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廣州)의 금석문(金石文) 6 - 김첨(金瞻) 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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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6-01-07 06:53 조회1,537회 댓글1건본문
김첨(金瞻) 묘갈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군 초월읍 지월리 산29-5
건립연대 : 1916年
찬 : 이원정(李元禎)
추 기 : 김진영(金晋永)
비규모(碑規模): 총고 175cm, 비고 119cm, 폭 41cm, 후 19cm
서자경(書字徑): 전자(篆字) 6.2cm, 음기(陰記)2.0cm
비재질(碑材質): 개석(蓋石) : 화강암, 비신(碑身) : 대리석, 대석(臺石) : 화강암
1916년에 건립된 이비는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팔작지붕이고, 대석은 문양이 없이 단조롭다.
비의 마멸상태는 양호하며, 묘소에는 숙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와 합장. 곡담·호석·상석·향로석·족석·혼유석·계체석·문인석·망주석이 있다.
김첨(1542~1584)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첨(子瞻), 호는 하당(荷塘)·남강(南岡)·동강(東岡). 전한(典翰) 홍도(弘度)의 아들이며,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아버지이다.
1576년(선조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9년 사가독석(賜暇讀書)하였다. 그해에 유성룡(柳成龍)등과 함께 이이(李珥)가 올린 상소에 대해 옳지 않다고 탄핵하였으며, 1581년(선조 14) 이조좌랑으로서 박근원(朴謹元)을 이조참판에 등용할 것을 주청하였다.
1582년 교리(校理)를 거쳐 고경명(高敬命) 대신 경상도재상경차관(慶尙道灾傷敬差官)으로 나아갔다. 이듬해 종사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뒤 이이를 탄핵하다가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좌천되었다.
후에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었다.
▲ 묘갈 탁본(19*119, 41*119)
[ 역 문 ]
증통정대부승정원도승지행중훈대부홍문관교리하당김공첨지묘.
증숙부인은진송씨부.
풍부한 재주를 지니고도 크게 배풀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로부터 어찌 한계가 있겠는냐마는, 근세(近世)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하당(荷塘) 김공(金公)을 애석하게 여긴다. 공은 목릉(穆陵 : 宣祖)때의 사람이었으니, 이제 그가 죽은 지가 거의 백년이 되었는데, 햇수가 더욱 멀어질수록 유적(遺跡)도 더욱 민몰(泯沒)되어, 돌아 보건데 아득하니, 후생(後生)들이 어찌 영구히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가 남긴 풍도(風道)와 다하지 못한 아름다운 향기를 고가(故家 : 여러 대를 벼슬이 떨어지지 않는 집안)에서 얻은 것이 오래되었으므로 기전(記傳 : 전기를 기록한 문서)의 개략(槪略)을 참고하여 서술(敍述)하는 바이다.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선계(先系)는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에서 나왔다. 고려말(高麗末)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장(萇), 서운관정(書雲觀正)을 역임한 수(綏),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질(晊),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자행(自行), 양주목사(楊洲牧使)를 지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된 숙연(叔演) 등이 있었으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호(號)가 유연재(悠然齋)이며, 휘가 희수(希壽)인 분에 이르렀는데, 이 분이 공의 증조(曾祖)이다. 조부(祖父)의 휘는 노(魯)이고,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을 역임하였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고, 호(號)가 동고(東皐)이며, 부자(父子)가 문학(文學)과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씀으로써 연이어 세상에 명성(名聲)이 알려졌다. 부친(父親)은 휘가 홍도(弘度)이고, 문장(文章)과 풍절(風節)이 있었다.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서 모두 장원(壯元)에 발탁되었고, 문신(文臣)들의 정시(廷試)와 동호대책(東湖對策)에서 모두 으뜸을 차지하였으며, 졸관(卒官)은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이었는데, 바른 도로써 간(諫)하다가 귀양을 당하여 북쪽의 변방(邊方)에서 마쳤다. 사림(司林 : 翰林)을 평론하는 자들이 김일손(金馹孫), 박은상(朴誾相)과 더불어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하자, 주박(周博)이 지나치다고 하였다. 부인은 평창이씨(平昌李氏) 충의위(忠義衛) 희철(希哲)의 딸로,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광(光)의 후손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공이 그 맏이이다.
가정(嘉靖) 임인년(1542, 중종 37)에 태어났다. 문학(文學)과 품행(品行)으로써 집안 대대로 벼슬을 하였으며, 만력(萬曆) 병자년(1576, 선조9)의 별시(別試)에 발탁되어 예원(藝院)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유연재(悠然齋)로부터 공에게 이르기까지 4대가 모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옥당양사 천관랑(玉堂兩司天官郞)을 역임하고 빈사(儐使)를 따라서 명나라 사신(使臣)과 시문(詩文)을 지어 서로 주고받을 적에 하곡(荷谷) 허봉(許葑), 하의(荷衣) 홍적(洪迪)과 함께 번갈아 가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화답(和答)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삼하(三荷)라고 일컬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국사(國事)를 제멋대로 한다고 상소(上疏)하여 논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러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좌천(左遷)되었다가 1년 만에 작고하였다. 이 해는 갑신년(1584) 9원 4일 이었으며, 춘추(春秋) 43세이다.
