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외갓댁, 고모댁 (11) 도첨의공(김흔)의 사위 민적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5-11-22 15:38 조회1,500회 댓글0건

본문

 

충렬공께서 돌아가신후 상락군개국공의 봉작은 도첨의공(김흔)에게 습봉되었습니다.

만호 관직은 장조카(김승용)에게 양보하였습니다.

 

도참의공께서는 아들 承固(숭복도감 판관)와 두 따님을 두시었다.

판관공(김승고)는 후손이 없어 무후이며

첫째 따님은 여흥민씨 민적에게로 시집가셨다.

 

민적은 문경공 민영모의 6세손이며 증조는 한림학사 閔仁均, 조부는 호부시랑 閔滉,

아버지는 첨의찬성사 忠順公 閔宗儒, 어머니는 文度公 兪千遇의 따님이시다.

 

민적은 초취부인으로  도첨의공(김흔)의 따님을 맞아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어릴때 이름이

閔子夷인 及菴 閔思平이시다.

초취부인(영가군부인)이 돌아가시자 후취부인으로 찬성사 元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閔揄, 閔변(手+卞),閔渙 삼형제를 두었다.  민변의 아들이 閔霽이며 민제의 아들이 민무구,민무질,

딸이 태종비 원경왕후이다.

 

문온공 급암 민사평은 언양김씨 정렬공 죽헌 김륜에게 장가들어 외동딸을 두었으니

상락군 (金昴+영창군 김승택의 子)에게 시집보내

외손자3명(김구용, 김제안, 김구덕)과 외손녀9명을 두었다.

급암 민사평의 장인인 정렬공(죽헌 金倫)과  익제 이제현, 우곡 정자후는 개성남쪽 철동에 살고 있어

鐵洞三菴이라 일컬어졌다.  민사평은 죽헌이 돌아가시자 이 집을 물려받아 살면서 외손자인 김구용,김제안형제를

훈육하였다.

 

민적(閔頔)
1269(원종 10)∼1335(충숙왕 복위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낙전(樂全).
찬성사 종유(宗儒)의 아들이며, 이모부인 재상 김군(金頵)의 집에 양육되었다.
풍채가 수려하였으며, 10세에 절에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글을 배우면 곧 그 뜻을 통하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서 국선(國仙)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이 되고, 첨의주서(僉議注書), 비서랑(祕書郎)을 거쳐 군부정랑(軍簿正郎)에 이르렀고,

판도정랑(版圖正郎)에 이르러 세자궁문랑(世子宮門郎)을 겸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비서소윤(祕書小尹)이 되었으나, 이후 충렬왕이 복위하자 면직되어 충선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4년간

머물렀다가 돌아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1308년 다시 충선왕이 복위하자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되고, 이어 선부의랑지제교(選部議郎知製敎)가 되었다가 밀직승지 겸

사헌집의로 승진하였다. 이어 평양윤(平壤尹)이 되었으나 얼마 뒤 파직되고, 4년간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나 녹봉은 전과 같이 받았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선부전서 보문각제학(選部典書寶文閣提學)을 제수받았고, 다음해 밀직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대사헌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충혜왕 때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를 제수받았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