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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김방경(조선왕조실록에서)-11-김방경에 버금갈만한 장수래야 일본의 침략을 막을수 있다.-조헌의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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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20 10:08 조회1,6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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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025 24/03/01 (정유) 008 / 전 교수 조헌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아뢴 소장과 첩황②

 

또 첩황(貼黃)이 있었는데 그 대략에,

“기밀(機密)스러운 일은 비밀히 하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에 능란한 적사(賊使)가 동평관(東平館)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으니 신의 봉장(封章)이 또한 늦은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의 상소문을 머물러 두시고 기책(機策)을 은밀히 조처하시되 동평관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득(購得)할 수 없게 할 것은 물론 신의 이름을 조보(朝報)에 싣지 않게 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갔으나 비답(批答)이 내리지 않았다. 또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번후(藩侯)로서 경급(警急)한 일이 있으면 빨리 간서(簡書)를 보내지 않을 수 없고 필부(匹夫)로서 임금을 현혹시키는 일이 있으면 목을 베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멀리서 중국을 삼키려는 근심스런 소식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분노를 견딜 수 없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달려와서 품은 마음을 피눈물을 흘리며 아룀으로써 성주(聖主)께서 머지 않아 깨우칠 것을 기대했었습니다. 위로 중국 조정에 죄책을 받지 않고 안으로는 종묘(宗廟)에 수치스러움을 끼치지 않고 밖으로는 추로(醜虜)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고 아래로는 생령(生靈)들에게 화(禍)를 끼치게 하지 않는다면 평생 글을 읽은 힘으로 한 번 중대한 강상을 부지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임금이 고구려·백제가 당한 걱정을 면할 수 있게 되고 신의 노모가 강회(江淮)의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다. 진실로 이렇게만 된다면 어떠한 혹독한 형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만 봉장(封章)을 올린 지 3일이 되었어도 아직껏 분부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성주께서 관용(寬容)하는 마음에서 신을 죄주려 하지 않으시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나라를 구원하고 노모를 살리는 계책이 쓰여지는 것은 단지 오늘날에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방에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멀리서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중국의 죄책(罪責)이 일단 있게 되면 아무리 걱정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신은 7폭의 소장을 머물러 둠으로써 명주(明主)께서 한번 살펴 뉘우칠 때가 있기를 바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교사스런 오랑캐는 반복이 무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것인데 금(金)과 원(元)의 사신 같은 자들을 후대하면서 남쪽에서 침구를 당하는 수모가 없게 되리라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송(宋)나라 때 진회(秦檜)·가사도(賈似道)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인 것입니다. 수길은 자기의 임금을 주저없이 풀베듯 하였는데 이웃 나라라 하여 엿보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금을 살펴보아도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신이 기필코 명장(名將)을 시켜 은밀히 동남쪽을 방비하게 하라고 청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구국(琉球國)이 보내온 글에 우리 때문에 일본을 섬긴다고 했다는데 이 말이 발설된 지가 오래이니, 중국 조정에서 듣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소정방과 이적(李勣)의 군대가 동방으로 출동한 것은 단지 백제·고구려가 신라의 입공로(入貢路)를 단절시키려 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교사스런 오랑캐가 이런 소문을 천하에 퍼뜨릴 적에 반드시 우리 나라가 빈복(賓服)하였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중국에 대해 받은 은혜가 작지 않으니 저들의 패만스런 글을 보았으면 의리상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주문하는 것이 당연한 조처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일을 지연시키면서 절사(節使)의 행차에 순부(順付)하려 한다면 인마(人馬)가 너무 번잡스러운 것은 물론 봄 전에 부경(赴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교사스런 오랑캐가 강절(江浙) 지방에 보낸 격문(檄文)은 반드시 반개월도 못되어 북쪽으로 보고될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씨(史氏)의 기록을 어떻게 씻어내어 밝힐 수 있겠으며, 장영(張寧)682) 의 문책을 어떻게 모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의 은애(恩愛)가 바야흐로 깊기는 하지만 중국 황제의 한번의 노여움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건주위(建州衛)를 토멸시키게 한 것도 바로 황조(皇朝)의 가법(家法)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힘을 알지 못하고서 기필코 우리에게 일본을 토멸시키라고 한다면 우리의 잔약한 병력으로는 스스로의 수비에도 겨를이 없는데 무슨 남은 힘이 있어 동정(東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홍다구(洪茶丘)의 8만 병력과 김방경(金方慶)이 규합한 병력으로도 동쪽 바다에서 뜻을 얻지 못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반절이 넘었었습니다. 더구나 중국에서 홍다구와 같은 병력을 출동시키지도 않고 우리 나라에서는 또 김방경에 버금갈 만한 장수가 없다면 감히 동정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중국 조정의 노여움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평소 사랑하던 아들도 조금만 아비의 뜻을 거스르면 아비의 노여움이 반드시 깊은 것입니다. 이럴 시기에 소정방·이적과 같은 문책의 군대가 나온다면 일본을 의지해서 물리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소정방·이적의 군대가 백제·고구려를 다 소탕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10만여 호(戶)를 강회(江淮)로 옮길 수가 있었으니, 수륙(水陸) 머나먼 길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어찌 다 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에게는 연로하고 병이 극심한 계모(繼母) 한 분이 계시는데 이 분을 업고 피해갈 땅이 없습니다. 적사(賊使)가 좋은 말을 할 때에는 성주(聖主)께서 스스로 태연하게 걱정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계십니다만, 기회를 포착하여 돌발하게 되면 그때는 온 나라의 국력을 다 동원하여 동쪽으로 나아가야 할 터인데 서방에서 밀려오는 문죄의 군사를 다시 무슨 힘으로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성역(聖域)에서 농사지으며 병든 노모를 봉양하면서 강회를 옮겨가는 고통스런 행렬에서 면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그래서 이미 한번 아뢰었습니다만 재삼 번독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주께서는 신의 상소 1통을 보관하고 계시다가 일이 닥쳐왔을 때에 다시 살펴주신다면 신이 노모를 위하고 국가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농사를 그만두더라도 오활하게 되지 않겠습니다.

