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5(포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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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4-08 15:06 조회1,826회 댓글0건본문
포천군지(포천군지편찬위원회, 1984)
pp 854. (2) 포천팔경(구 영평팔경)
--포천군은 임진강 상류 한탄강과 영평천을 끼고 있어 도처에 絶景絶勝(절경절
승)의 명승지가 있다. 山紫水明(산자수명)한 溪流(계류)가 있는가 하면 江水(강수)
에 浮沈(부침)하는 기암괴석의 돌섬이 있고, 面鏡(면경) 그대로의 호수도 있어 예
부터 文人(문인). 墨客(묵객)의 발차취가 아니간데가 없다. 고래로부터 일컬어온
영평팔경의 勝景(승경)을 들어 보면 禾積淵(화적연), 金水亭(금수정), 蒼玉屛(창옥
병), 臥龍岩(와룡암), 樂歸亭址(락귀정지), 白鷺洲(백로주), 靑鶴洞(청학동), 仙遊潭
(선유담) 등이 있었으며, 이를 두고 부른 영평팔경가가 전하여 지고 있다.
〔영평팔경의 노래〕
禾積에서 벼를 털어(禾積淵)
金水로 술을 빚어(金水亭)
蒼玉屛에 넣어 들고(蒼玉屛)
臥龍을 빗겨 타고(臥龍岩)
樂歸亭을 돌아 드니(樂歸亭址)
白鷺는 橫江하고(白鷺洲)
靑鶴은 날아드니(靑鶴洞)
仙遊潭이 예아니냐(仙遊潭)
pp 855. ②金水亭(금수정)
--창수면 오가리에 1608년경 牛頭亭(우두정)이라는 亭子(정자)가 있었다. 野史(아
사)에 의하면 김모라는 사람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경치가 하도 좋아서 작은 정
자를 세우고 우두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즐겼다 한다.
--그후 그는 자기의 사위인 강원도 삼척군수 양사언(號 蓬萊, 봉래)에게 이 정자
를 물려 주었는데 봉래는 이 정자 이름을 고쳐 금수정이라 하고 扁額(편액)도 갈
아 붙였다고 한다.
--정자 앞에는 창건을 기념하여 심었다는 珍松(진송)이 남아 있다. 약 400년의
수령으로 그 가지가 極致(극치)의 妙(묘)를 나타내고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淸流
(청류)가 흐르고 있다.
--이 청류 속에는 岩(준암)이라는 寄岩(기암)이 있다. 여기에 술을 부어 청류에
띄워 선유를 했다 한다.
--이 준암 하류에는 蓮花岩(연화암), 洞天石門(동천석문) 등의 奇勝地(기승지)가
있어 탐승객이 끊이질 않았다 한다.
--최근까지 남아있던 정자는 약 100년전 순 은행나무로만 지었다고 한다. 이 정
자는 울창한 숲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정자 앞으로 흐르는 청류에 낚시를 담그
는 취미도 좋거니와 垈地一帶(대지일대)가 한 개의 連岩(연암)으로 되어 있어 이
에 부딪치는 물소리도 그윽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고 정자는 없어졌다.
【옮긴이 주 : 우두정을 세운이는 문온공(九容)의 子 부사공(明理)이고, 연대는 조
--선 세종조입니다. 양사언과 함께 금수정이라 개칭한 이는 金胤福(김윤복)이고,
--金 (김확)이 개수 하였습니다. 금수정은 안동김씨 소유로서 6.25동란 때 소실
--되어 장초석만 남아있다가 1989년 포천군비 3천여만원을 들여 복원하였고,
--1990년 다시 5백만원을 들여 난간 및 진입로 등을 정비하였습니다. 금수정 역
--내에는 양간공(승택), 상락군(묘), 문온공(구용)의 단소가 있습니다.】
pp 925∼927 (18) 金 墓(김질묘) 雙谷(쌍곡)
--세종 4년(1422)에 출생했다. 문종 즉위년(1451)에 생원이 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사간원에 우정언으로 拔擢(발탁)되었다.
--단종 원년(1453)에는 兵曹佐郞(병조좌랑)에 올랐는데 그 해 겨울에 김질이 높
은 벼슬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吏曹判書(이조판서) 鄭昌孫(정창손)의 女 (여서)
이기 때문이라고 사간원에서 시비가 일어났다.
