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隱庵과 포천 안동김씨 宗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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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6-01-01 14:30 조회1,508회 댓글2건본문
大隱庵과 포천 안동김씨 宗家
안동김씨사이버학술연구회(안사연)는 주회(안) 종친이 확인한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의 <동주선생문집> 권2 ‘대은암 서(大隱庵序)’를 근거로 하여 2005. 1.23.(일) 명례방 수하동 대은암(현 중구문화원 갤러리 일대)터를 답사한 바 있습니다.
동주 이민구 선생은 문온공<휘 구용(九容) 1338년(충숙왕7)~1384년(우왕10)>의 8세손인 의금부 도사공<휘 大涉(대섭) 1549년(명종4)~1594년(선조27)>의 외손자이십니다. 도사공께서는 1남2녀를 두셨는데, 위로부터 맏사위가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으신 문간공(文簡公)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 1563년(명종18)~1628년(인조6)> 선생으로 그의 맏이 이성구<李聖求 1584년(선조17)~1644년(인조22)>는 영의정을, 다음 이민구<李敏求 1589년(선조22)~1670(현종11)>는 예조참판을 하였습니다. 둘째사위는 ‘홍길동전’을 지으신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년(선조2)~1618년(광해10)>선생이며, 끝으로 아드님 한 분을 두셨는데 철원 부사공<휘 확(矱) 1572년(선조5)~1653년(효종4)>이십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국역성소부부고(惺所覆藁)를 읽던 중 교산 선생의 처가에 대한 표현(기록)과 그동안 안사연에서 올려주신 자료를 참고하면서 포천 안동김씨 종가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제척약재시음후(題惕若齋學吟後)’
당시에 익재(益齋)*선생과 우곡(愚谷)1)선생이 죽헌(竹軒)2) 정승과 함께 한 마을에 살아서 이들을 철동삼암(鐵洞三菴)3)이라고 했었다. 급암(及菴)은 죽헌의 사위이다.
죽헌이 세상을 떠나자 급암이 또 와서 살았다. 그래서 삼암(三菴)이라는 칭호가 끊어지지 않아서 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종주(宗主)로 모셨다.
* 익재(益齋) :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13)~1367년(공민왕16)
1)우곡(愚谷) : 정자후(鄭子厚), 鄭以吾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及菴 閔思平의 漢詩硏究/河政承>
2)죽헌(竹軒) : 김륜(金倫), 1277년(충렬왕3)~1348년(충목왕4)
3)철동(鐵洞) : 일명 수철동(水鐵洞)이다. 목은 이색이 지은 시에는 ‘철동’에 이제현의 집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초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수철동’에 이제현의 집이 있다고 하였다.
그*의 외손 김경지가(金敬之)가 급암(及菴)* 선생의 집에서 생장(生長)했다. 학문에 뜻을 두게 되자 또 급암에게서 배워서 익재(益齋)1), 우곡(愚谷)2)에게도 친히 가르침을 받았던 터이다.
* 그·급암(及菴) : 민사평(閔思平), 1295년(충렬왕21)~1359년공민왕8)
2. ‘대은암 서(大隱庵序)’
대은암은 명례방 수하동에 있는데, 침교(枕橋)가 계곡에 닿아 있고, 앞으로는 남산(南山)을 마주보고 있는데, 곧바로 국사당(國祀) 중록(中麓)으로 이어진다. 나라를 한양에 도읍으로 하여 정립할 즈음, 김방경의 6대손이며 김구용의 손자인 김맹헌이 직제학으로 있을 때 개성(松都)*에 있는 가옥의 자재를 뜯어다가 지었다. 첨정 김자양, 군수 김예생, 절도사 김윤종, 진사 김진기에 전해 내려와 이민구의 외할아버지 도사 김대섭(1549-1594)에 이르렀다.
집은 다시 전해져 이민구에게 있는데, 내옥(內屋經)은 선군 이수광(1563-1628) 시절에 수선하여 이름 짓기를 대은암이라 하였다. 객당(客堂)은 이민구(1589-1670)가 처음 지어 세운 것인데, 지금은 이민구의 외손 신필화(申弼華, ?-?, 현재 평산신씨대종회관이 있음)에게 돌아갔다.<후략>
* 개성(松都)의 서재동을 말한다.<고려의 황도 개경 p169/한국역사연구회/2002>
3. ‘망처 숙부인(淑夫人) 김씨(金氏)의 행장(行狀)’
부인의 성(姓)은 김씨(金氏)니 서울의 대성이다. 고려조 정승 방경(方慶)의 현손(玄孫)인 척약재(惕若齋) 구용(九容)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고, 벼슬이 삼사(三司)의 좌사(左使)에 이르렀다. 그 사대손(四代孫)인 윤종(胤宗)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였고, 그 아들 진기(震紀)가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별제(別提)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휘(諱) 대섭(大涉)을 낳으니 또한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 도사(都事)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관찰사(觀察使) 심공(沈公) 전(銓)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夫人)은 바로 그 둘째딸이다.
융경(隆慶) 신미년(선조 4, 1571)에 낳아, 나이 열다섯에 우리 집에 시집왔다.
