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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19)上洛伯(金신) 배위 義惠宅主 文化柳氏-제학공(김익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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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09 13:06 조회1,55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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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선,흔[순]

 

[영돈]영휘,사순,영후,女정책, 백이정, 별리가불화

 

[신(실사변+眞)], 女吳原敬, 尹湜

 

상락백공(김신)의 외아드님이 제학공파조이신  金益達이십니다.

 

 

상락백공(김신)의 배위는 義惠宅主 文化柳氏입니다.

 

아버지는 밀직우부대언을 지낸 柳甫發, 어머니는 원주원씨로서 중찬 원부의 손자인 元善之(평리공)의 따님이시며,

조부는 柳仁琦(溫靖公)]할머니는 海陽君夫人 金氏로서 중찬을 지낸 광절공 金之淑의 따님이며, 증조는 柳陞(貞愼公)

고조는 충렬공(김방경)의 무고때마다 구해준 柳璥(文正公)이다.

친정형제는 지후를 지낸 柳繼高, 尙書 文化君 柳繼祖이며

류계고의 아들이 水使 柳滋로서 수사공파조이며, 류계조의 아들 한성부윤을 지낸 柳信으로 부윤공파조, 우의정을 지낸

문성부원군 忠景公 柳亮으로 충경공파조이다.

 

의혜택주할머님의 친정가계 문화류씨를 살펴봅니다.

 

시조 柳車達-柳孝金-柳金奐-柳盧一-柳寶春-柳寵-柳公權(文簡公1132(인종 10)∼1196(명종 26)-柳澤(僕射公)

 

-柳璥(文正公1211(희종 7)∼1289(충렬왕 15)-柳陞(貞愼公)-1.柳仁修 2.柳仁全 [3.柳仁琦(溫靖公)]

 

-柳甫發-繼高, 繼祖(1333(충숙왕 복위 2)∼1374(우왕 즉위년, 女 안동인 金신

 

 

유공권(柳公權)
1132(인종 10)∼1196(명종 26). 고려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儒州). 자는 정평(正平).
태조 때의 공신인 차달(車達)의 6세손이다.
시문에 능하였고,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과거에 급제하여 청주목(淸州牧)의 서기(書記)로 3년간 있다가 익양부녹사(翼陽府錄事)가 되었고, 명종초에 내시(內侍)로 들어가 사문박사(四門博士)·직사관(直史館)을 거쳐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되었다.
1186년(명종 16)에 예빈경(禮賓卿)으로 금나라에 가서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였는데, 이때 금나라 사람들로부터 예절을 잘 안다고 칭찬을 받았다. 귀국 후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뒤이어 우산기상시 한림학사(右散騎常侍翰林學士)가 되었고, 1192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 29명을 뽑았으며, 지주사(知奏事)를 거쳐 1195년에 동지추밀사(同知樞密事)에 올랐다.
이듬해 그가 병이 나서 친척들이 약을 지어 바치자,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다고 하면서 물리치고 마시지 않았다.
병이 심하여지자 정당문학 참지정사 판예부사(正堂文學參知政事判禮部事)에 특임되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관직에 있을 때에는 부지런하였다고 한다. 《동문선》에 시가 남아 있고, 《해동필원 海東筆苑》에 필적이 전하며, 용인 서봉사(瑞峯寺)에 있는 현오선사비문(玄悟禪師碑文)도 그의 글씨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경(柳璥)
1211(희종 7)∼1289(충렬왕 15). 고려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천년(天年) 또는 장지(藏之). 정당문학(正堂文學) 공권(公權)의 손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고종 때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유천우(兪千遇)와 함께 오랫동안 정방(政房)에 있으면서 특히 최항(崔沆)의 신임을 받았다.
최항이 죽고 그 아들 최의(崔竩)가 뒤를 이어 국정을 한손에 쥐고 행패를 부리는 등 민심을 잃게 되자, 1258년(고종 45) 별장 김준(金俊) 등과 모의하여 최의를 죽이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였다. 최씨무신정권을 타도한 공으로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이 되어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겸임하고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에 봉하여졌으며, 그의 고을 유주(儒州:황해도 文化)는 감무현(監務縣)에서 영현(令縣)으로 승격되었다.
이때부터 정방을 편전(便殿)에 두고 전주(銓注)를 장악하여 국가의 기무(機務)를 결재하였다.
그뒤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는데, 1259년 고종이 그의 집에서 병사하였다.
1262년(원종 3)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고, 이듬해 수태부 참지정사 태자태보(守太傅參知政事太子太保)를 거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1269년 대사성 김구(金坵) 등에게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이고 공신이 된 사실을 비난하였다가 이를 엿들은 환관 김경(金鏡)의 고발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는데, 얼마 뒤 강화로 이배되었다.
1270년 삼별초(三別抄)가 봉기하였을 때 강화도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수중에 들어 있었으나 탈출하여 돌아오니, 그들과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던 왕이 크게 기뻐하여 후대하고 평장사 판병부사(平章事判兵部事)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파직되어 애도(哀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1276년(충렬왕 2) 첨의시랑 찬성사 감수국사 판판도사사(僉議侍郎贊成事監修國史判版圖司事)가 되었는데, 이때 두번이나 무고를 당하였던 김방경(金方慶)을 구하였다.
1278년 찬성사 판전리사사(贊成事判典理司事)에 올라 은퇴할 것을 청하여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장군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上將軍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 말과 웃음이 흡족하고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뛰어나 원부(元傅)·허공(許珙) 등이 모두 그의 추천받은 인물이다. 다만, 재물을 많이 모아 한때 삼한(三韓)의 거부로 불리는 등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문장에 뛰어나 신종·희종·강종·고종 등 4대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도합 4회에 걸쳐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이존비(李尊庇)·안향(安珦)·안전(安戩)·이혼(李混) 등이 모두 문생(門生)이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유계조(柳繼祖)
1333(충숙왕 복위 2)∼1374(우왕 즉위년). 고려 공민왕 때의 공신. 본관은 문화(文化).
할아버지는 대사헌 밀직부사 인기(仁琦)이며, 아버지는 정순대부 우부대언 지판도사사(正順大夫右副代言知版圖司事) 보발(甫發)이다. 외할아버지는 첨의(僉議) 원선지(元善之)이며, 부인은 전리판서(典理版書) 구영검(具榮儉)의 딸이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하자 좌승(左丞)으로 박천(博川)에 가서 적을 물리쳤고, 이듬해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자 공주도병마사로 공격하여 승리한 공으로 기해격주홍적1등공신(己亥擊走紅賊一等功臣)과 안사1등도형벽상공신(安社一等圖形壁上功臣)에 책훈되었다.
또한, 1363년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우부대언으로 적을 평정한 공으로 흥왕토적1등공신(興王討賊一等功臣)에 서훈되었으며, 좌대언·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조선에 와서는 공신·재상의 부모를 추증, 봉작하는 제도에 따라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화군(文化君)에 봉하여졌다.

