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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일기 44---서안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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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1-05 14:31 조회1,721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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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7일 (토) 여행 6일차

<여산, 장개석 은신처>

(12시간후) 아침9시 서안역에 도착했다. 북경의 유스호스텔에서 추위에 떨어 일행의 원성이 높았으므로 이번에는 호텔에 묵기로 했다. 기차역 맞은편에 새로 지은 깨끗한 호텔이 있어서 짐을 풀었다. 삐끼(호객용) 택시를 잡아 가격을 흥정한후 병마용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여산에 들렸다. 소설 ‘진시황’에 나오는 산이어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러나 진시황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대신에 1936년 12월,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1898-2001)이 장개석을 납치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한 2차 국공합작을 공산당과 맺게 한 ‘시안사변’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장개석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사진모델이 되고 있어서 나도 ‘장개석’과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시안사변으로 인하여 1934년 대장정을 끝내고 서안 위쪽 연안에 정착해 빈사상태에 빠져있던 공산당이 재기하게 되고, 결국에는 1949년 국민당의 장개석이 대만으로 달아나게 되는 분기점이 되는 큰 사건이었다. 장개석은 이때의 원한으로 그후 장학량을 체포해 대만으로 끌고가서 1992년까지 연금을 시키고 있다.

<진시황릉, 병마용>

진시황릉에 올라 넓은 평원을 조망하다가 내려와서 말마차를 하나 타고 진시황릉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병마용에 도착해서 현지 가이드를 하나 구해 대동하고 관람을 시작했다. 제1, 제2, 제3 병마용 전시관을 돌아 보았다. 기대되었던 큰 감동은 일지 않았지만, 기원전 200여년 전 진나라 시대의 살아있는 듯한 사람 얼굴과 표정, 복장, 그리고 말과 마차, 각종 무기를 생생하게 보는 듯했다. 구내 서점에 들렸는데 1974년 우물을 파다가 병마용을 처음 발견했다고 하는 노인 한분이 담뱃대를 물고 앉아서 병마용 책에 친필 사인을 해서 팔고 있어서 한권을 샀다. 사진은 찍지 못하게 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대서 시력이 문제가 생겨서 그리 한다고 했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온천휴양지 화청지, 시안사변의 현장>

돌아나오는 길에 화청지 라는 곳에 들렸다. 당나라 황실의 여름 휴양지였다. 호수가 있고, 별장건물이 가득한 곳인데,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온천도 있었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자주 찾아 목욕하고 즐기던 곳이라고 했다. 별장건물 가득한 곳에는 국민당 장개석 정부가 한때 사용하던 집무실, 침실, 비서실 등이 꾸며져 있었다. 만주군벌 장학량의 흔적과 공산당 주은래의 목욕처 표시도 보였다. 시안사변의 현장이었다. 뒷산을 올려다 보니 바로 오전에 들렸던 여산 기슭 아래였다.

<종루 근처 번화가>

서안 시내로 돌아와 종루, 고루 근처 번화가로 나가서 저녁을 먹고 밤거리를 거닐다 호텔로 돌아왔다.



12월 18일 (일) 여행 7일차

<서악 화산>

중원 대륙의 서악에 해당하는 화산에 오르기로 했다. 화산행 딱딱한 의자 기차를 타고 2시간을 가서 화산역에 도착한 다음, 택시를 잡아타고 화산 아래에 도착했다. 山內 이동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북봉에 올랐다. 공기는 차고 시원했으며 경관수려했다. 길이 매우 가팔라서 아슬아슬한 구간이 많았다. 때때로 바람도 거세어서 기다시피 하기도 했다. 서봉, 남봉까지는 못가고 중간에서 되돌아 나왔다. 화산역에서 차내 지저분한 기차를 타고 서안 시내로 돌아왔다.



12월 19일 (월) 여행 8일차

<대안탑, 삼장법사>

아침7시 동행자 K와 둘이서 시내 구경을 나갔다. 대안탑이라고 하는 곳에 갔다. 소설 <서유기>의 삼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다가 봉안했다고 하는 절이었다. 원래 절 이름이 대자은사로 중국 8대 불교 종파의 하나인 자은종 본찰이었다. 자은종은 일명 법상종 이라고 하는 안내문이 보였다. 우리 가문의 문영공(휘 순)의 아들 중에 3남 사순(斯順, 思順)은 자은종(慈惠宗, 慈恩宗) 대덕(大德, *고승) 이었는데 바로 이 종파임을 알게 되었다. 충북 보은에 있는 법주사가 법상종 계열이었고, 그 경내에 있는 법주사자정국존비 (法住寺慈淨國尊碑) 비문에는 문영공의 4남인 정간공(휘 영후)과 관련된 기록이 적혀 있기도 하다.

