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18)기구한 젊은 때(7) - 옥에 갇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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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2-07 11:36 조회1,429회 댓글0건본문
기구한 젊은 때(7) - 옥에 갇히다
신천읍에 오니 이 날이 마침 장날이라 장꾼들이 많이 모였는데, 이곳 저곳에서 치하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들렸다. 어떤 장사가 나타나서 한 주먹으로 일인을 때려 죽였다는 둥, 나룻배가 빙산에 끼인 것을 그 장사가 강에 뛰어 들어서 손으로 얼음을 밀어서 그 배에 탄 사람을 살렸다는 둥, 밥 일곱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다 먹더라는 둥, 말들을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지난 일을 낱낱이 아뢰었더니, 부모님은 날더러 어디로 피하라고 하셨으나 나는 나라를 위하여서 정정당당한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피하기를 원치 않을뿐더러, 만일 내가 잡혀가 목이 떨어지더라도 이로서 만민에게 교훈을 준다 하면 죽어도 영광이라 하여 태연히 집에 있어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렸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서 병신년 5월 열 하룻날 새벽에 내가 아직 자리에 누워 일어나기도 전에 어머님이 사랑문을 여시고,
"이애, 우리 집을 앞뒤로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둘러싸누나"
하시는 말씀이 끝나자, 철편과 철퇴를 든 수십 명이,
"네가 김창수냐?"
하고 덤벼든다.
나는,
"그렇다. 나는 김창수여니와 그대들은 무슨 사람이관대 요란하게 남의 집에 들어오느냐?"
한즉 그제야 그 중에 한 사람이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 한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나를 묶어 앞세운다. 순검과 사령이 도합 30여 명이요, 내 몸은 쇠사슬로 여러 겹을 동여매고 한 사람씩 앞뒤에서 나를 결박한 쇠사슬 끝을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후 좌우로 나를 옹위하고 해주로 향하여 길을 재촉한다.
동네 20여 호가 일가이지마는 모두 겁을 내어 하나도 감히 문을 열고 내다보는 이도 없다. 이웃 동네 강시, 이씨네 사람들은 김창수가 동학을 한 죄로 저렇게 잡혀간다고 수군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틀 만에 나는 해주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어머니는 밥을 빌어다가 내 옥바라지를 하시고 아버지는 영리청, 사령청, 계방(契房)을 찾아 예전 낯으로 내 석방 운동을 하셨으나, 사건이 워낙 중대한지라 아무 효과도 없었다.
옥에 갇힌 지 한 달이나 넘어서 목에 큰 칼을 쓴 채로 선화당 뜰에 끌려 들어가사 감사 민영철에게 첫 심문을 받았다. 민영철은,
"네가 안악 치하포에서 일인을 살해하고 도적질을 하였다지?"
하는 말에 나는,
"그런 일이 없소"
하고 딱 잡아 떼었다.
감사는 언성을 높여서
"이놈, 네 행적에 증거가 소연하거든 그래도 모른다 할까? 이봐라, 저 놈 단단히 다루렸다!"
하는 호령에 사령들이 달려들어 내 두 발목과 무릎을 칭칭 동이고, 붉은 칠을 한 몽둥이 두 개를 다리 새에 들이밀고 한 놈이 한 개씩 몽둥이를 잡고, 힘껏 눌러서 주리를 튼다. 단번에 내 정강이의 살이 터져서 뼈가 허옇게 드러난다. 지금 내 왼편 정강이 마루에 있는 큰 허물이 그때에 상한 자리다. 나는 입을 다물고 대답을 아니 하다가 마침내 기절하였다.
