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11(48세, 1388년 위화도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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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1-14 13:13 조회1,572회 댓글5건본문
(48세) 1388년 우왕14 (창왕원년)
△김사형, 누천(累遷)하여 개성윤(開城尹)이 되매 단성보리공신호(端誠輔理功臣號)를 사(賜)하고
○김사형, (8월)국가가 사전(私田)을 개혁하고자 할 처음에 안렴(按廉)을 고쳐 도감찰사(都監察使)를 삼으니 전 밀직상의 김사형이 교주강릉도 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가 되어 공명(公明)하고 위혜(威惠)하여 칭성(稱聲)이 많았다.
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四) /무진신우 14년(1388), 대명 홍무 21년
8월○ 여러 도의 안렴사의 명칭을 고쳐서 도관찰출척사로 삼아 교서(敎書)와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모두 대간에서 천거한 사람을 썼는데, 양광도는 정당문학 성석린(*형 김사렴의 동서)이요, 경상도는 전 평양 윤 장하(張夏)요, 전라도는 전 밀직부사 최유경(*형 김사안의 동서, 8촌 김구용의 매부)이요, 교주ㆍ강릉도는 전 밀직상의 김사형(金士衡)이요, 서해도는 밀직제학 조운흘(趙云仡)이었다. 각각 부사(副使)ㆍ판관을 스스로 천거하게 하여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였다.
○형 김사안(51세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이색, 이숭인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우왕14) 문하시중 이색, 첨서 밀직사사 이숭인(李崇仁),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사안(金士安)을 명나라로 보내 새해를 경축하고 겸하여 명나라 관리를 파견하여 국정(國政)을 감독할 것과 청년 자제의 명나라 유학을 허가할 것을 청하였다. 이색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김사안을 따라갔던 상인(商人) 백거마(白巨麻)가 많은 금, 은을 휴대하고 갔던 바 이숭인이 그 액수를 제한케 하였다. 이색은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이숭인, 김사안 등과 함께 신우를 여흥부(驢興府)로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이색은 앞질러 혼자 가서 만났다. <고려사>
오사충(吳思忠)의 ‘논 이색 소(論李穡疏)’ 에 ---이색이 서울로부터 돌아올 때에 이숭인(李崇仁)ㆍ김사안(金士安) 등과 약속하여 우를 여흥(驪興)에서 뵈었는데 이색은 앞서서 홀로 만나보았다. --- 라는 내용이 있다.
<시대상황>
○위화도 회군과 최영의 몰락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하여 오자, 크게 분개하여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이 실현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성계에 의하여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驪州)으로 이치(移置) 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하여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창왕(昌王) 즉위
1380(우왕 6)∼1389(공양왕 1)
고려의 제33대왕
재위 1388∼1389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창(昌). 우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시중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이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부왕인 우왕이 강화로 추방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 공민왕비)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 9세였다.
○최영(崔瑩), 1388년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密令)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임견미(林堅味)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그해 그의 딸이 왕비(寧妃)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위화도회군을 단행하는 이성계의 세력을 막으려 하였으나, 막대한 원정군을 지휘하는 그를 막을 수 없어 도성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고려 말기의 군벌(軍閥) 대립에 있어서 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이 고려왕조를 부정하려는 신진 군벌에게 패배를 당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용(剛勇)하고 청렴하였던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지금의 高陽)으로 귀양갔고, 다시 합포(合浦:지금의 馬山)·충주로 옮겼다가 공료죄(攻遼罪)로 개성으로 압송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뒤 그해 12월에 참수(斬首)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개풍군(開豊郡) 덕물산(德物山)에 있는 적분(赤墳)은 바로 그의 무덤으로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산 위에 장군당(將軍堂)이 있어 무당들의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색(李穡),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우현보(禹玄寶),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이를 막기 위한 우왕의 명령에 따라 좌시중에 임명되어 방어하려 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의 회군이 성공하여 파직되었다.
○이성계,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으며,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였다. 이해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회군을 단행하였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됨으로써 정치적 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방과(정종), 1388년에 순군부만호(巡軍副萬戶)로서 도만호(都萬戶) 왕안덕(王安德) 등과 함께 국정에 폐해가 많았던 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국문하였으며,
○이방원(태종),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요청의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정도전(鄭道傳),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조준(趙浚), 그가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 무렵으로서,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중망(重望)이 있는 조준을 불러 일을 논의하고, 크게 기뼈하여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에 발탁하고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자문하였다. 그는 크게 감격하여, 아는 것을 모두 이성계에게 이야기하여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해 이성계·정도전(鄭道傳) 등과 전제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의를 얻고, 같은해 7월 처음으로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였으며,
○권근(權近), 1388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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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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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곳 하얼빈은 연일 아침기온이 영하 8도에 내려와 있습니다. 낮에도 영하권에 머물고 있습니다. 두달반 후면 귀국이라 조급하기도 하고 마음도 차갑습니다.
내일 11월 15일부터 1주일간 상해시, 귀주성 귀양시에 출장을 갑니다. 다녀와서 또 연재를 시작해서 15회정도 더 이어갈 생각입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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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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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꽤 쌀쌀 합니다. 이럴때 감기 조심 하셔야 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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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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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반이나 남았습니까, 남은 기간 후회 없이 지내다 오십시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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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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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가시나요?
설날은 여기서 뵙게 되는지요?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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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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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남지않은 이국생활 건강에 유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