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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洞樂國校金在玉女敎師忠魂塔參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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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6-01-07 21:13 조회1,823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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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樂國校金在玉女敎師忠魂塔參拜


隱石 申 鉉 豊

女師勇報千秋延(여사용보천추연) / 여교사의 용감한 제보는 천추에 뻗치고

要大功名忠塔傳(요대공명충탑전) / 훌륭한 공명은 충혼탑에 전하도다.

封鯨作觀吾將卒(봉경작관오장졸) / 포위작전을 한 우리 장졸은

神籌是見樂村展(신주시견락촌전) / 신기한 작전을 동락촌에 전개했네.

時沌難樹偉勳矣(시돈난수위훈의) / 어려운 때에 위훈을 세우기 힘든 일이나

世亂之期方決然(세란지기방결연) / 어지러운 세상에 참으로 결연하였네.

遺跡于今萬世赫(유적우금만세혁) / 남긴 발자취는 만세에 빛나고

斜陽沾淚丹心前(사양첨루단심전) / 석양에 눈물 적시니 나라지킨 단심 앞이라.


《출전 : 隱石漫吟 p33》

☞ 隱石 申鉉豊 先生은 韓國漢詩人協會 會員·陰城鄕校 掌議·平山申氏大宗中 代議有司·支派宗中會長이시다.


김재옥(金在玉)

[김재옥의 세계(世系)]

  자랑스런 여교사 김재옥은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상촌 출신으로 안동김씨 문온공파 음성공 후손입니다만 정작 문온공파세보(1992년 임신)에는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 향후의 기록 보존을 위하여 자세히 소개한다.

● 김재옥의 부친 완묵공의 생가쪽 세계.

1세(충렬공 방경)-2세(판서공 선)-3세(양간공 승택)-4세(평장사공 묘)-5세(문온공 구용)-6세(부사공 명리)-7세(직제학공 맹헌)-8세(참의공 자양)-9세(참판공 예생)-10세(병사공 윤종)-11세(음성공 진강)-12세(하양공 대화)-13세(계)-14세(영후)-15세(익서)-16세(시정 : 규서공의 장자)-17세(남신)-18세(찬원)-19세(호인)-20세(의신)-21세(형식)-22세(상준)-23세(완묵)-24세(재옥)

  충렬공 22세손 상준공은 순묵·시묵·완묵 3형제를 두셨는데 시묵공은 계족 상갑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로, 완묵공은 계족 숙부 상익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로 각각 입호되었습니다. 완묵공은 재옥 따님외 아들이 없어 맏형 순묵공의 차자 재혁을 다시 양자로 입호하였는데 상평리 남신계, 월정리 남술계 어디에도 김재옥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현재 완묵공의 손자는 돈회· 덕회와 손녀 회영이 있다.

● 완묵공의 양가쪽 세계.

1세(충렬공 방경)-2세(판서공 선)-3세(양간공 승택)-4세(평장사공 묘)-5세(문온공 구용)-6세(부사공 명리)-7세(직제학공 맹헌)-8세(참의공 자양)-9세(참판공 예생)-10세(병사공 윤종)-11세(음성공 진강)-12세(하양공 대화)-13세(계)-14세(영후)-15세(규서)-16세(시형:시정의 아우)-17세(남술)-18세(혜원)-19세(건인)-20세(의수)-21세(주식)-22세(상익)-23세(완묵)-24세(재옥)

  위의 사실은 문온공파세보(1992)를 바탕으로 김재옥의 생가쪽 8촌간이며 안동김씨대종회 고문이시며 음성공종회 명예회장(초대회장)이신 김재용님의 증언을 통하여 기록하였다.


[전 승 비]

○ 있는곳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1번지(동락초등학교 건너편 산밑)

