 推測할것이다. 然한데 如何한 曲折로 引하야 此碑石이 此處에 移轉되엿는지는 不知하나 古物의 前例로 推測하여보면 勿論 個人的으로나 團體的으로 陰取하여온것이 事實일 것이다.
如何間 우리는 우리의 史蹟이 記載된 碑石이 臨溟津에 있다가 異域一隅에 安置를 當하고 잇는것만 깁히 記憶하여두자.
동아일보 1926년 9월16일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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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오늘은 참 맑은 하늘과 함께하는 하루 입니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세월은 빠르게만 느껴지니 어쪄면 좋을까요 ㅎㅎㅎ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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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잃어버렸던 우리의 자존심과 역사가 되살아 오는 기쁨입니다.
1926년, 일제시대에 일본에 있는 우리의 북관대첩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분과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가 있었음을 새로 알았습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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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0월 28일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식에 북관대첩비도 공개된다고 합니다.
박물관에 전시 된 전시품을 대충 돌아보는 시간이 1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더군요.
각 문중에서 보관중인 보물들도 위탁 전시한다 하니 관심이 더합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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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반가운 소식 감사합니다.

김태우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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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태영씨의 글로 인해 다시한번 역사를 뒤돌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