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댁, 고모댁(13) 貞簡公(휘 김영후)배위 上黨郡夫人 淸州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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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28 15:53 조회1,621회 댓글0건본문
문영공(휘 김순)의 큰아드님 문숙공(휘 김영돈)의 배위 냉평국대부인 이천신씨할머님에 대한 족보상의 기록은
아버님이 版圖仕郞 申汝岡 이란 기록밖에 없어
좀더 연구해애할 숙제로 남겨둡니다.(손자가 제학공파조 김익달)
둘째 아드님(휘 김永暉)은 배위 기록이 전혀 없으며( 손자가 판삼사공파조 金장)
셋째 아드님은 자은종대덕스님(金思順)
넷째 아드님이 貞簡公(휘 김영후)이십니다.
정간공의 배위는 상당군부인 청주한씨로서 증조부는 예빈시경 韓光胤, 조부는 文惠公 韓康, 아버지는
典校寺令 韓譜이십니다.
작은(큰)아버지은 韓謝奇이다.
한사기의 아들은 正惠公 韓永, 思肅公 韓握(손수변이아니라 삼수변), 이다.
한영의 아들은 文節公 韓宗愈(1287(충렬왕 13)∼1354(공민왕 3)이며 1352년(공민왕 1)에는 김승택(金承澤)과 함께
서연(書筵)에 들어가니 왕이 예우로써 대접하고 재상을 삼고자 하였다 한다.
사숙공 한악은 도첨의정승을 지내고 충혜왕의 배향공신인데 전리판서 元卿의 따님과 혼인하여 세아들을 두었으니
큰아들은 韓大淳, 둘째아들은 平簡公 韓公義, 3.韓仲禮,4.韓方信이다.
한공의는 경사만의 딸과 혼인하여 삼남삼녀를 두었으니
첫째아들은 文敬公 유항(柳巷) 한수(韓脩)(1333(충숙왕 복위 2)∼1384(우왕 10)이며, 둘째는 한리, 셋째는 한제이다.
큰딸은 안동김씨 김사겸(안렴사공, 익원공의 맏형)에게, 둘째딸은 문충공 익제 이제현의 아들인 이彰路(이창로는 상락군
김묘의 딸을 後室로 맞아들였다.), 셋째딸은 염제신의 아들 동정 염흥방과 혼인하였다.
유항 한수는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으며 1383년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 시서(詩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서와 예서에 능하여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있었으며,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등과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는 그의 필적이다.
문온공파조 척약재(김구용)공과는 막역한 사이로서 그의 문집인 유항집에 [척약재가 배를 타고 찾아오다-척약재乘舟來訪]라는
시가 실려 있다.
한수의 아들은 文烈公 한상질, 文簡公 한상경, 한상덕이며 한상덕이 종손뻘되는 한명회를 키웠으니 그가 바로 세조의 장자방이라 일컫는 상당부원군 한명회이다.
청주한씨
한강(韓康)
생몰년 ?-130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경(璟).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감찰어사가 되었다가 금주수(金州守)가 되었다. 금주는 항상 전부(田賦)가 정액(定額)에 미달하여 수령이 많이 파면되었는데 이곳에 부임하여 둔전(屯田)을 경영, 곡식 2,000여석을 얻어 이민(吏民)을 편안하게 하였다.
이 공적으로 예부낭중(禮部郎中)을 제수받고 공부시랑 간의대부(工部侍郎諫議大夫)·국자대사성 한림학사(國子大司成翰林學士)를 지냈다. 충렬왕 때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옮겼다.
뒤에 찬성사로 치사(致仕)하였다.
충렬왕 때 시무(時務)에 관하여 건의하였는데, 그 내용은 종묘의 향사를 엄격히 할 것, 제사(諸司)의 시물(市物)억매를 금할 것, 사체를 소중히 다룰 것, 살생을 금할 것, 사냥을 그치고 봉양을 절약하여 기갈을 진휼하게 할 것, 《법화경》을 숭상하고 독송할 것 등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한악(韓渥)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의 아들이다.