--단종 3년(1455)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내쫓는 불상사가 일어나
자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兪應孚(유응부), 河緯之(하위지), 李塏(이개),
柳誠源(류성원) 등은 김질을 포함한 端宗復位運動者(단종복위운동자)들로서 명나
라 사신 초대연에서 유응부가 別雲劍(별운검)이 되어 세조를 살해하고자 획책하
였으나 공교롭게도 당일 운검을 폐지하여 후일로 미루는 바람에 세조 살해모의가
좌절되었다.
--이 때 김질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이 사실을 장인 정창손에게 알리었다. 김
질의 심정은 밀고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나 이 말을 들은 정창손은 그 길로
대궐에 들어가 세조에게 밀고했다.
-세조는 그 자리에서 모의한 자 들을 체포 하옥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단종의 死
六臣事件(사육신사건)이다.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河緯之(하위지), 兪應
孚(유응부), 李塏(이개), 柳誠源(류성원) 등은 비참하게 죽어간 반면에 김질과 정
창손은 큰 공로를 세워 立身揚名(입신양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세조 원년(1456)에 김질은 成均館司藝(성균관사예) 벼슬에 올랐고, 세조 2년
(1457)에 우찬성 정창손은 進(진) 一級(일급)하고 성균관사예 김질은 진 3급했다.
그리고 이개, 하위지, 성삼문, 박팽년 등은 結黨謀逆(결당모역)한 죄로 응당 陵遲
處死(능지처사)를 해야 한다고 의금부에서 주장하므로 세조가 이에 좇았다. 또한
母(모), 女(여), 妻(처), 妾(첩), 祖(조), 孫(손), 兄弟(형제) 姉妹(자매)와 아들의 妻
妾(처첩)까지도 변읍으로 보내 영구히 노비가 되도록 하라고 명했다.
--세조가 친히 유응부를 鞠問(국문)할 때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였느냐" 하고
물으니 그는 서슴치 않고 "나는 잔치날에 칼로 足下(족하)를 죽이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오르도록 하고자 했노라"하고 답변했다. 이에 세조가 大怒(대로)하여 무사
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 불젖가락으로 살을 지지게 했으나 이 때 유응부
는 얼굴 빛 하나 변치 않고 식은 불젖가락을 땅에 던지며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소리치며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세조 2년(1457) 7월에 佐翼3等功臣(좌익3등공신) 정창손은 陞(승) 2등하고, 判
軍器監事(판군기감사) 김질은 錄佐翼功臣(록좌익공신) 승 3등했다. 이 때 사육신
의 아내를 나누어 노비로 주었는데 유응부의 처 若非(약비)는 예빈시 尹權攀(윤
권반)에게 주었고, 하위지의 처 貴今(귀금)과 딸 木今(목금)이는 知兵曹事(지병조
사) 權 (권언)네 집으로 보냈다.
--세조 2년(1457) 10월에는 한명회가 承政院都承旨(승정원도승지)이고, 김질이 同
副承旨(동부승지)가 됐다. 다음해 정월에 정창손은 右議政(우의정)이 되고, 議政府
右贊成(의정부우찬성)에는 신숙주가 되었다. 세조 3년(1458) 8월에는 右副承旨(우
부승지)가 되고 세조 4년(1459) 9월에 김질의 喪妻(상처)함을 들은 조정에서는 米
豆(미두) 20石(석), 紙(지) 70卷(권), 棺槨(관곽), 不灰(부회), 油藥(유약) 등을 下賜
(하사)했다.
--세조 5년(1460) 4월에 승정원좌승지로 陞拜(승배)되었고, 같은 해 8월에 兵曹參
判(병조참판)에 上洛君(상락군)이 봉해 졌다. 세조 6년(1461)에 大將(대장)이 되었
으며 그 해 12월에 황해. 평안 양도에 都巡察使(도순찰사)로 나갔다.
--세조 7년(1462) 5월에는 平安道都(體?)察使(평안도도(체?)찰사)로 나갔고, 세조
9년(1464)에 工曹判書(공조판서)로 승진되었다. 세조 11년(1466)에 兵曹判書(병조
판서)가 되고, 다음해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軍籍使(군적사)가 되었다.