 

유량(柳亮)
1355(공민왕 5)∼1416(태종 16).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명중(明仲). 고려 밀직사(密直使) 계조(繼祖)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典儀副令)을 거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고, 1390년(공양왕 2)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392년 이조전서(吏曹典書)로 있을 때, 조선왕조 개국에 협력한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397년(태조 6)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부임하여 다음해 왜구가 침입하여오자 이를 맞아 싸워 크게 무찔렀다.
형세가 불리해진 왜구들이 항복을 청해오자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일거에 섬멸하려는 전략을 세웠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어 왜구들이 도망쳐버렸다. 그 죄로 합산(合山)에 유배되었다가 1398년 나주로 이치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뒤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있다가 1400년(정종 2)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에 책록되었다.
1402년 문성군(文城君)으로 봉작되었고, 그해 동북면순문사(東北面巡問使)가 되어 변방을 살피고 돌아왔다.
1404년에 대사헌에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예문관대제학도 겸하였다.
그뒤 판한성부사·이조판서를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올랐으며,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413년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가 1415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다. 조선왕조 창건에서 제도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명신 중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원선지(元善之)
1288(충렬왕 14)∼1337(충숙왕 복위 6). 고려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중찬(中贊) 부(傅)의 손자이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경(卿)의 아들이다.
폐신(嬖臣)인 아버지의 추천으로 7세에 서면도감판관(西面都監判官)이 되고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을 거쳐 1311년(충선왕 3)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에게 불려가 우부대언 지삼사사(右副代言知三司事)가 되었으며, 또 아버지의 직을 물려받아 소신교위 정동도진무(昭信校尉征東都鎭撫)가 되었다.
이때 충선왕이 연경(燕京)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국에 돌아갈 뜻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김심(金深)과 함께 왕을 모시고 귀국하려고 모의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려 파직당하고 귀국하였다.
충숙왕 즉위초에 지면주사(知沔州事)로 나갔다가,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에 이어 대사헌 판전의시사(大司憲判典儀寺事)가 되었다.
1320년(충숙왕 7) 환관 빠이엔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략으로 충선왕이 토번(吐蕃:西藏)으로 유배되고, 충숙왕이 원나라에 머물자 고려인이 거의 조적(曺頔)의 당에 들었으나 홀로 의리를 버리지 않았으므로 모두 이를 칭찬하였다.
1324년 밀직부사가 되고, 이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러 사임하였다. 다시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가 되었으나 물러나 한거하였다.
거문고와 바둑에 능하였고, 약제(藥劑)에 조예가 깊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다.

 

김지숙(金之淑)
1237(고종 24)∼1310(충선왕 2). 고려의 문신. 화평(化平府:지금의 光州)출신.
참지정사(參知政事) 연(鍊)의 아들이다. 인근(仁瑾)·인연(仁沇)의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는데, 가세가 어려워 두 딸은 여승이 되었다.
원종 때 장군이 되어 강화도에서 난을 일으킨 삼별초를 토벌하다가 포위되어 탈출할 방법이 없자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를 따라 표류하다가 끝내 붙들려 진도로 압송되었다.
마침 승화후 온(承化侯溫)의 주선으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뒤에 탈출하여 적의 정세를 관군에게 알림으로써 결국 삼별초를 토벌하게 되었다.
이 공로로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랐으며, 1290년(충렬왕 16)에 전라도도지휘사(全羅道都指揮使)를 거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그뒤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1295년에는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296년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1300년 도첨의찬성사 판감찰사사(都僉議贊成事判監察司事), 1308년(충선왕 즉위년) 동지광정원사 참지기무(同知光政院事參知機務)가 되었다.
이때 원나라의 활리길사(闊里吉思)가 행성평장(行省平章)으로 와서 모든 노비 중 그 어버이의 한쪽이 양인인 자는 양민으로 하려 하자, 옛 법을 변경할 수 없다고 하여 이를 중지하게 하였다.
1310년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광정(匡正)이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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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제학공선조님의 모친이신 문화유씨 할머니에 대한 기록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연재한 외가댁 관련 자료들은 다시 편집하여 본 홈에 넣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