1310년(충선왕 2) 우대언(右代言),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내고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양왕 고(瀋陽王暠)가 여러가지로 왕을 참소하였는데 기모(奇謀)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함으로써 인정을 받았으며, 이때의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
첨의평리(僉議評理)와 찬성사를 거쳐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 삼사사(三司事), 이듬해 중찬(中贊)을 역임하고, 1340년(충혜왕 복위 1) 우정승에 이르렀다.
한어(漢語)와 몽고어에 능하였으며 성품이 신중하고 기량(器量)이 있었다고 한다.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한종유(韓宗愈)1
1287(충렬왕 13)∼1354(공민왕 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고(師古), 호는 복재(復齋). 한양출신. 밀직 영(英)의 아들이다.
1304년(충렬왕 30) 과거에 급제하여 사한(史翰)에 들어갔고 충숙왕 때 사관수찬(史館修撰)이 되었다.
그뒤 예문관응교가 되었고, 1320년(충숙왕 7) 정방(政房)의 전주(銓注)에 참여하였다.
이때 심왕 고(瀋王暠)가 왕위를 노려 충숙왕과 대립하자 왕을 위하여 노력한 이조년(李兆年)과 더불어 의논하고 간신을 잡아 물리치니, 심왕에게 왕위를 전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331년(충혜왕 1)에는 밀직제학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뽑게 되었다.
이때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경(瓊)이 부정으로 합격하자 간관 허옹(許邕), 정언 조렴(趙廉)·정천유(鄭天濡) 등이 글을 올려, 시험이 공정하지 못하니 다시 시험을 치르기를 청하였다.
또한,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頔)의 난 때에는 정승 김륜(金倫)과 같이 이 난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조적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시종 충절로 충혜왕을 변호하였다. 그 결과 1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부모와 아내와 자식에게도 벼슬이 주어졌고 전답과 노비도 받게 되었다.
1343년에는 한양군(漢陽君)에 봉하여지고 찬성사로 임명되었다. 같은해 왕이 악양(岳陽)에 행차할 때에 왕에게 충성한 사람은 그와 이조년뿐이었는데, 이조년이 죽자 원나라에서는 원자(元子)를 부탁하고자 그를 부르게 되었다.
1344년에 조칙으로 충목왕을 모시고 귀국하여 정사를 보필하게 되어 좌정승에 임명되었다. 충정왕이 왕위에 오른 뒤 권신들이 정치를 멋대로 처리하자 부원군(府院君)으로 향리에 물러앉아 도읍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1352년(공민왕 1)에는 김승택(金承澤)과 함께 서연(書筵)에 들어가니 왕이 예우로써 대접하고 재상을 삼고자 하였다 한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한공의(韓公義)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의지(宜之).
아버지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악(渥)이며, 어머니는 동지밀직전리판서(同知密直典理判書) 원경(元卿)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녹남부사(錄南部事)에 진출한 뒤, 충혜왕의 신임을 받아 호군(護軍)에 제수되고 여러번 승진하여 대호군 삼사우윤(大護軍三司右尹)에 올랐다.
집권층의 비위에 거슬려 전주목사(全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충목왕 때 소부(小府)·위위(衛尉)·선공(繕工)의 세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이어 대언(代言)이 되고, 왕이 죽던 날에 “임금과 신하는 시종(始終)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공민왕이 그를 신임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였다. 다시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옮겼으며, 2년이 지나자 다시 형부(刑部)로 옮겼는데 송사처리가 공정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밀직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 졌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한수(韓脩)
1333(충숙왕 복위 2)∼1384(우왕 10).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 중찬(中贊) 악(渥)의 손자이다.
일찍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1347년(충목왕 3) 15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충정왕 때 정방(政房)의 필도치(必闍赤)에 임명되었으며, 왕이 손위(遜位)하고 강화로 쫓겨날 때 시종하여 함께 따라갔다.
1353년(공민왕 2) 전의주부(典儀注簿)로 기용되어 다시 필도치가 되고 이어 전리좌랑·성균사예·비서소감·병부시랑·국자감좨주 등을 역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하였으며, 귀경 후 사복시판사를 거쳐 좌대언(左代言)에 승진하였다.