--세조 12년(1467)에 김질은 右參贊(우참찬)이 되었고, 구치관은 영의정에, 황수
신은 좌의정에 그리고 박원형은 우의정에 올랐다. 그해 12월에 崇政大夫(숭정대
부)에 오르고 의정부우참찬은 옮기지 않았다.
--세조 13년(1468) 4월에 좌참찬으로 승진되었고, 다음해 2월에 경상도 觀察使(관
찰사)로 부인했는데 母親(모친)이 保病(보병)했다는 급보가 날아와서 급히 돌아왔
다. 이 해에 세조가 昇遐(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니 이때 김질은 右議政(우의정)
으로 올랐다가 얼마 안되어 좌의정으로 陞轉(승전)되고 영의정에는 박원형이 앉
았다. 이후 다시 평안도 都體察使(도체찰사)로 나갔다.
--성종 3년(1472) 11월에 大匡輔國崇祿大夫(대광보국숭록대부) 上洛府院君(상락부
원군)에 봉해 졌다. 다음해 領事(영사), 성종 5년(1474) 8월에 秦聞使(진문사)로
가게 되었다. 9월에는 연경에 도착하였으며, 성종 6년(1475) 정월에 진문사 金禎
(김정)과 副使(부사) 이도손이 돌아왔다.〈註 : 김정은 김질의 오기로 추정 됨〉7
월에 정창손은 領相(영상)에 올랐다.
--성종 9년(1478) 2월에 김질이 病卒(병졸)하니 향년 57세이다. 묘는 포천군 내촌
면 암현리 쌍곡에 있다.
--김질은 안동김씨 중에 구안동에 속하는데 조선 태종 때 좌의정(좌정승?)을지
낸 洛圃(낙포) 金士衡(김사형 1333∼1407)의 증손이다. 김질의 아우 金 (김무)는
중종 때 공조판서를 지내고 淸白吏(청백리)에 錄選(녹선)되었다.
--중종 때 영의정인 晩保堂(만보당) 金壽龍(김수룡 : 金壽童 김수동의 오기임)은
김질의 조카이다. 그도 연산군 말년에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성품이 원만하고
人和(인화)가 좋아 연산군 폭정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특히 中宗反正(중종반정)
소식을 成希顔(성희안)에게 듣고 가담하여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한편 선조 때 임진왜란의 수습을 위한 朝鮮(조선), 明(명), 日(일) 세 나라 사이
의 외교적 절충을 성공시킨 막후 인물 金瓚(김찬)은 김질의 현손이다.
--舊安東勢(구안동세)는 인조조를 고비로 급격히 퇴조하였다. 그 고비를 이룬이
가 인조 때의 영의정을 지낸 유명한 洛西(낙서) 金自點(김자점)인데 바로 김질의
5대손이다. 그는 牛溪文人(우계문인)으로 광해군 말에 병조좌랑에 이르러 당시 집
권당인 대북파에 의해 밀려났다가 仁祖反正(인조반정 1623)에 가담하여 靖社功臣
(정사공신)이 된다. 반정에 성공한 서인이 집권당이 되면서 반정에 직접 참가하여
공을 세운 일파와 반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다른 일파 사이에 틈이 벌어져 전자
는 功西(공서), 후자는 淸西(청서)로 분파하게 된다. 그도 공서 쪽이 되어 신안동
에 淸陰(청음) 金尙憲(김상헌) 등 儒林勢力(유림세력)을 배경으로 한 청서측과 대
립했다.
--인조 말엽에 공서는 다시 김자점을 領袖(영수)로 하는 洛黨(낙당)과 원두표를
영수로 하는 原黨(원당)으로 갈라졌는데 이 무렵 그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
의정이 되어 왕실의 外戚(외척, 그의 손자 金井龍(김정용)이 인조의 딸인 孝明翁
主(효명옹주)와 결혼)으로서 실권을 잡고 세력을 크게 떨쳤었다.
pp 930∼931 (26) 金水亭記(금수정기)
금수정은 영평팔경의 하나로서 구읍지와 인접해 있었고 읍지는 영평천에 둘러싸
여 있어서 마치 서울 한강을 방불케 했다. 영평읍과 영평천 그리고 금수정이 서
로 조화를 이루어 이곳은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그래서 많은 시인. 묵객들
이 이곳을 찿았으며 이곳에서 즐겼다. 심지어 노년에 이곳을 찿아 여생을 보낸
재상도 있었는가 하면, 楊蓬萊(양봉래) 같은 시인은 이곳을 떠날 줄을 몰랐다.
