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댁, 고모댁(5)충렬공의 사위 조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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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0-27 11:52 조회1,455회 댓글2건본문
충렬공의 큰 사위는 횡성조씨 조변입니다.
아버지는 평장사 조계순, 할아버지는 평장사 조충이며 증조부는 문하시중을 지낸 조영인입니다.
조변(趙抃)1
?∼1288(충렬왕 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문하시중 충(冲)의 손자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계순(季珣)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장인인 김방경(金方慶)의 세력에 힘입어 원종 때 낭장 겸 감찰사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행수(行首)로서 입직(入直)할 때 밤이 늦어 대궐문이 닫혀 못 들어가자 원종이 문틈으로 들어오라고 명하였으나 이는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하여 그 곧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궐직문제(闕直問題)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271년(원종 12)김방경이 진도의 삼별초를 토벌할 때 장군으로 기용되고, 1274년 여원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대장군으로 천호(千戶)가 되어 김방경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281년(충렬왕 7)제2차일본정벌 때 원제(元帝)로부터 소신교위관군총파(昭信校尉管軍摠把)에 임명되고, 1284년 대장군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우부승지를 거쳐 1287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그뒤 병으로 면직이 되자 왕은 그의 사위 유서(庾瑞)를 낭장으로 임명하여 위로하기도 하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전고(典故)에 정통하였으며, 성품이 관후하여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들 조문간
조문간(趙文簡)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횡천(橫川:횡성). 자는 경지(敬之). 시중 충(冲)의 증손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계순(季珣)의 손자이며, 변(抃)의 아들이다. 문근(文瑾)의 형이며, 김방경(金方慶)의 외손자이다.
1303년(충렬왕 29)간신 오잠(吳潛)을 처벌하도록 홍자번(洪子藩) 등과 함께 원사(元使)에게 보고하였다.
1305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밀직부사에 이르렀다. 예도(禮度)에 숙련하여 칭송을 받았으나 당시 부원세력(附元勢力)으로 권세를 부린 겁령구(怯怜口:元公主의 私屬人)출신인 차신(車信)의 사위가 되어 비난을 받았다.
아버지 조계순
조계순(趙季珣)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횡천(橫川:橫城). 시중(侍中) 영인(永仁)의 손자로, 충(冲)의 아들이다. 숙창(叔昌)은 형이며, 변(抃)은 아들이다.
1250년(고종 37) 좌승선(左承宣)에 있었는데 당시 무인집정자인 최항(崔沆)에게 딸을 출가시켰다.
이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오른 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광정(光正)이다
할아버지 조충
조충(趙冲)
1171(명종 1)∼1220(고종 7).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천(橫川). 자는 담약(湛若). 시중(侍中) 영인(永仁)의 아들이다. 음서(蔭敍)로 벼슬에 올라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명종 때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
1209년(희종 5)에 국자좨주(國子祭酒), 1211년에는 대사성 한림학사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고 동북면병마사·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1216년(고종 3)에는 문무를 겸비하였다 하여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樞密副使翰林學士承旨)로서 상장군을 겸임하였다.
이해에 거란군이 북방에 침입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이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었는데 이 휘하의 부원수로서 경도인(京都人)가운데 종군가능자와 승군(僧軍)을 모아 출정하였다.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방보(鄭邦輔)로 원수가 교체된 뒤 염주(鹽州)에서 적병을 물리쳤으나, 안주 태조탄(太祖灘)까지 추격하였다가 패배하여 파직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여진족의 황기자군(黃旗子軍)이 압록강을 건너 인주(麟州)·용주(龍州)·정주(靜州) 등지의 경계내에 침입하자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이를 대파하고, 그 공으로 파면 이전의 관작으로 복직되었다.
1218년에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어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거란족의 침입이 날로 심하고 관군이 유약하여 복속시키지 못하자, 다시 서북면원수가 되어 김취려(金就礪)·정통보(鄭通寶) 등을 인솔하고 출정, 거란군을 대파하니 이에 거란군이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웅거하게 되었다.
이듬해 몽고·동진(東眞)군과 연합하여 강동성을 공격, 거란군의 항복을 받고 몽고군 원수인 합진(哈眞)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뒤 개선하여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判禮部事)에 오르고, 곧이어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下侍郎平章事修國史)가 더하여졌다.
그가 죽자 3일간 조회를 철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이 추증되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증조부 조영인
조영인(趙永仁)
1133(인종 11)∼1202(신종 5). 고려의 문신. 본관은 횡성(橫城). 상서 시언(時彦)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재상의 기량이 있었고, 박학하여 글을 잘하였다. 의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전주서기(全州書記)가 되어 정사에 명성이 있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태자(太子)의 보도(輔導)를 맡았고, 1174년(명종 4)에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으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승선이 되어서는 잘못을 바로잡은 일이 많아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185년에 우승선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원(試員)이 되어 시·부(詩賦)로 최문목(崔文牧) 등, 십운시(拾韻詩)로 정광우(丁光祐) 등과 명경(明經)5인을 뽑았다.
1190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정당문학(政堂文學)·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92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뽑아 손희작(孫希綽) 등 29인을 급제시켰다.
1194년에 수태위상주국(守太尉上柱國)이 되었으며, 1196년에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가 되었다.
이듬해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고, 뒤이어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평장사 감수국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郎平章事監修國史)가 되었다.
1198년(신종 1)에 금나라 사신이 와서 전왕(前王:명종)이 양위한 사유를 묻고 직접 만나보려 하는 것을 “전왕은 남주(南州)에서 요양중이나 노정이 30일 걸리는 거리로 만나보려면 2∼3개월이나 머물러야 된다.”라고 하여 금나라 사신을 되돌려보내서 최충헌(崔忠獻)의 왕의 폐립으로 야기된 금나라와의 외교문제를 무난히 해결하였다.
1204년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횡성의 세덕사(世德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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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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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연일 자료 정리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조변, 잘 공부했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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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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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흥미로운 주제 감사합니다.
<고려열조 등과록>에 광종 9년 처음 실시된 과거 급제자로 '최섬(崔暹)'과 '조욱(趙郁) 史作 翌'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고려사나 증보문헌비고 등에는 광종 9년 제1회 과거 급제자는 2명이며, 장원은 최섬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晋光仁 묘지명'에 따르면 "공의 선조는 대방(帶方)으로부터 나왔는데, 비조(鼻祖) 진긍(晉兢)은 향공진사(鄕貢進士)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광종(光宗)대인 현덕(顯德) 5년(광종 9, 958 )의 과거[春官]에 갑제(甲第)로 뽑혔는데, 벼슬이 광문원소감(光文院少監)에 이르렀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조익이 광종 9년 급제자로 알려진 것은 '고려열조 등과록'에 잘못 기록됨으로써 이후에 사실 고증 없이 답습 때문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