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묘를 옮긴 사람들은 무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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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12-29 22:28 조회2,216회 댓글3건본문
본 자료는 우리 홈에 몇 차례 소개되었던 서울시 유형문화재 한글고비에 대한 것으로, 고비(古碑)의 주인공인 성주이씨 문중 홈에, 고령신씨 신경식님께서 문의한 내용을 성주이씨 이상복님께서 답해주신 내용입니다.
한글고비의 주인공 이윤탁의 배위가 고령신씨이며 고비를 세운 아들 이문건의 배위는 안동김씨입니다.
고령신씨 게시판(대화방)에서 옮겨왔습니다.
■ 건드리지 마. 다쳐! 한 마디로 “건드리지마. 다쳐!” 이렇게 말하고 있는 비를 지역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살살 ‘건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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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합장묘에 세울 묘갈은 합장 결정 직후부터 새기기 시작해 1536년 3월 17일 절반 정도 새기고, 같은 해 4월 16일 완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5월 4일 이문건은 드디어 모든 석물들을 묘역에 세운다. 묘갈을 새기고 세우는 데만 5개월 정도 소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묘갈을 새기고 또 세웠는지는 그의 일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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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한글고비는 노원의 야산 중턱에 있는 어머니 묘 옆 여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아버지 묘 이장 작업까지 도맡아야 했던 이문건이 한 겨울 추위, 육신의 수고로움과 고통, 마음의 비통함을 삭여가며 한 자 한 자 직접 파 내려간 노력과 정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글고비 좌우 측면에서 보는 경계문은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번 옮겨야 했던 아버지의 묘를 두 번 다시 옮기는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문건이 정해놓은 일종의 방어장치, 그것도 아주 개성 있고 재치 있는 방어장치였던 셈이다. |
■ 그의 묘를 옮긴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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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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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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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고비를 세운 묵재 이문건의 배위는 안동김씨 제학공파의 명인이신 기묘사화의 명현 영상공 휘 석(錫)의 누이요 증참판공 휘 언묵(휘 彦默-시흥시 소래산에 묘가 있음)의 따님이십니다.
제학공파의 세칭 5갑(충갑, 효갑, 우갑, 제갑, 인갑) 선조님들은 바로 이 한글 고비를 만드신 주인공이신 고모부 묵재 이문건 선생에게서 많은 하교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5갑 후손들은 이 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위의 한글 고비는 지난 2004년 11월 경 주회 대부와 다녀온 바 있습니다.
발용대부님 좋은 자료 소개에 감사합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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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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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이 시점에 서면 언제나 느끼는건
어제같이 한해를 시작 했는데...
책장 넘기듯이 넘어가는 시간들이
참으로 아쉽네요.
한 해의 마무리 잘 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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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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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재미난 사연 잘 읽었습니다.
발용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