이에 주리를 그치고 내 면상에 냉수를 뿜어서 소생시킨 뒤에 감사는 다시 같은 소리를 묻는다. 나는 소리를 가다듬어서,
"민의 체포장을 보온즉, '내부훈령등인'이라 하였은즉, 이것은 관찰부에서 처리할 안건이 아니오니, 내부로 보고하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서울에 가기 전에 내가 그 일인을 죽인 동기를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작정한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민 감사는 다시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내려 가두었다. 그로부터 두 달을 지낸 7월 초에 나는 인천으로 이수가 되었다. 인천 감리영(仁川 監理營)으로부터 4,5 명의 순검이 해주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내가 집에 돌아올 기약이 망연하여서, 아버지는 집이며 가장집물을 모두 방매하여 가지고, 서울이거나 인천이거나 내가 끌려가는 대로 따라가셔서 하회를 보시기로 하여 일단 집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나를 따라오셨다.
해주를 떠난 첫날은 연안읍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나진포(羅津浦)로 가는 길에 읍에서 5 리쯤 가서 길가 어느 무덤 곁에서 쉬게 되었다. 이 날은 일기가 대단히 더워서 순검들도 참외를 사먹으며 다리쉼을 하였다. 우리가 쉬고 있는 곁 무덤 앞에는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앞에는 '효자이창매지묘(孝子李昌梅之墓)'라 하고, 뒤에는 그의 사적이 새겨져 있다.
그 비문에 의하건대, 이창매는 본래 연안부의 통인(通引) - 원의 곁에 모셔 말을 받아 내리고 올리고 하는 천한 구실 - 으로서 그 어머니가 죽으매,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한결같이 그 어머니의 산소를 모셨다 하여 나라에서 효자 정문을 내렸다 하였고, 또 이창매의 산소 옆의 그 아버지의 묘소 앞에는 그가 신을 벗어 놓고 계절(階節) 앞으로 걸어 들어간 발자국과 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향로와 향합을 놓았던 자리에는 영영 풀이 나지 못하였고, 혹시 사람들이 그 움푹 파인 자리를 메우는 일이 있으면 곧 뇌성이 진동하며, 큰 비가 퍼부어 메운 흙을 씻어내고야 만다고 한다.
그 근처 사람들과 순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귀로 듣고 돌비에 새긴 사적을 눈으로 보매 나는 순검들이 알세라 어머님이 알세라 하고 피섞인 눈물을 흘렸다. 저 이창매는 죽은 부모에 대하여서도 저처럼 효성이 지극하였거늘 부모의 생전에야 오죽하였으랴. 그런데 거의 넋을 잃으시고 허둥허둥 나를 따라오시는 내 어머니를 보라. 나는 얼마나 불효한 자식인가. 나는 쇠사슬에 끌려서 그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금 다시금 이 효자의 무덤을 돌아보고 수없이 마음으로 절을 하였다.
내가 나진포에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 병신 7월 25일, 달빛도 없이 캄캄한 밤이었다. 물결조차 안 보이고 다만 소리 뿐이었다. 배가 강화도를 지날 때쯤하여 나를 호송하는 순검들이 여름 더윗길에 몸이 곤하여 마음놓고 잠든 것을 보시고 어머니는 뱃사공께도 안 들릴 만한 입 안엣 말씀으로,
"얘야, 네가 이제 가면 왜놈의 손에 죽을 터이니 차라리 맑고 맑은 물에 너와 나와 같이 죽어서 귀신이라도 모자(母子)가 같이 다니자"
하시고 내 손을 이끄시고 뱃전으로 가까이 나가신다. 나는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이번 가서 죽을 줄 아십니까, 결코 안 죽습니다. 제가 나를 위하여 하늘에 사무친 정성으로 한 일이니, 하늘이 도우실 것입니다. 분명히 안 죽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바다에 빠져 죽자고 손을 끄시므로 나는 더욱 자신있게,
"어머니, 저는 분명히 안 죽습니다"
하고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제야 어머니도 죽을 결심을 버리시고,
"나는 네 아버지하고 약속했다. 네가 죽는 날이면 양주(兩主) 같이 죽자고..."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비비시면서 알아듣지 못할 낮은 음성으로 축원을 올리신다. 여전히 천지는 캄캄하고 안 보이는 물결 소리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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