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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 연보자료 08(35-3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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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1-06 12:46 조회1,520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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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1375년 우왕1

○8촌 김구용(38세), 1375년(우왕1) 삼사좌윤(三司左尹)이 되었다.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이 북원(北元)이 보낸 사절을 맞으려 하자 이숭인·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 당시 친명파와 함께 도당(都堂)에 상서하여 이를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죽주(竹州)가 경기도 안성의 죽산인지? 다른 곳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1)김구용이 경북 예천에 있는 청원정 정자의 편액을 書하였다고 하고, 2)<척약재학음집>에 경북 북부를 두루 유람한 시가 많이 실려 있으며, 3)1600년대 예천에 물계서원을 세우면서 김구용을 배향하였고, 4)예천 옆 영주(옛 순흥)에도 죽계 등의 지명이 있고, 5)여흥 천령(금사) 침류정을 읊은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 라는 구절을 보면 예천 인근(죽주)에서 3년 정도 지내다(유배) 여흥(금사)로 옮겨(이배) 4년 정도 지내다 1381년 해배된 것으로도 추정해 볼수 있다.


뒤에 모향(母鄕)인 여흥(驪興)으로 옮겨 7년간 한거하였는데 이때 여강어우(驪江魚友)라 자호하고 강호에 노닐면서 거처하는 곳을 육우당(六友堂)이라 이름하고 ---六友堂은 천령현, 현재의 금사면에 있었는데, 외가가 있던 곳이다--- 시와 술로 날을 보냈다. 이색이 <육우당기>를, 정추(=정공권)가 <육우당부>를 지었다.


蘇川書院과 淸遠亭 (경북 예천)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가야리에는 이곳 龍宮全씨의 중시조이신 菊波 全元發 선생을 모신 서원이 있다. 국파 전원발 선생은 고려말에 원나라에 들어가 괴과에 장원급제하여 원나라 벼슬이 영록대부 병부상서 집현전태학사에 이르렀던 분으로 ---

전원발 선생과 척약재 김구용 선조와는 각별한 사이었으며, 더욱이 우리 안동김문의 장손은 方慶-小宣- 資- 爲- 得男- 精으로 이어오다 金精공은 척약재의 아우인 金齊顔공과 더불어 신돈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김정공의 후손은 수안김씨로 , 김제안공의 후손은 사천김씨로 분적하였다. 바로 안동김문의 장손인 김정공의 배위가 국파 전원발선생의 따님이었다.

*1342년 세운 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는 이숙기(1329년 김승용 묘지명 술)가 찬하고, 전원발이 써서 세운 것이다. 이 비문 내용중에 1327년 상주목사를 지내고 있는 김영후 기록이 들어 있다.

소천서원은 낙동강의 상류인 성화천이 휘돌아나가는 경치 좋은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아름답기로는 청원정이라는 정자가 으뜸이다. 청원정 정자는 임란시 소실되고, 그 후 복원하였는데, 정자의 편액은 원래 척약재 김구용 선조께서 쓰신 것이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려 하였으나 원본을 잃어버렸고, 또 척약재 유묵이 가야리 창벽위에 새겨저 있었으나 떨어저 나가 강가운데로 묻히어 버렸으므로 도저히 고증할길이 없었다. ---


침류정(沈流亭) (경기 여주)

침류정(沈流亭) : 천령(川寧) 금사리(金沙里)에 있다. ---이색(李穡)의 기(記)에, "염동정<廉東亭, 이름은 흥방(興邦), ?∼1388>이 귀양살이 할 때, 천녕현(川寧縣)에 옮기어 물에 걸쳐 정자를 짓고, 그 위에서 노닐며 쉬었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이암(伊庵)의 유적이 있으니 침류정 위에서 책을 베고 조노라.“ 하였다. ---▣ 제2권 p83-p85<여주목 고적(古蹟)>


*염흥방(廉興邦) : ?∼1388(우왕 14). 고려의 간신. 본관은 서원(瑞原). 자는 중창(仲昌), 호는 동정(東亭). 아버지는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제신(悌臣)이다.

---1375년(우왕1)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려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한때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염흥방은 김사형의 큰형 김사겸의 손아래 동서임.


