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16)기구한 젊은 때(5) - 나룻배를 타고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5-12-01 11:38 조회1,731회 댓글1건본문
기구한 젊은 때(5) - 나룻배를 타고
이 혼사에 훼사를 놓은 김가라는 사람은 함경도 정평에 본적을 둔 김치경(金致景)이다. 1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술을 같이 자시다가 김에게 8, 9세 되는 딸이 있단 말을 들으시고 취담으로, '내 아들과 혼사하자' 하여 서로 언약을 하고 그 후에 아버지는 그 언약을 지키셔서 내 사주도 보내시고 또 그 계집애를 가끔 우리 집에 데려다 두기도 하였는데, 서당 동무들이, '함지박 장수 사위'라고 나를 놀려먹는 것도 싫었고, 또 한 번은 얼음판에 핑구를 돌리고 있는데 그 계집애가 따라 와서 제게도 핑구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나를 조르는 것이 싫고 미워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떼를 써서 그 애를 제 집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약혼을 깨뜨린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여러 해를 지내서 갑오년 일청전쟁(日淸戰爭)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아들딸을 혼인시켜야 한다고 어린 것들까지도 부랴부랴 성례를 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 때 동학 접주로 동분서주하던 내가 하루는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집에서는 그 여자와 나와 성례를 한다고 떡과 술을 마련하고 모든 혼구를 다 차려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싫다고 버티어서 마침내 김치경도 도리어 무방하게 생각하여 아주 이 혼인은 파혼이 되고, 김은 그 딸을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정혼까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고씨 집에 장가든다는 소문을 듣고 돈이라도 좀 얻어먹을 양으로 고 선생 댁에 와서 야료를 한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분노하여 김치경을 찾아가서 김과 한바탕 싸우셨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내 혼인 문제는 불행한 끝을 맺고 고 선생도 청계동에 더 계실 뜻이 없어 해주 비동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나는 금주 서씨의 집으로 가노라고 역시 청계동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내 방랑의 길은 다시 계속되었다.
평양 감영에 다다르니 관찰사 이하로 관리 전부가 벌써 단발을 하였고, 이제는 길목을 막고 행인을 막 붙들어서 상투를 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를 안 깎이려고 슬몃슬몃 평양을 빠져나와 촌으로 산읍으로 피난을 가고 백성의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찼다. 이것을 보고 나는 머리 끝까지 분이 올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왜의 손에 노는 이 나쁜 정부를 들어엎어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안주 병영에 도착하니 게시판에 단발을 정지하라는 영이 붙어 있었다. 임금은 개혁파가 싫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하시고 수구파들은 러시아의 세력에 등을 대고 총리대신 김홍집을 때려죽이고 개혁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에 러시아와 일본과의 세력 다툼이 시작되고 친아파와 친일파의 갈등이 벌어지게 되었다.
나는 한성 정국의 변동으로 심기가 일전하였다. 구태여 외국으로 갈 것이 무엇이냐, 삼남에서는 곳곳에 의병(義兵)이 일어난다고 하니 본국에 머물러 시세를 관망하여서 새로 거취를 정하기로 하고 길을 돌려 용강을 거쳐서 안악으로 가기로 하였다.
나는 치하포( 河浦) 나룻배에 올랐다. 때는 병신년(丙申年) 2월 하순이라 대동강 하류인 이 물길에는 얼음산이 수없이 흘러내렸다. 남녀 15, 16명을 태운 우리 나룻배는 얼음산에 싸여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진남포 아래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조수를 따라서 다시 상류로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다. 선객은 말할 것도 없고 선부들까지 이제는 죽었다고 울고불고 하였다.
해마다 이때 이 목에서는 이런 참변이 생기는 일이 많았는데 우리가 지금 그것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배에는 양식이 없으면 비록 파선하기를 면하더라도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것이다. 다행히 나귀 한 마리가 있으니 이 모양으로 여러 날이 가게 될 경우에는 잔인하나마 잡아먹기로 하고 한갓 울고만 있어도 쓸 데 없으니 선객들도 선부들과 함께 힘을 써 보자고 내가 발론하였다. 여럿이 힘을 합하여 얼음산을 떠밀어 보자는 것이다.
나는 몸을 날려 성큼 얼음산에 뛰어 올라서 형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큰 산을 의지하여 작은 산을 떠밀고, 이러한 방법을 반복하여서 간신히 한 줄기 살 길을 찾았다. 이리하여 치하포에서 5 리쯤 떨어진 강 언덕에 내리니 강 건너 서쪽 산에 지는 달이 아직 빛을 남기고 있었다. 찬 바람 속에 밤길을 걸어서 치하포 배 주인 집에 드니 풍랑으로 길이 막혀서 묵는 손님이 삼간방에 가득히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그 틈에 끼여 막 잠이 들려 할 즈음에 벌써 먼저 들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오늘 일기가 좋으니 새벽물에 배를 건네달라고 야단들이다. 이윽고 아랫방에서부터 벌써 밥상이 들기 시작한다.
나도 할 수 없이 일어나 앉아서 내 상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가운데 방에 단발한 사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어떤 행객과 인사하는 것을 들으니 그는 성은 정씨요, 장연에 산다고 한다. 장연에서는 일찍 단발령이 실시되어서 민간에도 머리를 깎은 사람이 많았었다.
그러나 그 말씨가 장연 사투리가 아니요, 서울말이었다. 조선말이 썩 능숙하지마는 내 눈에는 그는 분명히 왜놈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이 보였다. 어디로 가느냐 한즉 그는 진남포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보통으로 장사나 공업을 하는 일인(日人) 같으면 이렇게 변복, 변성명을 할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죽인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국가와 민족에 독균이 되기는 분명한 일이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나라의 수치를 씻어보리라고 나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나는 내 힘과 환경을 헤아려 보았다. 삼간방 40여 명 손님 중에 그놈의 패가 몇이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열 일곱 여덟 살 되어 보이는 총각 하나가 그의 곁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다.
나는 궁리하였다. 저놈은 둘이요, 또 칼이 있고 나는 혼자요, 또 적수공권(赤手空拳)이다. 게다가 내가 저놈에게 손을 대면 필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릴 것이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있는 틈을 타서 저놈의 칼은 내 목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망설일 때에 내 가슴은 심히 울렁거리고 심신이 혼란하여 진정할 수가 없어 심히 마음에 고민하였다. 그 때에 문득 고 선생의 교훈 중에,
'나무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장부이다
(得樹樊枝不足奇 懸崖撒手丈夫兒)'라는 글귀가 생각이 났다. 벌레를 잡은 손을 탁 놓아라, 그것이 대장부다. 나는 가슴 속에 한 줄기 광명이 비침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자답하였다.
'저 왜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옳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느냐?'
'그렇다.'
'의를 보았거든 할 것이요, 일의 성불성을 교계(敎誡)하고 망설이는 것은 몸을 좋아하고 이름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 아니냐?'
'그렇다. 나는 의를 위하는 자요, 몸이나 이름을 위하는 자는 아니다.'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 |
김태서 |
---|---|
작성일 |
달력을 넘기다 보니 이제 일년을 벽화처럼
버텨주던 을유년 달력이 달랑 한장 남었네요.
자주 인사 여쭙지 못하는 죄송스런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