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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廣州)의 금석문(金石文) 5 - 정충량(鄭忠樑) 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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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6-01-05 07:23 조회1,55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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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량(鄭忠樑) 묘갈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군 장지동(墻枝洞)

건립연대 : 1776年(영조 52)

   찬    : 김안국(金安國)

   서    : 김희수(金希壽)

  추기   : 안정복(安鼎福)

  추서   : 신사원(申史源)

비규모(碑規模): 총고 218cm, 비고 139cm, 폭 62cm, 후 27cm

서자경(書字徑): 전자(篆字) 4.7cm, 음기(陰記)3.0cm

비재질(碑材質): 개석(蓋石) :  대리석,  비신(碑身) :  화상암,  대석(臺石) : 화강암


  1776년에 건립된 이 비는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팔작지붕이고 대석에는 문양이 없이 단조롭다.

  비의 마멸상태는 양호하며, 묘소에는 숙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쌍분. 상석·향로석·족석·혼유석·계체석·장명등·문인석·광주석이 있다. 그리고 1525년(중종 20)에 세운 비좌이수의 묘갈은 김안국(金安國)이 비문을 짓고,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쓴 것으로 이것이 구비(舊碑)이다. 묘역 입구에는 재실과 1998년에 세운 귀부이수의 신도비가 있다.

  정충량(1480~1523)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국간(國幹). 형조판서 광세(光世)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진사시를 거쳐 150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검열에 임용된 뒤 대교를 거쳐 1507년(중종 2) 봉교(奉敎)가 되었다. 이때 동료 김흠조(金欽祖)와 함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를 입은 사람의 신원(伸寃)과 사관(史官)의 직필(直筆)을 보장해줄 것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그 뒤 전적·공조좌랑·형조좌랑·장례원사의(장례원사의·황해도도사·병조정랑·공조정랑·예조정랑 등을 역임한 뒤, 1511년 헌납이 되었다. 그뒤 지평·장령·집의·승문원참교·내자시정(內資寺正) · 사섬시정(司贍寺正) · 사재감정을 역임하였다.

  1518년(중종 13)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으나,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탄핵을 받아 곧 이조참의로 옮겼다.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대간의 탄핵으로 공조참의로 피척(被斥)되어 수년 있었다.

 침착하고 행동이 곧으며, 말이 없고 근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의 잘못을 들추지 않고 담박(淡泊)하여 명리에 급급하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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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 탁본(62*139)

 

鄭公神道墓碣


通政大夫吏曹參議鄭公墓碣銘幷序

資憲大夫前知中樞府事兼全羅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 金安國 撰,

嘉善大夫行僉知中樞府事 金希壽 書.



정공신도묘갈


통정대부이조참의정굥묘갈명병서

자헌대부전지중추부사겸전라도관찰사병마수군절도사 김안국이 글을 짓고,

가선대부행첨지중추부사 김희수는 글씨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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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량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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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량 묘갈(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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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량 묘갈 부분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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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량 묘갈(구비)

 

<출전 : 광주금석문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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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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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일 감사하며 눈이 기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