--금수정 주변은 영평천의 물이 맑고 아름다운 것 뿐만이 아니라 주위를 감싸고
있는 산세가 더욱 아름다웠다. 그 물줄기가 있는 곳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아름
다운 산천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영평은 유명했고
그래서 역사는 꽃피었던 것이다.
--漢陰(한음) 李德馨(이덕형)이 소년시절에 포천에 와서 한학을 공부할 때 양봉
래는 소년 한음을 금수정으로 초대했다. 방년 14세의 어린 소년 이덕형은 양봉래
가 一律(일률)을 선창하매 이에 화답하여 이르되
"野 暮光薄(야활모광박)이요 水明山景多(수명산경다)라 綠陰白煙起(녹음백연기)
하니 芳草兩三家(방초양삼가)라" 하였다. 이 시를 들은 양봉래는 大驚(대경)하여
"그대는 나의 적수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선생이로구나"하고 감탄 했다는 이야기
가 아직도 漢陰年報(한음년보) 첫머리에 남아 있다.
한음 이덕형의 역사는 바로 이 금수정에서 출발하였고 또한 포천군 신북면 신평
리 龍淵書院(용연서원)에서 막을 내렸다고 한다면 이덕형과 금수정은 빼놓을 수
없는 깊은 연고지라 하겠다.
--시인 양봉래는 금수정 아래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 위에 마치 헤엄치는 백조처
럼 떠있는 바위 한 복판에 휘둘러 한 首(수)의 시를 그 옆에 조각해 두었으니 양
봉래가 얼마나 금수정을 사랑했는가를 미루어 알고도 남음이 있다.
--세기의 명재상 思岩(사암) 朴淳(박순) 공은 아예 금수정 아래 蒼玉屛(창옥병)으
로 낙향을 해서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는데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서원과 분묘가
모두 이 부근에 있고 보면 이도 또한 성인이라야 성지를 알아본다는 일면을 살필
수 있다고 하겠다.
--금수정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이는 산수만이 아니라 그 이상에 더욱 아름다
움이 있으니 이는 삼복 더위에 선풍기가 없어도 스스로 찿아오는 시원한 바람에
여름의 폭서를 망각하게 하는 것이요, 무진장으로 줄지어 노니는 川魚떼들이 오
고가는 행인들의 입맛을 돋우는 것도 이곳의 명물이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풍경에 속세를 떠난 선인들이 모여 앉았으니 시흥이 도도했고, 이에
없어서는 아니될 술과 안주가 이곳의 별미로 등장하니 男兒大丈夫(남아대장부)가
아니 즐거울소냐. 더욱이 밤은 깊어 대보름 둥근달이 중천에 높이 솟아 하나는
물에 떠있고, 하나는 술잔에 떠있어 세 개의 달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금수정이 아니고는 다시 보기 어렵다.
--포천의 역사적 大人(대인)들은 누구나 금수정을 찿았고, 금수정을 찿은 大人(대
인)들은 거의 시를 남겼다. 문집을 찿아보면 금수정을 읊은 시가 몇 首(수) 쯤은
누구에게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영평도 가고 영평천도 가고 금수정도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시
인도 가고 대인들의 발자취도 전설로만 메아리칠 뿐이다.(「雲潭自記 운담자기」)
※ 혹 본 포천군지 내용중 사실과 다르거나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누락된
----선조분들의 기록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김주회 - 작년 11월에 다녀온 금수정과 문정공 쌍곡 김질 관련기록 잘 보았습니다.
▣ 정중 -
▣ 김영환 -
▣ 김영환 - 고맙습니다.
▣ 김태서 - 문정공 할아버지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연일 전국 군지 여행기를 올려 주시어 잘 보고 있습니다. 여행이 끝나는 날 기념 축하연을 준비하겠습니다.