신이 더욱 마음아픈 것은 이번에 올라올 적에 적사(賊使)가 경유했던 두 도(道)를 거쳐 오면서 저 왜노들이 마치 중국 사신처럼 멋대로 무시하였으므로 우리의 관리(官吏)들은 모두 기운이 저상되어 온 도내의 힘을 다 기울여 그들을 공억(供億)하느라 방비하는 일은 전연 잊었다는 말을 세세히 들은 것입니다. 이 사신의 왕래만 가지고도 뒷날 대패할 것을 점칠 수가 있는데 조정에는 호전(胡銓)과 같은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고 초야에는 진동(陳東)과 같은 의논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황이옥(黃李沃)의 상소문이 서울에서 나온 일은 있습니다만, 앞으로 전패(顚沛)되어 떠돌게 될 때 분발하여 급한 일에 달려갈 사람이 없게 된다면 성명(聖明)께서 의지할 수 있는 문천상(文天祥)·육수부(陸秀夫) 같은 사람이 끝내 누구이겠습니까. 한(漢)나라 말기에 제현(諸賢)을 당고(黨錮)시켜 기필코 살해하였고 당(唐)나라가 망할 적에는 청류(淸流)들을 기필코 황하(黃河)에 던졌는데, 이는 성세(聖世)에서는 듣기를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정몽주(鄭夢周)는 전조(前朝)683) 가 위의(危疑)스러울 즈음에도 오히려 혐의를 피하지 않고 널리 국사(國士)를 맞아들여 담론(談論)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詩)에,