○ 크 기 : 전체높이 400㎝

○ 만든때 : 서기 1973년 7월 7일

  이 비는 북괴가 불법 남침으로 일어난 6.25동란때 한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높이 26㎝의 계단을 5계단 쌓고 그 위에 높이 114㎝와 길이 215㎝의 돌과 높이 280㎝ 나비 82㎝의 돌을 두 개 얹어놓아 만든 비이다. 이 전투의 약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25 불법남침을 감행한 북괴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5일에는 음성읍 금왕읍 무극리까지 점령하였다. 이 무도한 적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제6사단장 김종오(金鍾五) 대령은 예하 제7연대장 임부택(林富澤) 중령에게 7월 6일 05시를 기하여 공격토록 명령했다. 이때 제7연대 제 1, 2, 3대대는 춘천에서 후퇴하여 음성군 금왕읍 백야리 및 가엽산 줄기인 644고지 등에서 매복 중이었으며 명령을 받은 임부택 제7연대장은 계획된 시간에 각각 공격을 개시했다. 장시간의 격전 끝에 제1대대는 동일 11시에 무극리를 탈환했으나 부대를 재편성할 사이도 없이 전진중 14시 무극리 북방 2㎞ 지점에서 적 예비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음성으로 철수하였다. 적은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월 7일 12시 주덕면 신양리를 거쳐 충주방면으로 남진 중에 있었으며 우리 제7연대 1, 2대대는 음성으로부터 다시 출발 무극리에 돌입했으나 적은 철수하고 없었으므로 접전없이 점령하였다. 이에 1대대는 무극리 음성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우측의 644고지를 재점령하여 음성 충주간 중간 지대에서 적에 대비했다. 644고지에서 적진을 관측하던 제2대대장 김종수(金鍾洙) 소령은 동락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적군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교정에는 수십 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동락국민학교 김재옥(金在玉) 여교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자신은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에게 적 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의 배치 상황을 상세히 제보했다. 김소령은 당시 644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나 김재옥 여교사의 제보에 따라 기습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 17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하고 제 6, 7중대로 하여금 적의 퇴로를 차단케 하였으며 각 중대는 공격지점으로 이동했다. 김재옥 여교사로부터 무극리 일대는 국군이 철수하고 없다는 정보를 믿고 적은 안심하고 석식 준비를 하였고 경비는 소홀히 하였다. 정각 17시에 제5중대가 먼저 적에게 집중 사격을 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적은 대피하기에 어쩔줄을 몰랐고 김종수 소령은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用寬) 중위로 하여금 제1탄을 발포케하니 운동장에 방열된 적의 포진지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하여 적의 포는 순식간에 괴멸하였다. 다음날 미명에 실시된 아군의 소탕전으로 적은 완전 섬멸되었다. 이 전투의 전과는 차량 60대, 장갑차 3대, 기관총 47정, 포 12문, 박격포 35문, 소총 1000여정을 노획하거나 파괴하였다. 이승만 전대통령께서는 제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은전을 내렸으며 노획된 무기는 대전에서 전시되었고 각종 무기 1점씩은 UN본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의 증거품으로 제시했다.

《비 문》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그렇게도 처참한 피를 뿌린 1950년 6.25동란 동족상잔의 비극이야말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슬픈 일이었다. 그러기에 북한 공산군들의 반역적인 남한 침공 때 우리는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그들과 싸우면서도 동포의 양심으로 울며 싸웠던 것이다. 마침내 비인간적이요 반민족적인 그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었던바 가장 통쾌했던 것은 무극리 전투였다. 우리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7월 6일 치열한 전투 끝에 무극리를 탈환하고 그대로 북진하다가 역습을 받아 음성 쪽으로 후퇴 제2대대도 진천으로 향하다. 다시 음성으로 귀환 제3대대는 용원리 방면으로 철수했다. 7월 7일 공산군 제15사단 제48연대 병력이 장호원으로부터 충주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옴으로 우리 제1대대는 무극리와 음성사이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644고지를 점령했었다. 이때 공산군들은 동락국민학교에 전 병력을 집결 수십대 차량과 일개 대대의 포까지 설치했으나 이를 발견한 제2대대는 병력 겨우 4백명 연대의 지휘를 받을 길조차 없으므로 주저하다가 절호한 기회이므로 공격을 결정했었다. 마침내 포화는 터졌다. 7월 7일 정각 17시였다. 제6중대의 집중 사격은 문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다시 이어 우리 제8중대의 포탄이 또 떨어졌다. 너무나 정확하게 적의 포진지 한복판에 명중되어 포대는 완전 파괴되고 시체들이 공중에 떠올랐으며 도망가는 적들마저 우리들의 포위망에 섬멸되어 최후의 개가를 부르니 8일 8시였다.

  이것이 통쾌한 승첩을 거둔 그날의 전투였거니와 굳이 그 사실을 새겨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뒤에 오는 자손들에게 피흘린 일을 기억케 하고 조국 수호와 자유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민족의 염원인 통일 성업을 이루게 하고자 함이니 누구나 여기 오거든 옷깃 여미고 묵념을 올리며 나라 사랑할 생각을 거듭 다짐합시다.

                                                                                         1973년 7월 7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고

                                                                                 충청북도지사 태종학 세움

《출전 : 충주 중원지/충주시 중원군/1985, pp1322∼1324》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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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아주 어렸을 적에 전쟁과 여교사란 영화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여고사에는 엄앵란이, 한 소대장으로 신성일이, 대대장으로 박암이 등장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때 그 영화, 이젠 고전이지만 그 테이프를 우리 대종회 서고에 보관해두어야 할 작품은 아닐런지요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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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임권택 감독 작품입니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아직 찾지를 못하였고
혹 영상자료 박물관에나 있을런지 모른다고 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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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신성일이 아니고 김진규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