4. ‘김생 정경(金生正卿)*에게 준 글’
<전략> 이제 한 사단을 얻어 절로 파직하게 되었으니, 가을비가 잠깐 걷히면, 마땅히 한 필 말을 타고 자네 집을 찾아보고 인하여 동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네. 이 때쯤 자네가 만약 별장에 있으면 지나는 길에 며칠을 묵으면서 고금을 극담키로 하세. 단지에 남은 단술로는 술 못하는 손을 대접할 수 있겠고, 석순(石筍)과 자라로는 술상 안주로 족할 것이니, 모름지기 바람 난간을 치우고 기다리게. 끝내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일세.<후략>
* 정경(正卿)은 김확의 호(號)이다.
5. 그리고 ’석주(石洲)에게 준 글‘
<전략> 나는 집을 떠난 이틀 만에 김 정경(金正卿)의 영평(永平) 별장에 닿으니 천학(泉壑)과 계산(溪山)의 아름다움은 지난해에 못지않았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대관(臺館)이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안에 들어가니 단술이 항아리에 가득하여 향의(香蟻 술독에 뜬 쌀을 벌레에 비유한 것)가 한창 굼실거리니 형을 초치해다가 큰 술잔으로 권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형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후략)
* 석주(石洲)는 권필의 호(號)다.
6. 채제공(蔡齊恭)의 ‘金水亭重修記(금수정중수기)’
“금수정이 김씨의 소유로 된 것이 여러 백년이 되었다. 김씨들은 여기에 묘를 쓰고, 여기를 전원으로 삼곤 한다.”
7. 단국대 매장문화연구소 의견*.
금번에 발굴 조사한 안동김씨 종가집터는 금수정의 서쪽에 형성된 평탄 대지에 1,050㎡(약 318평)의 면적에 솟을대문을 구비하고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된 가옥임이 확인되었다. 이는 현재도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의 증언과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규모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종가집이라 하기에는 건물의 규모와 대지면적 그리고 주변의 자연경관을 고려할 때 안동김씨 一門의 전원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후략>
* 포천 안동김씨 종가집터 발굴조사보고서 p80
8. 금수정에 대한 기록<포천의 암각문 p55/홍순석/1997>
① 금수정은 부사 김확이 복축하였다.<영평군읍지, 루정>
② 본조 양사언*이 별축하였다.<동국여지지, 루정>
③ 금수정은 봉래의 별업인데 김씨에게 돌아갔다.<동국명산기/성해응>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양사언이 세상을 마친 후 안동김씨의 소유가 되어 전해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자료를 검토해 볼 때 척약재(휘 구용)께서는 개성 수철동 외가댁에서 태어나 자라셨으며(生長), 서재동으로 옮겨 관직생활을 하신 것으로 추정되고, 조선이 개국되어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자 그 손자이신 직제학공(휘 맹헌)께서 개성 서재동 가옥의 자재를 뜯어다가 한양 명례방 수하동에 본가(서울의 대성)를 지으시어 맹헌-자양-예생-윤종-진기-대섭-확까지 7대를 사시다가 외손(이민구)의 외손(신필화)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천 안동김씨 종가는 위의 여러 기록으로 보아 봉래 양사언 선생의 소유였던 것을 양봉래 선생 졸년도<1585년(선조17)>을 전후하여 안동김씨 소유로 이전되어 명례방 수하동 본가와 별도로 전원 별장으로 사용되다가 철원 부사공(휘 확) 말년에 종가로 사용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 양사언(楊士彦) : 호가 봉래(蓬萊), 1517년(중종12)~1584년(선조17)
댓글목록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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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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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흩어진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시니 이해가 빠릅니다
저의 견해로 사족을 단다면
직제학공(孟獻)의 장인이신 李思儉의 묘와 안동김씨 포천 문중의 세거 유래와의 관계입니다 이사검의 장자 李徽의 누이가 직제학공의 配位 이시고 李徽의 처는 사육신의 한명인 李塏의 누이(열비)인데 왕조실록의 기록중에
이휘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역모 혐의로 죽게되고 이휘의 영평 전지를
공조판서 楊汀에게 주고 부인 열비도 아무개의 노비로 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유추해보면 이사검의 아들 이휘의 혐의로 멸문이 되어 묘소를 실전하고 외손인 안동김씨에서 외손봉사로 묘소를 수호해 온것이 아닌가합니다 또한 공조판서 楊汀이란분이 양봉래의 선조가 옳다면(미확인) 양사언의 금수정 소유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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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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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금수정의 주인에 대해서...
금수정의 소유기록의 제일 오랜 것은 김윤복 선조님이십니다.
봉래 양사언의 시중에서 [증금옹시]라는 시가 있는데
시 마지막에 금옹은 금수정 주인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금옹은 여러 자료에 의하면 김윤복선조님이 틀림 없으니
김윤복 선조님이 돌아가신후(자손이 없이) 양사언 소유로
있다가 김확선조님에게로 소유가 이어저 이후 현재까지
안동김씨문온공파종손가로 대대로 내려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