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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백과사전에 나타나있는 충렬공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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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5-11-12 05:38 조회1,6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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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方慶

1212(강종 1)~1300(충렬왕 26).

고려후기의 무장.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했고, 원의 일본정벌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초기활동

본관은 안동. 자는 본연(本然).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효인(孝印)의 아들이다. 1229년(고종 16) 음서(陰敍)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가 되었다.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1248년에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다. 이때 몽고의 침략으로 무인정권이 강화도로 서울을 옮기면서 북계(北界)의 백성들에게도 황해의 여러 섬으로 옮겨 살게 하자,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 했다. 그뒤 고려와 몽고 간에 화의가 성립되고 원종이 즉위하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263년(원종 4)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한때 모함을 받아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으나, 서북 여러 성에서 몽고 침입 때 서북면병마판관으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진정이 들어와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그뒤 조정에 들어와 형부상서(刑部尙書)·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1269년 원에 사신으로 있을 때, 김준(金俊) 대신 실권을 장악한 임연(林衍)이 정변을 일으켜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c74af.gif)을 왕으로 세웠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려를 다시 정벌, 철저한 간섭을 시도하고자 한 원의 황제 쿠빌라이의 명으로 원의 장수 맹격도(孟格圖)와 함께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연을 치려 동경(東京)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원의 사신 흑적(黑的)의 권고와 이장용(李藏用)의 수습으로 원종이 복위된 것을 알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삼별초항쟁의 진압

1270년 원종은 개경환도를 결정하고 대몽항쟁의 주력이었던 삼별초(三別抄) 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배중손(裵仲孫) 등은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珍島)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했다. 이듬해 김방경은 몽고의 장군 흔도(炘都)·홍다구(洪茶丘) 등과 출전하여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 공으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다. 김통정(金通精) 등이 삼별초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 성곽을 쌓고 항거하자,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의 군대와 함께 다시 삼별초를 공격하여 이를 완전히 진압했다. 이 공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황금허리띠를 받는 등 환대를 받았고 돌아올 때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받았다.

원의 일본공격 참가

1274년(충렬왕 즉위) 원나라가 합포(合浦:지금의 경남 마산)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고 일본을 쳐들어갈 때, 8,000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여몽(麗蒙)연합군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정했다. 쓰시마 섬[對馬島]을 친 다음 일본 본토로 향했으나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77년 위득유(韋得儒)·노진의(盧進義)·김복대(金福大) 등 홍다구 일파로부터 국왕과 원의 공주 및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제거하고 강도(江都)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에 다루가치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구금되어 홍다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뒤 대청도(大靑島)로 귀양갔다가 다시 원에 이송되었다. 그러나 홍다구의 소환을 계기로 충렬왕이 원의 세조에게 적극 무죄를 호소,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뒤 수상인 중찬(中贊)이 되었다. 1281년 원이 다시 일본을 쳐들어갈 때, 고려군의 도독사(都督師)가 되어 일본의 하카다[博多]에 이르렀으나 태풍을 만난데다가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왔다. 일본 공격에 실패한 후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1283년에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亂定遠功臣)의 호를 받았다.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첨의령(僉議令)을 더하여 상락군개국공 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충선왕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金武鎭 글

출처 : 다음백과사전 ( http://en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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