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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筆蹟-현대02 (白凡 金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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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07 18:58 조회1,7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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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筆蹟-현대02 (白凡 金九)







▣ 백범김구의 겨레사랑전 -나의 소원은 통일-



전시 : 1995년 11월 1일부터 11월 28일

주최 : 문화일보,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KBS

후원 : 교육부, 문화체육부, 공보처, 보훈처, 서울특별시

협찬 : 현대, 한라







⊙ 遺墨 揮毫에 스며든 白凡의 內面세계

-도진순 : 창원대교수, 한국사



백범이 쓴 휘호에는 그의 삶이 남긴

격정의 자국과 사상적 번민이 진하게 스며 있다.

특히 만년의 것이 많이 남아 있어 휘호는 마지막

세계를 엿보는데 가히 필수적이다.









1. 백범의 휘호와 글씨체 <기 소개>





2. 반일독립운동가 : 남이의 기개와 이순신의 다짐으로



백범의 본격적인 반일항일운동은 1919년 중국에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여하면서 부터이다.



특히 1931년 백범은 무력해진 임정을 활성화하기 위해 젊은 투사들을 중심으로 韓人愛國團을 결성하였다. 그 결과 1932년 1월 이봉창의사의 의거, 4월 윤봉길의사의 상해 쾌거가 있었던 것이다.



두 의거로 백범은 일약 유명해지고, 임시정부는 중국의 지원하에 활로를 개척하였다. 이듬해 백범은 장개석과 면담하고 국민당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휘호는 바로 두 의사의 의거 직후인 1933년의 것이다. 그것은 한인애국단의 [愛國]과 남이장군의 시 [北征]이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 백두산의 돌, 칼로 달아 아하고



豆滿江流飮馬無 (두만강류음마무)

--- 두만강의 물, 말이 마셔 없애네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 남아 이십세, 나라 평정 못한다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 후세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



즉 백범은 청년장수 남이가 여진족을 정벌하던 기개와 패기로 두 젊은 의사(=이봉창, 윤봉길)를 기리고, 다시 젊은 청년들의 활동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두 의사의 의거만으로 완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의사의 의거로 백범은 체포의 위험 속에서 가명으로 피신생활을 하였으며, 임시정부는 또한 유랑생활을 하였고, 더욱이 중극 지원금의 처리문제와 唯一黨運動으로 내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1936년 회갑을 맞이한 백범은 이순신의 [陣中吟]으로 심경을 토로하였다.



誓海魚龍動 (서해어룡동)

--- 바다에 다짐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더라



이 구절은 이순신이 그의 큰 칼에 새겼던 유명한 劍銘으로, 현실의 평가를 넘어서 역사는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웅장하게 다짐한 것이다.







제주도의 척박한 유배지에서 추사 김정희가 그렇듯이, 후세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 시를 낭송했다. 백범은 만리타국에서 회갑을 맞이하여, 이순신과 같은 믿음으로 임정 고수를 다짐하는 것이다.







*(사진) 진해 백범 친필 비석

1947년 광복2주년을 맞아 진해 해군통제부를 방문한 백범은 이순신의 [진중음]을 휘호로 남겨 비석으로 세웠다. 이후 이승만의 김구 말살정책으로 훼손당하기도 하였으나 4.19이후 닷 바로 세웠다.





*(사진) 남이장군의 시 [北征]

1933년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 직후에 이 휘호를 즐겨 썼으며, 해방후 신탁통치를 거론하던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던 1947년에 다시 그가 좋아하는 남이장군의 시를 휘호로 많이 남겼다.









다음에는 3. 해방직후의 반탁운동기 : 우익의 단결과 분열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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