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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 연보자료 04(18-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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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0-27 18:40 조회1,422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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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1358년 공민왕7

○조부 김영후의 4촌형 김승택, 중서 평장사로 치사하고 죽었다. 양간(良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김묘(昴)는 상락군(上洛君)이었다.<고려사 김방경 열전>

---김방경---1김선---3김승택---1김묘---1김제민, 2김제안, 3김구덕

---김방경---3김순---4김영후---1김천---1김사겸, 2김사렴, 3김사안, 4김사형

*김승택(金承澤) : ?∼1358(공민왕 7).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大菴, 할아버지는 상락후(上洛侯) 방경(方慶)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선(愃)이다.

<척약재학음집 先君?若齋世係行事要略, 김명리(金明理) 1400년>

祖諱承澤。直亮同德佐理功臣,三重大匡都僉議政丞,判典理司事,上護軍致仕。贈諡良簡公。


○형 김사렴(24세), 1358년(공민왕7)에 비서감(秘書監)을 지냈다. 당시 처조부 안목은 정당문학예문관대제학을, 처부 안원숭은 군부판서 진현관으로 있었다. <1358 이색 찬 (장인 안원숭의 외조모인) 김태현처왕씨 묘지명> *김태현+왕씨→ 김태현 여 + 안목→ 안원숭→ 안원숭 여 + 김사렴


<시대상황>

○정운경(鄭云敬), 1358년 지형부사(知刑部事),

 


(19세) 1359년 공민왕8

○민사평 별세. 제민 형제(김제민, 김제안)가 상례를 주관하며 례를 극진히 하여,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남록(南麓)에 장사지냈다. 묘지명은 이달충 찬, 이색이 만사를 지음. 이때 형 김사안(22세쯤)은 감문위참군사(監門衛參軍事), 8촌형 김제민(22세)은 덕령부주부(德寧府注簿), 8촌 김제안(?20세)은 직한림원(直翰林院)이었다. <1359년 이달충 찬, 김사안의 처외조부 민사평 묘지명>

김방경→ 1김선→ 3김승택→ 1김묘+민사평 외동딸→ 김묘 1녀 

김방경→ 3김순→ 4김영후→ 1김천→ 3김사안+김묘 1녀 


*김제안(金齊顔) : ?∼1368(공민왕17). 고려의 문신. 자는 중현(仲賢). 충렬공(휘 方慶)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상락군(上洛君) 묘(昴). 외조부 민사평이 손자 2인(김제민, 김제안)을 사랑하여 가르쳤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이존오(李存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시대상황>

○최영(崔瑩), 1359년 홍건적 4만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생양(生陽)·철화(鐵和)·서경·함종(咸從)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정운경(鄭云敬), 다시 이듬해 형부상서에 초수(超授)되었다.



(20세) 1360년 공민왕9

<시대상황>

○최영(崔瑩), 이듬해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가 되었다가 다시 이듬해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


○정몽주(鄭夢周),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정도전(鄭道傳), 1360년(공민왕 9)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존오(李存吾), 1360년(공민왕 9)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이존오(李存吾) :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



(21세) 1361년 공민왕10

○조부 김영후(70세), 1361년(공민왕10 신축) 5월 임술일에 나이 70세로 별세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고려사>  

배위 청주한씨(父한보, 祖한강, 曾祖한광윤) 2남(김천, 김장)을 낳았는데, 후에 상당군부인에 봉해졌다.

 

○(민사평처 김씨) ---기해년(1359년)에 급암공이 돌아가고 겨우 3년 상을 마치자 신축년(1361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영남으로 갔다가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민사평처김씨 묘지명, 1370년 이색 찬>


○(김묘처 민씨)---신축년 겨울에 도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갈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이 편안하였다. 그 뒤에 여흥(驪興)에 살면서 십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김묘처민씨 묘지명, 1379년 이색 찬>


상주지(상주시.군문화공보실, 1989)

○ 金九容(김구용) 初名(초명)은 齊閔(제민), 方慶(방경)의 後孫(후손)이다. ---척若齋(척약재)는 永嘉(영가)가 本貫(본관)인데 본 州(주)의 沙谷(사곡)과 佳里坊(가리방)에 그의 遺墟(유허) 가 있다고 傳(전)해 오니 永嘉(영가)에서 이곳으로 移居(이거)한 것인지, 아니면 尙州(상주)가 예전에 安東府(안동부)로 있을 때 永嘉(영가)가 邑號(읍호)였는지, 또는 그가 安東(안동)에서 係出(계출)하였으므로 本貫(본관)으로 따라 부른 것인지 未詳(미상)하다.


상주지명총람 (2004, 조희열 편, 문창사)

척약재 김구용(1338-1384)이 상주의 佳里坊(가리방)에 은거한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 佳里坊은 당시 靑里縣에 속한 西北 북록 일대로 현재는 佳庄里(가장리) 일대라 짐작된다.<奇呈太子山日寧>, <贈李敏道> 시에서도 역시 商山에 우거했음을 알 수 있다. 1375년 권신들과 마찰로 죽주로 귀양 가서 방면되던 해인 1381년 사이에 상주에 우거한 것은 아닌가 싶다. <상주 한문학, 2002, 권태을, 문창사>


<시대상황>

○이제현(李齊賢),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정치가로서의 이제현은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최영(崔瑩), 1361년에 홍건적 10만이 다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색(李穡),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이성계,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 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 (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으며, 같은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정월 친병(親兵:私兵)2, 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 제일 먼저 입성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22세) 1362년 공민왕11

△김사형, 처음에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되고 누천(累遷)하여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었다.


△김사형, 박정(朴挺)의 딸 죽산박씨(후에 마한국대부인에 봉해짐)와 결혼하였다. 박정은 삼사좌사 죽산군에 이르렀다.

죽산박씨와의 사이에 2남(육, 승)을 낳았는데, 장남 육(陸)은 中樞府使에 이르렀으나 무후하고, 둘째아들 승(陞, 1366-1436)은 密直司使에 이르렀다.


△8촌 김구덕(金九德),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김구덕(金九德) : ?1343∼142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로 척약재 김구용(金九容)의 동생이다. 1401년(태종11)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었고, 1427년(세종9)에는 손녀(金五文의 딸)가 왕세자(문종)의 휘빈으로 봉해졌다.


<시대상황>

○최영(崔瑩), 이듬해 안우·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으며, 그 공으로 훈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뒤이어 양광도진변사(楊廣道鎭邊使)를 겸하였다가 도순문사(都巡問使)를 겸하였고,


○이성계,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대파,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정몽주(鄭夢周), 1362년 예문관의 검열·수찬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모해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청하여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정도전(鄭道傳),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익원공년보가 아니라  충렬공현손 전부의 연보를 보고 있네요.
어려운 작업 땀깨나 흘리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충렬공 이후의 친가, 처가, 외가를 총 망라한 종합 연보요 계보입니다.
이 많은 자료들의 구슬을 꿰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