▣ 김은회 -
▣ 김영윤 -
pp 854. (2) 포천팔경(구 영평팔경)
--포천군은 임진강 상류 한탄강과 영평천을 끼고 있어 도처에 絶景絶勝(절경절
승)의 명승지가 있다. 山紫水明(산자수명)한 溪流(계류)가 있는가 하면 江水(강수)
에 浮沈(부침)하는 기암괴석의 돌섬이 있고, 面鏡(면경) 그대로의 호수도 있어 예
부터 文人(문인). 墨客(묵객)의 발차취가 아니간데가 없다. 고래로부터 일컬어온
영평팔경의 勝景(승경)을 들어 보면 禾積淵(화적연), 金水亭(금수정), 蒼玉屛(창옥
병), 臥龍岩(와룡암), 樂歸亭址(락귀정지), 白鷺洲(백로주), 靑鶴洞(청학동), 仙遊潭
(선유담) 등이 있었으며, 이를 두고 부른 영평팔경가가 전하여 지고 있다.
〔영평팔경의 노래〕
禾積에서 벼를 털어(禾積淵)
金水로 술을 빚어(金水亭)
蒼玉屛에 넣어 들고(蒼玉屛)
臥龍을 빗겨 타고(臥龍岩)
樂歸亭을 돌아 드니(樂歸亭址)
白鷺는 橫江하고(白鷺洲)
靑鶴은 날아드니(靑鶴洞)
仙遊潭이 예아니냐(仙遊潭)
pp 855. ②金水亭(금수정)
--창수면 오가리에 1608년경 牛頭亭(우두정)이라는 亭子(정자)가 있었다. 野史(아
사)에 의하면 김모라는 사람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경치가 하도 좋아서 작은 정
자를 세우고 우두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즐겼다 한다.
--그후 그는 자기의 사위인 강원도 삼척군수 양사언(號 蓬萊, 봉래)에게 이 정자
를 물려 주었는데 봉래는 이 정자 이름을 고쳐 금수정이라 하고 扁額(편액)도 갈
아 붙였다고 한다.
--정자 앞에는 창건을 기념하여 심었다는 珍松(진송)이 남아 있다. 약 400년의
수령으로 그 가지가 極致(극치)의 妙(묘)를 나타내고 있으며, 정자 아래에는 淸流
(청류)가 흐르고 있다.
--이 청류 속에는 岩(준암)이라는 寄岩(기암)이 있다. 여기에 술을 부어 청류에
띄워 선유를 했다 한다.
--이 준암 하류에는 蓮花岩(연화암), 洞天石門(동천석문) 등의 奇勝地(기승지)가
있어 탐승객이 끊이질 않았다 한다.
--최근까지 남아있던 정자는 약 100년전 순 은행나무로만 지었다고 한다. 이 정
자는 울창한 숲 속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정자 앞으로 흐르는 청류에 낚시를 담그
는 취미도 좋거니와 垈地一帶(대지일대)가 한 개의 連岩(연암)으로 되어 있어 이
에 부딪치는 물소리도 그윽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터만 남고 정자는 없어졌다.
【옮긴이 주 : 우두정을 세운이는 문온공(九容)의 子 부사공(明理)이고, 연대는 조
--선 세종조입니다. 양사언과 함께 금수정이라 개칭한 이는 金胤福(김윤복)이고,
--金 (김확)이 개수 하였습니다. 금수정은 안동김씨 소유로서 6.25동란 때 소실
--되어 장초석만 남아있다가 1989년 포천군비 3천여만원을 들여 복원하였고,
--1990년 다시 5백만원을 들여 난간 및 진입로 등을 정비하였습니다. 금수정 역
--내에는 양간공(승택), 상락군(묘), 문온공(구용)의 단소가 있습니다.】
pp 925∼927 (18) 金 墓(김질묘) 雙谷(쌍곡)
--세종 4년(1422)에 출생했다. 문종 즉위년(1451)에 생원이 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사간원에 우정언으로 拔擢(발탁)되었다.
--단종 원년(1453)에는 兵曹佐郞(병조좌랑)에 올랐는데 그 해 겨울에 김질이 높
은 벼슬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吏曹判書(이조판서) 鄭昌孫(정창손)의 女 (여서)
이기 때문이라고 사간원에서 시비가 일어났다.