1365년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왕에게 신돈이 바른 사람이 아니니 멀리할 것을 아뢰었다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폄직된 다음 곧 관직을 물러났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왕이 다시 불러 이부상서·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발탁하였으며 곧 승선(承宣)에 임명됨으로써 전선(銓選)을 관장하게 되었다.
우왕대에 밀직제학·동지밀직 등을 지냈으나 공민왕 시해에 관여한 한안(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시 유배되었으며, 1378년 배소에서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었다.
이어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고 1383년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다. 시서(詩書)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서와 예서에 능하여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있었으며,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등과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는 그의 필적이다.
이색(李穡)과는 일찍부터 교분이 깊었고, 또한 《유항집 柳巷集》이라는 시집을 남겼다고 한다. 《동문선》에 〈영모정행 永慕亭行〉 등 시 여러 수가 수록되어 있고, 그밖의 책에서도 그의 시문이 산견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한상질(韓尙質)
?∼1400(정종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
호부상서(戶部尙書) 공의(公義)의 손자로,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수(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 권적(權適)의 딸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상경(尙敬)이 그의 아우이고, 세조 때 공신 명회(明澮)는 그의 손자이다.
1374년(공민왕 23) 대군시학(大君侍學)을 지내고, 1380년(우왕 6) 좌랑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양왕 때 형조판서를 거쳐, 우부대언·우상시(右常侍)·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6월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무망(誣妄)을 변명하고 돌아와, 12월에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를 지냈다.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국호의 결정을 요청하여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결정받고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그가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에 기로(耆老)와 백관(百官)이 도당(都堂)에 모여 국호를 의논하였는데, 이성계(李成桂)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단군·기자·위만의 세 조선을 상징하는 조선이라는 두개의 칭호를 가지고 명나라 황제에게 품의한 결과, ‘조선’이라는 칭호가 아름답고 유래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국호로 선정하였다.
명나라는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칭호를 새 왕조의 국호로 선정하였으나, 조선측에서 생각하는 ‘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의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그것은 국호를 제정하기 이전인 1392년(태조 1) 8월에 이미 단군을 동방의 첫 수명군주(受命君主)로서 국가에서 평양부로 하여금 시제(時祭)를 지내도록 조처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1393년 9월 양광도관찰출척사(楊廣道觀察黜陟使)가 되고, 1397년 경상도관찰출척사를 거쳐, 이해 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었다. 성품이 총민(聰敏)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많이 쌓았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한상경(韓尙敬)
1360(공민왕 9)∼1423(세종 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숙경(叔敬)·경중(敬仲), 호는 신재(信齋).
호부상서 공의(公義)의 손자로,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수(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 권적(權適)의 딸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의좌랑·우정언·전리정랑(典理正郎)·예문응교·공부총랑(工部摠郎)·종부영(宗簿令)을 거쳐, 1392년(공양왕 4)밀직사우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이해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 모의에 가담하고, 보새(寶璽)를 받들어 이성계에게 바쳤으며, 그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추록되었다. 개국 후 중추원도승지가 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도평의사사사에 승진되었으며, 충청도도관찰사가 되어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다시 경기좌도도관찰사에 보직되었다가 태종 때 참찬의정부사·이조판서를 거쳐,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우의정·영의정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한상덕(韓尙德)
생몰년 미상. 고려말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계덕(季德). 호부상서(戶部尙書) 공의(公義)의 손자로,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수(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 권적(權適)의 딸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우대언(右代言)과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한명회(韓明澮)는 그의 종손 뻘이 되나, 아들이 없던 그가 명회를 길렀다.
우대언으로 있던 당시 우리나라는 많은 부분 중국농서를 이용하여왔다. 이에 불편을 느낀 태종은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중국의 고서에서 우리 실정에 간절히 필요한 말을 초록하되 우리말로 주를 달아 널리 보급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이때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그가 왕의 뜻에 따라 1273년(원종 14) 원나라 사농사(司農司)가 엮은 《농상집요 農桑輯要》 제4권에서 양잠에 관한 내용의 약 30%를 초록, 이에 이두문으로 주를 달아 1415년(태종 15)우리나라 최초의 양잠에 관한 책인《양잠경험촬요 養蠶經驗撮要》를 초록하였다.
그의 초록 태도로 보아 양잠기술에 식견이 높았던 농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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