$$$자리엔 손님 늘 가득하고

$$$술잔에 술이 비지 않누나

라고 하였는데, 일을 맡은 신하가 문을 닫고 혼자 앉아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지 않고 국가를 부지시킨 경우는 예전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은밀히 고굉(股肱)의 신하에 대한 유무를 살피고 의심스런 단서를 물리쳐 버림으로써 참적(讒賊)의 입을 막아버린다면 사직(社稷)에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아, 종군(終軍)684) 은 약관의 나이에 적을 묶어올 포승줄을 요구했고 모수(毛遂)685) 는 자천(自薦)하여 특이한 일을 해냈으니, 이들이 어찌 전혀 염치를 잊은 자들이겠습니까. 단지 상하가 전도되고 종국(宗國)이 망하여 의관(衣冠)과 골육(骨肉)이 모두 오랑캐에게 함몰될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서 기력(氣力)을 내어 몇 해 동안의 편안함을 보전하게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진(秦)나라의 간첩에게 금(金)을 받고 제왕(齊王)에게 진을 섬기라고 권했기 때문에 공전(攻戰)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임치(臨淄)가 갑자기 진나라의 땅이 되게 만들어서 송백(松栢)의 노래가 만고의 사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외방에서 살고 있으므로 관리로서 해야 할 걱정은 없습니다만, 사면으로 적의 공격을 받을 적에는 강혁(江革)686) 처럼 노모를 업고 난을 피하려 하나 피할 곳이 없을까 매우 두렵습니다. 변(變)을 듣고 나서 십일 동안을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일이 있기 전에 미리 대비하라는 경계를 가지고 완전무결한 계책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들이 꺼지고 기둥이 불타는 화(禍)가 닥쳤을 때 다행히 천신(賤臣)이 멀리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가난한 서생(書生)으로서 서울에 온 지 여러 날이 되어 낭탁(囊槖)이 이미 비었으므로 동방삭(東方朔)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영원히 하직할까 합니다. 성명(聖明)을 우러러 보건대 황공하고 격절(激切)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7조(條)의 내용을 붙여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1. 강적(强賊)을 이간시키는 일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귀부(歸附)하기 전에 해야 하는데 반드시 현소(玄蘇)·평의지(平義智)의 목을 자르고 천하에 선포하여 천하 사람들과 함께 소리를 같이하여 격문을 보내되 허점을 노려 수도(首都)를 공격한다고 하면 이러한 말이 사방에서 동쪽으로 보고되어 수길(秀吉)도 감히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 나라를 엿볼 계책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2. 변란에 대해 황조(皇朝)에 아뢰는 표문(表文)의 초안, 3. 유구 국왕에게 전하는 국서(國書)의 초안, 4. 일본국 유민(遺民)의 부로(父老)들에 보내어 효유하는 편지의 초안, 5. 대마도의 부로들에게 보내어 효유하는 글의 초안, 6. 적사(賊使)를 참하는 데 대한 죄목(罪目)의 초안, 7. 영남 호남의 비왜책(備倭策)에 대한 초안이었다.

조헌(趙憲)이 궐하(闕下)에 엎드려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기를 기다렸으나 내리지 않자 머리를 돌에다 찧어 피가 얼굴에 가득하여 보는 사람들도 안색이 위축되었다. 그래도 비답이 내리지 않자 이 상소를 봉진(封進)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받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조헌이 상소를 진달했는데도 정원에서 받지 않고 있는데 상소의 내용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언로가 막히는 단서가 있게 되니 색승지(色承旨)를 파직시켜소서.”

하니, 상이 추고(推考)만 하도록 윤허하였다. 조헌은 통곡하면서 물러갔다.【정유 왜란 때 우리 나라의 어떤 사인(士人)이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들어가서 민간(民間)으로 다니며 구걸하다가 한 사람의 노승(老僧)을 만났는데 그의 말이 ‘수길은 조선에 대해서는 한때의 적이지만 일본에 있어서는 만세의 적이다. 그때에 한두 명의 의사(義士)가 있어 격문을 보내고 의에 입각하여 거사(擧事)하였다면 수길로 인한 재앙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조헌의 비왜책(備倭策)에서 천거된 10여 명은 평상시에는 모두 이름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기용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김시민(金時敏)·조웅(趙熊) 등은 더욱 두드러져 칭송할 만한 사람이었다.

조헌이 옥천(沃川)으로 돌아가 아들 조완도(趙完堵)를 시켜 평안 감사 권징(權徵)과 연안 부사(延安府使) 신각(申恪)에게 글을 보내어 참호를 깊이 파고 성을 완전히 수리하여 전수(戰守)에 대한 준비를 미리 수거(修擧)하도록 권하였는데, 권징은 그 글을 보고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황해도·평안도에 어찌 왜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돌아가 그대 부친에게 부디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하라.’ 하였다. 신각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기계(器械)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城內)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李廷馣)이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이 사전에 준비한 공로를 추모하여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

【원전】 25 집 602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왜(倭) / *역사-고사(故事) / *군사(軍事) / *인사(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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