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14 (51세, 13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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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2-08 00:43 조회1,848회 댓글2건본문
(51세) 1391년 공양왕2
고려사절요 제35권 /공양왕 2(恭讓王二) /신미 3년(1391), 대명 홍무 24년
10월○ 왕이 경연에 나아갔는데, 《정관정요(貞觀政要)》주D-016를 강하다가, "당(唐)의 태종(太宗)이 다시 고구려를 치고자 하니, 방현령(房玄齡)이 표문(表文)을 올려 이를 간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러, 좌대언(左代言) 이첨(李詹)이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에 신하의 예절을 지켰습니다. 옛날에 양(梁)의 무제(武帝)가 후경(侯景)에게 핍박받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였는데, 이르러 보니 시조(市朝)가 무성한 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자가 이를 보고 우니, 후경(侯景)이 사신을 잡아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국운이 흥성한 옛날과 같지 않으므로 운다.' 하니, 후경이 이를 의롭게 여겨 놓아주었습니다. 당(唐)의 현종(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화를 당하여 서쪽으로 촉도(蜀道 사천성(四川省))에 행차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사신이 촉에까지 가니, 현종이 기뻐하여 친히 시를 지어서 사신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역사에 기재되어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원 나라가 말기에 북쪽으로 상도(上都)로 옮겼는데도 달려가서 빙문함이 오히려 공손하였으니, 이것은 신등이 직접 본 바입니다. 그러므로 신하의 예절을 삼가 지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미칠 수 없는데, 하물며 지금 당당한 천조(天朝 명 나라)에 대해서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신하의 예절을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지문하 김사형(金士衡)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궁벽하게 먼 구석에 있어 산천이 험하니, 만약 능히 제후의 도리를 조심하여 닦는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뜻 깊게 받아 들였다.
△형 김사렴(57세), 청주 도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운곡 원천석 선생이 오은 김사렴을 찾아와 망국의 한을 달래는 자리에서 그 아우 석루(?호, ?자) 사안이 시석하고 있었다. 그때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순은 신덕린이 와서 최후의 결별로 만나서 그리든 회포와 처세할 것을 한담하면서, 김사렴이 운곡 원천석에게 역동 우탁 가문(우현보 등)과 불훤재 신현 가문(신덕린 등)이 화당한 사실을 기록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1860 화해사전>
○형 김사안(54세쯤), 1391년(공양왕 신미3) 9월 경인일에 前전라도 관찰사 김사안(金士安)이 죽었다. 조정에서는 3일간의 사업을 정지하였으며 충강(忠康)이란 시호를 주었다. <고려사>
<시대상황>
○이성계,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으며,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하였다.
○우현보(禹玄寶), 그러나 이듬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철원으로 유배되고,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정몽주(鄭夢周),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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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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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김사렴, 김사안, 김사형, 그리고 원천석, 이색, 이숭인, 이성계, 조준, 정몽주, 정도전 등 당시의 이름난 역사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는 고려말의 모습입니다.
이럴 때 과연 나는 어떻게 행했을까 잠시 생각해 봅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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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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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고려가 1년여 밖에 안남은 시절입니다.
격동의 시기에선 익원공의 연보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