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외갓댁, 고모댁(14) 문영공(김순)큰사위 정책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5-11-29 16:24 조회1,826회 댓글1건

본문

문영공(김순)의 큰사위는 청주정씨 정책입니다.

 

청주정씨는 고려 의종때 중랑장를 지낸 정극경(鄭克卿)을 시조로 하고 있다

정극경의 6세손 정책(鄭 心+責)이 충숙왕때 충주목사를 지내고 淸河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하니 청주정씨의 중시조는 정책이다.

 

정책의 아버지는 찬성을 지낸 章敬公 鄭諧(말씀언변이 아니라 구슬옥변)이다

정책은 두아들을 두었으니 큰아들은 첨의평리 서원군 文克公 雪軒 鄭敖, 작은 아들이 雪谷 鄭포)言+浦)로서

목은의 아버지 이곡과 함께 시문과 글씨로 유명하다.

 

정포의 아들이 文簡公 원재 정공권(일명 정추)이다.

원재는 문장가로서 유명하며 척약재 김구용과는 매우 가까운 사이이고

정공권(정추)가 지은 육우당부(척약재당호)가 원재집에 실려 있다.

 

정공권(원재 정추)의 아들은 문민공(文愍公) 정총, 조선개국공신이며 태종묘에 배행된 익경공(翼景公)정탁이다

정총의 딸이 안동김씨 金五文(안정공 김구덕의 아들)에게 시집왔다.

 

정해(鄭瑎)1
1254(고종 41)∼1305(충렬왕 31).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현계(玄繼). 자는 회지(晦之). 대장군 의(顗)의 손자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었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고 비서교감(祕書校勘)에 보임된 뒤 충렬왕초에 대상부녹사(大常府錄事)로서 필도치(必闍赤)가 되었고, 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온 뒤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올랐다.
1292년(충렬왕 18) 우승지가 되어 전주(銓注)를 관장함에 공정하다는 평이 있었다.
지신사(知申事)·부지밀직(副知密直)·남경유수(南京留守)·광릉부윤(廣陵府尹)을 거쳐 1298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으나, 한희유(韓希愈)를 무고한 사건으로 이듬해 파직되었다.
1303년 첨의참리(僉議參理)에서 밀직사사, 이듬해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고, 1305년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나 곧 죽었다.
1305년 지공거(知貢擧)를 맡아 한종유(韓宗愈)·김영돈(金永旽)·장자빈(張子贇) 등을 시취(試取)하였으며,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낭중(征東行省郎中)·유학제거(儒學提擧)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외유내강의 성품으로 마음은 너그럽고 조용하나 일에는 민첩하고 용감하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정오(鄭䫨)2
?∼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겸(思謙). 호는 설헌(雪軒).
찬성사 해(瑎)의 손자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책($책01)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1330년(충혜왕 즉위년) 성균승(成均丞)으로서 전주(銓注)를 맡았으며, 이어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으나 이듬해 왕을 비방하였다는 나인(內人) 최안계(崔安桂)의 참소로 이문소(理問所)에 투옥되고 장형을 당하였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 동지밀직사사에 제배되고, 이듬해 지밀직사사로 승진하면서 원나라에서 왕을 수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54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라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추충진의보리공신(推忠陳義輔理功臣)에 봉해졌다.
원으로부터 정동행성(征東行省) 유학제거(儒學提擧)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극(文克)이다.

 

 

 

 