공은 용모(容貌)와 자태(姿態)가 빼어나고 아름다웠으며, 천성(天性)이 몹시 고매(高邁)하였고, 담연(澹然)하여 물욕(物慾)에 억매이는 바가 없었다. 계비(繼妃)를 섬김에 효경(孝敬)을 극진히 하였으며, 의로운 방법으로 자제들을 가르쳤다. 아우 판부사(判府事) 수(睟)가 선묘조(先廟朝)에 명신(名臣)이 되자,「사람들은 그 형에 그 아우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은진송씨(恩津宋氏) 판서(判書) 기수(麒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성립(成立)은 홍문정자(弘文正字)이고, 정립(正立)은 군수(郡守)이며, 두 딸은 판서(判書) 이경전(李慶全)과 사인(士人) 박돈(朴焞)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군수(郡守)는 3남을 두었는데, 진(振)은 관찰사(觀察使)이고, 식(拭)은 생원(生員)으로 정자(正字 : 김성립)의 양자(養子)가 되었고, 위(撝)는 감찰(監察)이며, 세 딸은 교관(敎官) 이제항(李齊沆), 군수 라반(羅襻), 관찰사(觀察使) 조성(趙石+星)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판서(判書)는 5남을 두었는데, 후(厚)는 이조좌랑(吏曹佐郞)이고, 구(久)는 한림(翰林)이고, 부(阜)는 진사(進士)이고, 유(卣)는 일찍 죽었고, 무(袤)는 참판(參判)이며, 딸은 대사헌(大司憲) 조수익(趙壽益)에게 출가하였다. 진(振)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대성(大成), 대헌(大獻), 대지(大智)이고, 사위는 유명천(柳命千), 김수번(金壽蕃), 채시귀(蔡時龜)이다. 식(拭)은 1남을 두었는데 대경(大敬)이다. 위(撝)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대뢰(大賚), 대석(大錫)이고, 사위는 홍경하(洪景河), 박현규(朴玄圭), 정태악(鄭泰岳)이다.
공의 휘(諱)는 첨(瞻)이요, 자(字)는 자첨(自瞻)이며, 하당(荷塘)은 바로 그의 자호(自號)이다. 광주(廣州) 초월(草月) 경수(鏡水)의 신좌(申坐) 언덕이 실로 의관(衣冠)이 묻힌 곳이다. 부인을 부장(附葬)하였다. 손자 때문에 추은(推恩)되어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밝게 드러난 안동김씨(安東金氏)여, 신라(新羅)에서 시작되고,
영가(永嘉 : 안동의 옛 이름)에서 번창하여
문인(聞人) 석사(碩士) 연속되어,
청사(靑史 : 歷史)에 빛나니
진실로 대가(大家)로다.
유연재(悠然齋)께서 중간에 분발하고,
동고공(東皐公)께서 가르침을 남기시어
선공(先公)들의 아름다움을 대대로 이어옴에
공께서 그 실마리를 펼치셨다네.
바른 말과 훌륭한 문장(文章)으로
도(道)를 온축(蘊蓄)하고 재기(才氣)를 지니셨으나
크게 베풀지 못하셨으니,
천운(天運)인가, 아니면 사람들 때문이었는가?
장수(長壽)를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나
남은 경사(慶事) 후손에게 돌아가
선세(先世)의 공덕(功德) 더욱더 원대(遠大)하리로다.
금상(今上) 3년(1677) 9월 일에
가선대부예조참판 광릉(廣陵) 이원정(李元禎)은 글을 짓다.
오호라, 공은 위대한 도량과 큰 학문(學文)으로 어린 나이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그가 정사(政事)하면서 남긴 훌륭한 공적(功績)과 집안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모범은 마땅히 전술(前述)해야 할 것이 있었으나, 아들 손자 증손자등 3세가 두 번 병화(兵禍)를 거치고, 거듭 집안의 화를 당하여 약간의 문헌(文獻)이 탕일(蕩逸)되어 증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귀암(歸巖) 이공(李公)이 겨우 기전(紀傳)의 개략(槪略)을 가지고 묘도(墓道)의 명(銘)을 서술(敍述)하였으니, 바로 금상[숙종] 3년인 전사년(1677)이다. 그 뒤에 햇수가 오래되었어도 아직까지 현각(顯刻)이 없는 것은 형편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세도(世道)가 한번 변하였으므로 만약에 곧바로 도모하지 않으면 훗날을 기다리기 어려울까 두려웠기 때문에 10세손 회익(會翊)과 11세손 귀선(龜善)이 결의하고 선창(先倡)하자, 중의(衆議)가 귀일되어 여러 대 동안 이로지 못했던 거사(擧事)를 하루아침에 이루었으니, 이 어찌 우리 종중(宗中)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공의 세대(世代)와의 거리가 300여 년인데, 자손이 비록 미약하나 문인(文人)과 명사(名士)들이 앞뒤로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대소(大小) 과거(科擧)에 장원(壯元)하여 높은 벼슬이 끊이지를 않고 조정(朝廷)에 통하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공이 남겨주신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무릇 우리 후손들이 유래한 것을 알아서 보호하고 지킬 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진(1916) 4월 일에
13세손 진영(晋永)은 추가하여 기록하다.
▲ 묘소 전경
▲ 묘갈
▲ 문인석
<출전 : 광주금석문대관>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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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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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홈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