--단종 3년(1455)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내쫓는 불상사가 일어나
자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兪應孚(유응부), 河緯之(하위지), 李塏(이개),
柳誠源(류성원) 등은 김질을 포함한 端宗復位運動者(단종복위운동자)들로서 명나
라 사신 초대연에서 유응부가 別雲劍(별운검)이 되어 세조를 살해하고자 획책하
였으나 공교롭게도 당일 운검을 폐지하여 후일로 미루는 바람에 세조 살해모의가
좌절되었다.
--이 때 김질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이 사실을 장인 정창손에게 알리었다. 김
질의 심정은 밀고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나 이 말을 들은 정창손은 그 길로
대궐에 들어가 세조에게 밀고했다.
-세조는 그 자리에서 모의한 자 들을 체포 하옥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단종의 死
六臣事件(사육신사건)이다.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河緯之(하위지), 兪應
孚(유응부), 李塏(이개), 柳誠源(류성원) 등은 비참하게 죽어간 반면에 김질과 정
창손은 큰 공로를 세워 立身揚名(입신양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세조 원년(1456)에 김질은 成均館司藝(성균관사예) 벼슬에 올랐고, 세조 2년
(1457)에 우찬성 정창손은 進(진) 一級(일급)하고 성균관사예 김질은 진 3급했다.
그리고 이개, 하위지, 성삼문, 박팽년 등은 結黨謀逆(결당모역)한 죄로 응당 陵遲
處死(능지처사)를 해야 한다고 의금부에서 주장하므로 세조가 이에 좇았다. 또한
母(모), 女(여), 妻(처), 妾(첩), 祖(조), 孫(손), 兄弟(형제) 姉妹(자매)와 아들의 妻
妾(처첩)까지도 변읍으로 보내 영구히 노비가 되도록 하라고 명했다.
--세조가 친히 유응부를 鞠問(국문)할 때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였느냐" 하고
물으니 그는 서슴치 않고 "나는 잔치날에 칼로 足下(족하)를 죽이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오르도록 하고자 했노라"하고 답변했다. 이에 세조가 大怒(대로)하여 무사
로 하여금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 불젖가락으로 살을 지지게 했으나 이 때 유응부
는 얼굴 빛 하나 변치 않고 식은 불젖가락을 땅에 던지며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소리치며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세조 2년(1457) 7월에 佐翼3等功臣(좌익3등공신) 정창손은 陞(승) 2등하고, 判
軍器監事(판군기감사) 김질은 錄佐翼功臣(록좌익공신) 승 3등했다. 이 때 사육신
의 아내를 나누어 노비로 주었는데 유응부의 처 若非(약비)는 예빈시 尹權攀(윤
권반)에게 주었고, 하위지의 처 貴今(귀금)과 딸 木今(목금)이는 知兵曹事(지병조
사) 權 (권언)네 집으로 보냈다.
--세조 2년(1457) 10월에는 한명회가 承政院都承旨(승정원도승지)이고, 김질이 同
副承旨(동부승지)가 됐다. 다음해 정월에 정창손은 右議政(우의정)이 되고, 議政府
右贊成(의정부우찬성)에는 신숙주가 되었다. 세조 3년(1458) 8월에는 右副承旨(우
부승지)가 되고 세조 4년(1459) 9월에 김질의 喪妻(상처)함을 들은 조정에서는 米
豆(미두) 20石(석), 紙(지) 70卷(권), 棺槨(관곽), 不灰(부회), 油藥(유약) 등을 下賜
(하사)했다.
--세조 5년(1460) 4월에 승정원좌승지로 陞拜(승배)되었고, 같은 해 8월에 兵曹參
判(병조참판)에 上洛君(상락군)이 봉해 졌다. 세조 6년(1461)에 大將(대장)이 되었
으며 그 해 12월에 황해. 평안 양도에 都巡察使(도순찰사)로 나갔다.
--세조 7년(1462) 5월에는 平安道都(體?)察使(평안도도(체?)찰사)로 나갔고, 세조
9년(1464)에 工曹判書(공조판서)로 승진되었다. 세조 11년(1466)에 兵曹判書(병조
판서)가 되고, 다음해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軍籍使(군적사)가 되었다.
