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12 (49세, 13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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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2-05 22:22 조회1,585회 댓글3건본문
(49세) 1389년 창왕1(공양왕원년)
○김사형, (9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다.
고려사절요 제34권 /공양왕 1(恭讓王一) /기사 원년(1389), 대명(大明) 홍무 22년
9월○ 장하(張夏)ㆍ성석린(成石璘)을 문하 평리로, 조운흘(趙云仡)ㆍ김사형(金士衡)ㆍ최유경(崔有慶)을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로, 권주(權鑄)를 밀직 제학(密直提學)으로, 민제(閔霽)를 개성윤(開城尹)으로 삼았다.
△형 김사안(52세쯤), 공양왕 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정총(鄭摠, 1358-1397)의 <복재집(復齋集)>에 ‘敎全羅道都觀察三司右使金 士安 書’가 실려 있다.
<시대상황>
○1389년 1월 경상원수 박위가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8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밀도(密度)가 옥지(玉之)를 사신으로 보내자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양광도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청으로 주·군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같은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유구국에 보내어 보빙하였다. 그해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여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京畿)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그것으로써 녹봉과 군수(軍需)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그해 전왕인 우왕을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겼다.
그뒤 이성계 등이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두 왕을 모두 폐위시켰다가,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공양왕(恭讓王) 즉위
1345(충목왕 1)∼1394(태조 3)
고려 제34대왕
재위 1389∼1392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요(瑤). 신종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는 창성군(昌成君) 진의 딸 순비 노씨(順妃盧氏)이다.
1389년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재위 3년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몇 차례 제도를 개편했는데, 이것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색(李穡), 1389년(공양왕 1)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이23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이숭인(李崇仁), 창왕 때 박천상(朴天祥)·하륜(河崙) 등과 더불어 영흥군 환(永興君環)의 진위를 변론하다가 무고에 연좌되어 헌사(憲司)가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므로 피하여 다니다가 시중 이성계(李成桂)의 도움으로 다시 서연(書筵)에 시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관 구성우(具成佑)·오사충(吳思忠)·남재(南在)·심인봉(沈仁鳳)·이당(李堂) 등이 상소, 탄핵하여 경산부로 유배당하였다.
이때 첨서밀직사사 권근(權近)이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무죄를 상소하였으나 간관이 도리어 권근의 상소가 거짓을 꾸민 것이라 상소하니 창왕은 그를 우봉현(牛峯縣)에 유배하였다.
○정도전(鄭道傳), 1389년에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朴葳) 등과 모의하여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中典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이23)·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이 되고,
○조준, 다음해 8월과 12월에 잇달아 전제개혁소를 올려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변안열(邊安烈)·권근(權近)·유백유(柳伯濡) 등 전제개혁 반대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또 관제·신분·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고, 지문하부사 겸 대사헌(知門下府事兼大司憲)으로 추충여절좌명공신(推忠勵節佐命功臣)이 되었다. 이어 조민수(曺敏修)·이인임(李仁任) 등 권신을 탄핵하고 창왕을 폐위,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이성계·정도전 등과 더불어 중흥공신에 서훈되었다.
○권근(權近),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을 때,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 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우현보(禹玄寶), 그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인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이방과(정종), 1389년(창왕 1)7월 절제사(節制使) 유만수(柳曼殊)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하였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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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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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귀가하자마자 쉬지도 않고 또 일을 시작하십니다.
끝나면 홈에 넣겠습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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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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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참 열심이신 모습 보기에 좋습니다.
바쁘고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이 연상이 됩니다.
김은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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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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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