정포(鄭誧)
1309(충선왕 1)∼1345(충목왕 1).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해(瑎)의 손자로, 판선공(判繕工) 책(責)의 아들이며, 최문도(崔文度)의 사위이다.
1326년(충숙왕 13) 과거에 급제하였고, 얼마 뒤 예문수찬으로 원나라에 표(表)를 올리러 가다가 마침 원나라에서 귀국중이던 충숙왕을 배알하게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충혜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郎)에서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으나, 당시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파면당하였다.
이때 어떤 이가 정포가 원나라로 망명하려 한다는 참언을 하여 끝내 울주(蔚州:지금의 울산)로 유배당하였다.
유배중에도 오히려 태연자약하여 활달한 장부의 기질을 잊지 않고 풍류생활을 즐겼다.
유배지에서 풀리자 다시 출세의 의지를 가지고 원나라에 건너갔으며, 원나라 승상인 별가불화(別哥不花, 別哥普化)가 그를 한번 보고 매우 호감을 가지게 되어 원나라 임금에게 추천하였으나, 그뒤 얼마 안 되어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최해(崔瀣)의 문인으로 이곡(李穀) 등과 사귀며 시문과 글씨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그러나 문집인 《설곡시고 雪谷詩藁》가 전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문학과 사상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이제현(李齊賢)이 쓴 〈설곡시서 雪谷詩序〉에서 정포의 불행하였던 일생에 대하여 애석해하는 글귀들이 나타나는바, 이를 통하여 그의 인물됨과 재식(才識)의 일단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이색(李穡)의 〈설곡시고서 雪谷詩藁序〉에서 그의 시를 “맑아도 고고(苦孤)하지 않고, 화려해도 음탕하지 않아, 사기(辭氣)가 우아하고 심원하여 결코 저속한 글자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 하여, 높은 수준의 시경(詩境)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러한 인생체험을 품격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정공권(鄭公權)
1333(충숙왕 복위 2)∼1382(우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추(樞). 자는 공권(公權)인데,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호는 원재(圓齋).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보(溥)의 아들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동래현령으로 좌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된 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발탁되었다.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우왕 즉위 후 좌대언·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는데, 1376년(우왕 2) 태(胎)를 예안현(禮安縣)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뒤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받고, 수성익조공신(輸誠翊祚功臣)에 올랐다.
성품이 공검하고 근후하여 관직에 있을 때 항상 정도를 행하였다. 당시 가묘제도(家廟制度)가 폐지되었으나, 제기를 별실에 간직하여두고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사에 쓰도록 하였다.
나라의 일이 권신의 손에 좌우되는 것을 한탄하다가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원재집 圓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정총(鄭摠)
1358(공민왕 7)∼1397(태조6).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
정당문학(政堂文學) 추(樞:일명 公權)의 아들이며, 조선개국공신 탁(擢)의 형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9세로 춘추관검열이 되고, 대간·응교·사예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고, 1389년(공양왕 1) 병조판서에 승진되었으며, 1391년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에 보낸 표전문(表箋文)은 대부분 그가 지었다. 조선개국 후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1394년(태조 3) 정당문학이 되고, 다시 예문춘추관태학사가 되어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고려사》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썼다.
1395년 태조 이성계의 고명(誥命) 및 인신(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때마침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이 불손하다 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트집잡혀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도중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문집으로 《복재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정탁(鄭擢)1
1363(공민왕 12)∼1423(세종 5).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괴(汝魁)·축은(築隱), 호는 춘곡(春谷).
정당문학(政堂文學) 공권(公權)의 아들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춘추관수찬관·사헌규정(司憲糾正)·좌정언·호조좌랑·병조좌랑·광흥창사(廣興倉使)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사헌부지평과 성균관사예를 거쳐 대장군이 되었고, 이성계의 추대를 제일 먼저 발의한 공로로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393년 문하부직문하(門下府直門下),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396년 중추원우승지로 있을 때 전년부터 조선과 명나라의 현안문제로 대두된 표전문제(表箋問題)의 찬표인(撰表人)으로 명나라에 압송되었다.
귀환하여 좌승지를 거쳐 1398년 중추원부사에 승진하면서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다.
1398년(정종 즉위년) 10월 방간(芳幹)의 난 평정에 대한 공로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 곧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춘추관의 대학사, 정당문학을 거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다.
1403년(태종 3)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며, 1405년 살인죄로 직첩을 몰수당하고 영해로 유배되었으나 공신이므로 곧 사면되었다.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거쳐, 1408년 태조가 죽자 고부청시사(告訃請諡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5년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진봉되었고, 1421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익경(翼景)이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문영공의 큰 사위-청주 정씨 정책, 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