--세조 12년(1467)에 김질은 右參贊(우참찬)이 되었고, 구치관은 영의정에, 황수
신은 좌의정에 그리고 박원형은 우의정에 올랐다. 그해 12월에 崇政大夫(숭정대
부)에 오르고 의정부우참찬은 옮기지 않았다.
--세조 13년(1468) 4월에 좌참찬으로 승진되었고, 다음해 2월에 경상도 觀察使(관
찰사)로 부인했는데 母親(모친)이 保病(보병)했다는 급보가 날아와서 급히 돌아왔
다. 이 해에 세조가 昇遐(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하니 이때 김질은 右議政(우의정)
으로 올랐다가 얼마 안되어 좌의정으로 陞轉(승전)되고 영의정에는 박원형이 앉
았다. 이후 다시 평안도 都體察使(도체찰사)로 나갔다.
--성종 3년(1472) 11월에 大匡輔國崇祿大夫(대광보국숭록대부) 上洛府院君(상락부
원군)에 봉해 졌다. 다음해 領事(영사), 성종 5년(1474) 8월에 秦聞使(진문사)로
가게 되었다. 9월에는 연경에 도착하였으며, 성종 6년(1475) 정월에 진문사 金禎
(김정)과 副使(부사) 이도손이 돌아왔다.〈註 : 김정은 김질의 오기로 추정 됨〉7
월에 정창손은 領相(영상)에 올랐다.
--성종 9년(1478) 2월에 김질이 病卒(병졸)하니 향년 57세이다. 묘는 포천군 내촌
면 암현리 쌍곡에 있다.
--김질은 안동김씨 중에 구안동에 속하는데 조선 태종 때 좌의정(좌정승?)을지
낸 洛圃(낙포) 金士衡(김사형 1333∼1407)의 증손이다. 김질의 아우 金 (김무)는
중종 때 공조판서를 지내고 淸白吏(청백리)에 錄選(녹선)되었다.
--중종 때 영의정인 晩保堂(만보당) 金壽龍(김수룡 : 金壽童 김수동의 오기임)은
김질의 조카이다. 그도 연산군 말년에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성품이 원만하고
人和(인화)가 좋아 연산군 폭정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특히 中宗反正(중종반정)
소식을 成希顔(성희안)에게 듣고 가담하여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한편 선조 때 임진왜란의 수습을 위한 朝鮮(조선), 明(명), 日(일) 세 나라 사이
의 외교적 절충을 성공시킨 막후 인물 金瓚(김찬)은 김질의 현손이다.
--舊安東勢(구안동세)는 인조조를 고비로 급격히 퇴조하였다. 그 고비를 이룬이
가 인조 때의 영의정을 지낸 유명한 洛西(낙서) 金自點(김자점)인데 바로 김질의
5대손이다. 그는 牛溪文人(우계문인)으로 광해군 말에 병조좌랑에 이르러 당시 집
권당인 대북파에 의해 밀려났다가 仁祖反正(인조반정 1623)에 가담하여 靖社功臣
(정사공신)이 된다. 반정에 성공한 서인이 집권당이 되면서 반정에 직접 참가하여
공을 세운 일파와 반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다른 일파 사이에 틈이 벌어져 전자
는 功西(공서), 후자는 淸西(청서)로 분파하게 된다. 그도 공서 쪽이 되어 신안동
에 淸陰(청음) 金尙憲(김상헌) 등 儒林勢力(유림세력)을 배경으로 한 청서측과 대
립했다.
--인조 말엽에 공서는 다시 김자점을 領袖(영수)로 하는 洛黨(낙당)과 원두표를
영수로 하는 原黨(원당)으로 갈라졌는데 이 무렵 그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
의정이 되어 왕실의 外戚(외척, 그의 손자 金井龍(김정용)이 인조의 딸인 孝明翁
主(효명옹주)와 결혼)으로서 실권을 잡고 세력을 크게 떨쳤었다.
pp 930∼931 (26) 金水亭記(금수정기)
금수정은 영평팔경의 하나로서 구읍지와 인접해 있었고 읍지는 영평천에 둘러싸
여 있어서 마치 서울 한강을 방불케 했다. 영평읍과 영평천 그리고 금수정이 서
로 조화를 이루어 이곳은 마치 한폭의 그림과 같았다. 그래서 많은 시인. 묵객들
이 이곳을 찿았으며 이곳에서 즐겼다. 심지어 노년에 이곳을 찿아 여생을 보낸
재상도 있었는가 하면, 楊蓬萊(양봉래) 같은 시인은 이곳을 떠날 줄을 몰랐다.