육우당기(六友堂記) ---목은 이색

永嘉(영가) 金敬之(김경지)가 그 당을 이름하여 四友(4우)라 하였으니 대체로 康節先生(강절선생) 邵雍(등옹; 송대의 철학자) 雪月風花(설월풍화)를 취한 것이다.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하기 청하나, 그것을 배우기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겨를이 없어 응하지 못함이 오래되었다. 그가 驪興(여흥)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 외가에 있는데 강산의 아름다움이 나를 조석으로 위로하는 것이 홀로 雪月風花만이 아닌 까닭으로 여기에 강산을 더하여 六友(육우)라 하였으니, 선생은 가르침을 주시요〉하였다. ---


육우당부(六友堂賦) ---鄭樞(정추)

저 여강 지역을 바라보니

새로운 堂(당)이 장려하네

---

저 까마득한 아래의 두려움이여,

높아도 위태롭지 않아 편안한 집일세.

---

아름답다, 上洛(상락)의 元孫(원손)이여,

일찍이 '周易(주역)'에 연구가 있었네.

---


○8촌 김구용의 2자 김명리(15세), 1375년 15세에 이승상과 같이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김명리(金明理) : 1361-1438. 김구용의 둘째아들. 1369년 나이 9세에 음보로 총릉직에 출사하였다. 



<시대상황>

○최영(崔瑩), 1375년(우왕 1)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이색(李穡), 1375년(우왕1) 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정도전(鄭道傳), 1375년(우왕 1)에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하여 북원(北元)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정공권(鄭公權), 우왕 즉위 후 좌대언·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는데,


○박상충(朴尙衷),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해 간관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전녹생(田祿生)·정몽주·김구용·이숭인·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이숭인(李崇仁), 공민왕때, 예의산랑(禮儀散郎)·예문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내고,

우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郎)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성균사성이 되고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전임하여 동료와 함께 소를 올려 국가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조준(趙浚), 1374년(우왕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고,



(36세) 1376년 우왕2

<시대상황>

○최영(崔瑩), 이듬해 왜구가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여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늙은 몸으로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鴻山:지금의 扶餘郡)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이 되었다.


○정몽주(鄭夢周),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정공권(鄭公權), 1376년(우왕 2) 태(胎)를 예안현(禮安縣)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라의 일이 권신의 손에 좌우되는 것을 한탄하다가 1382년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원재집 圓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준(趙浚),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으로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겸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뽑혔는데, 정치를 잘하여 이민(吏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어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권근(權近),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37세) 1377년 우왕3

○김사형, 신우(辛禑) 3년에 집의(執義)가 되어 조준(趙浚), 안익(安翊), 김주(金湊), 최숭겸(崔崇謙) 등과 더불어 함께 대간(臺諫)에 있으니 때에 사람을 얻었다고 칭하였다.


○형 김사렴(43세), 1377년에 朝議郞(종5품) 佐司諫 知制誥를 지냈다.<1377 고려 진사방목> 


<시대상황>

○최영(崔瑩), 1377년 도통사가 되어 강화·통진(通津)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는데, 이때 왕에게 말하여 교동·강화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군자(軍資)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무렵 왜구가 침입하여 개성을 위협하므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군사로서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이색(李穡),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정도전(鄭道傳),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향인(鄕人)재상이 서재를 철거하여 부평으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하여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이성계, 그뒤 동북면원수지 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하였으며,

 


(38세) 1378년 우왕4 

<시대상황>

○최영(崔瑩), 1378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지금의 豊德)에 침입하자, 이성계·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익원공  연보 연재 내용, 잘 보고 있습니다.

김태영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영
작성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년보 잘 보고있습니다. 전원발선생이 김정 선조님의 장인이라는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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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죽주가 현재 죽산이 아닐런지 모른다는 가정은 이해합니다만

척약재 시에
遠遊南國已三年 移패金沙自禮川 賴有伊庵遺跡在 枕流亭上枕書眠
이 시는 염흥방의 침류정에서 지은 시로서 염흥방도 1375년 귀양을 갔었으므로
혹시 예천으로 귀양갔다 침류정이 있는 금사로 옮겨오지 않았나 추정도 해 봅니다.

침류정은 원래 이암 권하의 소유였는데 이암이 후손이 없어 염흥방의 외할아버지인
권한공의 소유가 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척약재집에 [이암 권하선생은 공(염흥방)의 외족인데 후손이 없엇다 그래서 공(염흥방)이 그 별장을 얻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