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10(42-4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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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1-13 18:46 조회1,865회 댓글2건본문
(42세) 1382년 우왕8
○8촌 김구용(45세), 1382년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형 김사렴의 4자 김제( ?세쯤), 8촌 김구용의 장남 金明善(24세쯤)이 동방급제하였다.<1382 고려 문과방목>
*김제 : 생몰년 미상, 안렴사공(김사렴)과 죽계부인 순흥안씨와의 사이에서 6남(간,인비,위,제,약,식) 1녀(마희원에 출가)중 4남으로 태어났다. 배위 성산군부인 성주이씨(父이원구)와의 사이에 2녀(이사혜, 이훈에 출가)를 두었다.
1377년(북원선광7 정사, 명홍무10, 우왕3) 3월 성균학생 김제가 진사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도절제에 이르렀다. 당시 父는 朝議郞(=정5품) 佐司諫 知制誥 士廉이었다.
1382년(대명홍무15 임술, 북원천윤4, 우왕8) 5월 안동 김제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도절제사에 승임되고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안동 金明善이 동방급제하였다. 벼슬이 서령에 이르렀다. <고문서집성23-거창초계정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시대상황>
○이성계,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하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출진,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安邊策)을 건의하였다.
○정몽주(鄭夢周),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봉사하였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하여 요동(遼東)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조준(趙浚), 1382년 병마도통사 최영(崔글)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를 징벌하고 병마사를 참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43세) 1383년 우왕9
<시대상황>
○정도전(鄭道傳), 1383년에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찾아 함주 막사에 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조준(趙浚), 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뒤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이어 도검찰사(都檢察使)로서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평하여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오른 뒤, 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고, 윤소종(尹紹宗)·허금(許錦)·조인옥(趙仁沃)·유원정(柳爰廷)·정지(鄭地)·백군녕(白君寧) 등과 교우를 맺으면서 우왕의 폐위와 왕씨의 부흥을 꾀하였다.
○이방원(태종),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元天錫)을 사사하였다.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44세) 1384년 우왕10
○8촌 김구용(47세), 1384년(우왕10) 고려와 명나라와의 국교(國交)가 난관에 부딪치자, 4월 1일에 전교시판사의 신분으로 행례사(行禮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가던 중 명나라 조정에서 고려의 세공마가 기일내에 도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동(遼東)에서 명나라 서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고, 명나라 태조의 명으로 운남 대리위(大理衛)로 유배가던 중 사천 노주 영녕현(瀘州 永寧縣) 강문참 객사에서 병사하였다.
○김구용의 종질(7촌) 김휴가 시를 써서 보냈다.
---김선-김승용-김구-김성목-김휴
---김선-김승택-김묘-김구용
呈從叔척若齋島配時韻 / 종숙 척약재 유배때 보낸시 (김휴 35세)
大理島中叔是非 / 대리도에 계신 숙주(叔主)의 시비(是非) 때문에
浮雲山下姪冠衣 / 부운산 밑에 있는 종질(從姪)은 의관(衣冠)이 잦습니다.
島山千里相思夜 / 도산천리(島山千里) 떨어져서 서로 사모(思慕)하는 밤에
自獨無言不掩扉 / 스스로 홀로 말없이 사립문을 못닫나이다.
*김휴(金休) : 전서공 성목(成牧)과 정부인 한양조씨와의 사이에 1350년(고려충정2) 출생하여 1430년 81세로 몰하였다. 자는 鍊父(연부), 호는 학당(學堂).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생(門下生)이다. 어려서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하였고, 고려 공민왕때 檢校近侍(검교근시)라는 벼슬자리에 올라 왕을 시종하였다.
○김구용은 사장(詞章)을 잘하여 특히 시로 유명하였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하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다.
전장(典章)을 널리 구해 모아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고 이름지었고, 또 고금의 시문(時文) 몇 권을 모아 『선수집(選粹集)』이라고 했다. 유고 문집 『척약재 학음집(小易若齋 學吟集)』이 전하고 있다.
○김구용의 2자 김명리(24세), 1384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픈 상중에도 생원과에 황현 등과 함께 제4등으로 급제하여 낭장에 제수되었다.
*배위 이씨(이달충의 딸, 이달충, 1370년 민사평처 김씨 묘지명 찬)와의 사이에 3남 4녀를 낳았다. 이어 중랑장에 승진하였고, 사헌부감찰, 호조좌랑, 사헌부지평, 호조정랑을 한 뒤 (?1400년)진양대도호부 판관을 거쳐 옥주군사에 나갔다.
<시대상황>
○최영(崔瑩), 1384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이성계, 1384년 동북면 도원수 문하찬성사(東北面 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대파하였다.
○정몽주(鄭夢周),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을 증액하며,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하는 등 국교관계가 몹시 악화되었기 때문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렸으나, 정몽주는 사명을 다하여 긴장상태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정도전(鄭道傳), 1384년에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45세) 1385년 우왕11
<시대상황>
○정몽주(鄭夢周),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하여 결국 그 뜻을 관철하였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으며, 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되돌아와,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정도전(鄭道傳), 다음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46세) 1386년 우왕12
<시대상황>
(47세) 1387년 우왕13
<시대상황>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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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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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년 위의 종숙에게 보내는 애틋한시 이렇게 년대별로 정리해놓으니 김구용47세 김휴35세 12년 차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연일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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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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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연보공부 덕분에 잘합니다.
이제 볼날이 점점 가까워 오는군요.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