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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04 (괴산 김성응,김용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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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14 08:11 조회2,2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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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04 (괴산 김성응,김용응)





안동김씨 족보 순절록에

도평의공(九鼎구정) 17대손인 金壽莢(김수협)은 義城 구봉산에서, 金壽聃(김수담)은 의성 황학산에서 義兵(의병)으로 倡義(창의)하여 1896년(고종33) 2월29일 순절하였고



안렴사공(士廉사렴) 14대손인 金俊(김준)은 大邱(대구)에서 의병대장으로 倡義(창의)하여 1910년(순종4) 6월15일 순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백범 金九 선생 외에

일제시대 항일독립운동을 하신 분으로



류관순, 조인원(조병옥 박사 부친)과 함께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학공파)金九應

철원 출신 (?부사공파) 金喆會

충북 청원 강내 궁현리의 (익원공파)金在衡 등이 있고





괴산군지 등에

충북 괴산 소수면 수리 출신의 金相翊(김상익)과 그의 4남 金聲應(김성응), 그리고 金鏞應(김용응)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 괴산군지 (1990)



25. 金相翊 (1852-1933)



본관은 안동으로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종조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직을 버리고 일가족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용화리 늘티 장바위로 낙향하였다.





당시 이곳 일대가 항일의병 양성의 본거지로 총책을 맡은 한봉수 의병대장과 손잡고 슬하에 장남 世應, 차남 漢應, 3남 貞應, 4남 聲應, 5남 洛應 등 5형제와 함께 온 가족이 피복제조 세탁과 무기제작 수리



그리고 고향인 수리에 추수해 놓은 수백석의 양곡을 육마로 운반하여 군량으로 보급하고 밤에는 독립운동 낮에는 왜병에 약탈등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수백석지기 재산을 소개하고 고향에 돌아와 호구지책에 급급하면서도 여생을 후회없이 마쳤다.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4남 聲應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이며 독립유공자라 하여 충청북도 초대 내무부장에 취임한 바 있었으며, 6.25동란때 이로 인하여 납치되어 피살당하였다.









26. 金鏞應 (1870-1945)



본관은 안동이며 괴산군 소수면 수리에서 출생하였고 장릉참봉을 지냈다.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국파군망하니 분연히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하에 국내에서 군자금 조달에 활약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한 사실이 있으며



8.15 광복후에 이승만 박사가 반민특위 위원장에 추천하여 취임케 하려 하였으나 마침 병환으로 취임치 못하였고, 그의 孫이 중죄를 범하였으나, 조부의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인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감형의 혜택을 받은 사실이 있다.

<문헌> 문중세진록









▣ 도정반세기 (1996, 이승우)



미군정청 출범



(1945년) 9월 14일 하지 중장의 군정 시정방침이 발표되고 19일에는 군정청이라는 공식 명칭이 선포되었다.



충북도청에서도 10월 하순쯤에 미 군정 체제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우선 군정 법령으로 도 기구를 개혁하고 11월초에 충청북도 군정청이 들어서게 되었다. 도 군정장관으로 머피 중령이 임명되고 부군정장관에는 더피 중령이 부임했다. < 중 략 >



1946년 2월 15일자로 한국인 도지사에 윤하영 목사가 선임되었다. 윤지사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부임 당시 57세 (1889년생) 였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수학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의주에서 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해방을 맞이하여 신의주 자치회 부회장에 추대돼 잠시 일하다가



월남후 미 군정청 여론조사과장,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다음 충북지사로 부임했던 출중한 종교지도자였다.



충북지사 재임 3년간의 행적이나 일화에 관하여는 오늘날까지도 심심찮게 화제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한결같이 인격과 덕망이 훌륭했던 청빈한 도백이었다는 찬사로 칭송받았던 분이다.







내무부장에는 애국지사이며 덕망가였던 金聲應 씨 (전 서울대 교수 金泰吉 박사의 선친) 가 보임되었는데, 그는 행정경력은 없었지만 일제시대에 항일운동가였으며 지방 주민들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고 있었던 덕망가였다. 그는 두루마기를 입고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근무했었다고 한다.



경찰부장에 선임된 박노태 씨와 김영규 씨도 마찬가지로 비전문적인 지방 유지였다. 이러한 인물 선발 방식은 다분히 미국적 민주주의의 정서와 맥락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 후 략 >









▣ 김영환 -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정중 -

▣ 김태환 -

▣ 김태헌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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