--금수정 주변은 영평천의 물이 맑고 아름다운 것 뿐만이 아니라 주위를 감싸고
있는 산세가 더욱 아름다웠다. 그 물줄기가 있는 곳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아름
다운 산천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영평은 유명했고
그래서 역사는 꽃피었던 것이다.
--漢陰(한음) 李德馨(이덕형)이 소년시절에 포천에 와서 한학을 공부할 때 양봉
래는 소년 한음을 금수정으로 초대했다. 방년 14세의 어린 소년 이덕형은 양봉래
가 一律(일률)을 선창하매 이에 화답하여 이르되
"野 暮光薄(야활모광박)이요 水明山景多(수명산경다)라 綠陰白煙起(녹음백연기)
하니 芳草兩三家(방초양삼가)라" 하였다. 이 시를 들은 양봉래는 大驚(대경)하여
"그대는 나의 적수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선생이로구나"하고 감탄 했다는 이야기
가 아직도 漢陰年報(한음년보) 첫머리에 남아 있다.
한음 이덕형의 역사는 바로 이 금수정에서 출발하였고 또한 포천군 신북면 신평
리 龍淵書院(용연서원)에서 막을 내렸다고 한다면 이덕형과 금수정은 빼놓을 수
없는 깊은 연고지라 하겠다.
--시인 양봉래는 금수정 아래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 위에 마치 헤엄치는 백조처
럼 떠있는 바위 한 복판에 휘둘러 한 首(수)의 시를 그 옆에 조각해 두었으니 양
봉래가 얼마나 금수정을 사랑했는가를 미루어 알고도 남음이 있다.
--세기의 명재상 思岩(사암) 朴淳(박순) 공은 아예 금수정 아래 蒼玉屛(창옥병)으
로 낙향을 해서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는데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서원과 분묘가
모두 이 부근에 있고 보면 이도 또한 성인이라야 성지를 알아본다는 일면을 살필
수 있다고 하겠다.
--금수정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이는 산수만이 아니라 그 이상에 더욱 아름다
움이 있으니 이는 삼복 더위에 선풍기가 없어도 스스로 찿아오는 시원한 바람에
여름의 폭서를 망각하게 하는 것이요, 무진장으로 줄지어 노니는 川魚떼들이 오
고가는 행인들의 입맛을 돋우는 것도 이곳의 명물이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풍경에 속세를 떠난 선인들이 모여 앉았으니 시흥이 도도했고, 이에
없어서는 아니될 술과 안주가 이곳의 별미로 등장하니 男兒大丈夫(남아대장부)가
아니 즐거울소냐. 더욱이 밤은 깊어 대보름 둥근달이 중천에 높이 솟아 하나는
물에 떠있고, 하나는 술잔에 떠있어 세 개의 달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금수정이 아니고는 다시 보기 어렵다.
--포천의 역사적 大人(대인)들은 누구나 금수정을 찿았고, 금수정을 찿은 大人(대
인)들은 거의 시를 남겼다. 문집을 찿아보면 금수정을 읊은 시가 몇 首(수) 쯤은
누구에게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영평도 가고 영평천도 가고 금수정도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시
인도 가고 대인들의 발자취도 전설로만 메아리칠 뿐이다.(「雲潭自記 운담자기」)
※ 혹 본 포천군지 내용중 사실과 다르거나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누락된
----선조분들의 기록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김주회 - 작년 11월에 다녀온 금수정과 문정공 쌍곡 김질 관련기록 잘 보았습니다.
▣ 정중 -
▣ 김영환 -
▣ 김영환 - 고맙습니다.
▣ 김태서 - 문정공 할아버지 자료 잘 보았습니다.
▣ 김항용 - 연일 전국 군지 여행기를 올려 주시어 잘 보고 있습니다. 여행이 끝나는 날 기념 축하연을 준비하겠습니다.
▣ 김은회 -
▣ 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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