1327년(충숙왕14, 정묘) 12월 1일 아침, 법주사 자정국존이 입적하기 직전 서기를 방장실로 불러 主上에게 올릴 편지를 써서 직인과 함께 봉하고 상주목사인 김영후에게 부탁하여 전달하게 하고, 해가 포시에 이를 무렵 조용히 앉아 입적하였다. <1342 이숙기 찬 전원발 서 법주사자정국존비문>


<한무제릉 무릉, 당고종과 측천무후릉 건릉>

삐끼 택시와 가격흥정을 벌인후 함양 쪽으로 갔다. 한시간 가까이 가서 한무제릉에 도착했다. 한나라(기원전206~서기220) 황제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고 해외개척이 활발했던 무제(기원전87년 사망)가 안치된 곳이다. 고깔 모양의 봉분은 그 높이가 47미터에 달하며 한나라 황제의 능 가운데 가장 크다고 한다. 능 주위에 고위관료들의 묘가 여러개 있는데, 이는 한나라 시대 분묘 방식의 하나라고 한다. 그 중에 멀리 떨어진 약간 외진 곳에 비교적 크지 않은 야산 모양의 묘가 있는데, 한무제로부터 최초로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김일제의 묘였다.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관리인이 관심을 두지 않는지 묘 아래 주위에는 지저분한 쓰레기가 뒹굴고 있었고, 묘 아래 과수원에 표지석 하나가 서 있어 그나마 김일제의 묘임을 알수 있었다.

신라 문무왕릉비문을 근거로, 진시황의 후손으로 신라김씨의 선대로 보기도 하는 바로 그 김일제의 묘였다(월간지 ‘신동아’와 소설 ‘김씨의 뿌리’). 어느정도 근거가 있는지는 몰라도 김씨 라고 하는 말에 구미가 당겨서 묘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다가 내려왔다.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 장회태자묘에 들린다음,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였던 측천무후와 당고종이 함께 휴가를 즐기던 곳이자 그들의 릉이 있는 건릉에 도착했다. 길고도 높은 계단을 한참을 걸어 오른후, 나타난 평지를 또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건릉 입구에는 그 유명한 측천무후의 백비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측천무후가 워낙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폭정을 거듭하여 묘비에 어떻게 쓸지 몰라 백비로 세웠다고 하는 그 묘비이다. 입구에서 말을 한 마리씩 골라 타고 10여분 산길(능길)을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서둘러 하산(하능)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 양만춘과 힘을 겨루었던 당태종의 능인 소릉이 인근에 있었으나 시간부족으로 들리지 못하였다. 당태종은 당고종의 아버지이고, 측천무후는 본래 당태종의 후궁이었으나 당태종의 아들 당고종의 황후가 된후 결국에는 여황제가 되어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되어 중국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기고 있다.

까만 밤길을 달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하는 중국 황하문명의 한복판, 역사고도를 가르며 함양으로, 서안으로 돌아왔다. 딸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는지 가끔 콜록거리며 기운이 없어 했다.



12월 20일 (화) 여행 9일차

<역사박물관, 비림박물관>

아침7시 동행자 K와 둘이서 시내 구경을 나갔다. 역사박물관에 들어갔는데, 기원전 진나라 한나라 시대 유물이 가득했다. 기원전 유물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 실정과 비교해 보니 부럽기만 했다. 비림박물관에는 당나라 송나라 시대의 실제 비석이 가득했다. 송나라 구양순의 <황보군비> 실물도 보였다. 우리가문의 상서공(휘 효인) 선조님의 글씨체가 바로 이 구양순의 단정한 글씨체로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단체 여행객이 많이 보였다.

<종루, 명 성벽>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고 가족을 데리고 시내구경을 나갔다. 번화가에 나가서 종루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 보다가, 돈을 몇푼 내고 종을 세 번 쳐서 서안 시내를 깨워 보았다. 현재 서안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명나라 시대의 성벽이라고 하는데 많은 부분이 보존되어 있었다. 당나라 시대 장안성은 현재의 성벽보다 10배나 넓은 국제도시였다고 하고 현재 군데군데 유지를 발굴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의 성벽중 서문은 서역과의 비단거래를 하던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관문이자 출발지였다고 한다. 현재도 서문 안쪽은 이슬람(회족) 거주지역으로 이슬람사원, 이슬람시장 등이 열리고 있어서 찾아가 거닐어 보았다.

서안 일대는 중국 고대 황하문명의 중심지였다. 기원전의 주, 진, 한나라를 비롯하여, 남북조시대의 북조, 그리고 수, 당의 수도였다. 우리나라의 상고사, 삼국시대 역사와 얼마만한 관련이 있을까? 우리가문의 먼 신라시대 선조님들은 이곳 서안(장안)과 얼마나 밀접했고 왕래하였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현재 서안은 병마용 덕분으로 관광도시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도시 주변은 전체적으로 낙후되어 지저분한 편이고 교통이 매우 어지러웠다. 현재 지하철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었다.

밤7시 서안역에 가서 또다른 역사도시인 남경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탔다.

댓글목록

솔내영환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영환
작성일

  碑林에도 들리셨군요.  저도 여기서 탁본한점 얻어왔습니다.
시안은 참 볼 것이 많은 곳인데 여유 있으면 여러날 묶으면서
천천히 보고 싶더라구요. 사흘은 보냈는데도 아쉽기만 하더구뇽.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생생한 중국 영행기, 가 보지 않은 곳을 이 글로 많이 보고 있습니다.

김행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행순
작성일

  새해 건강하세요. 복많이 데리고 오세요.(*^_^*)
뵐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네요. 피곤하실텐데 이렇게 여행기까지 올려주시니
안사연 식구 모두 다같이 여행하는 기분입니다. 그동안 올려주신 글 다 읽지 못함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