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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탐방 보조자료-삼별초 항쟁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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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1-22 23:24 조회1,6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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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 항쟁 연표


강화군삼별초연구회



1270년(원종11)

 5월 23일(임술) 재상들이 회의를 열어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결정하고, 옮겨갈 기한을 정하여 방을 써 붙여 공시함. 삼별초가 딴 마음을 품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서 부(府)의 창고를 부숨.

     25일(갑자) 왕이 정자여(鄭子璵)를 강화도로 보내 삼별초를 잘 타이르도록 함.

     29일(무진) 왕이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강화도로 보내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고 해산시킴.

 

 6월  1일(기사) 배중손(裵仲孫), 노영희(盧永禧) 등이 삼별초 군대를 인솔하고 항쟁함. 승화후 온(承化候溫)을 왕으로 삼고, 관청부서를 설치하여 유존혁(劉存奕)과 이신손(李信孫)을 좌우승선에 임명함. 배중손은 ‘몽고군이 쳐들어와서 백성들을 살륙하니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다 격구장으로 모이라’고 구호를 외치자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기고를 열고 무장함. 이미 협력하지 않은 이백기(李白起)를 죽임.

                개경으로 도망가던 현문혁(玄文奕)의 처와 삼별초의 제의를 거부한 정문감(鄭文鑑) 등은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고, 채정(蔡楨), 김연(金鍊), 강지소(姜之卲) 등은 교포(橋浦)로 도망감.

      3일(신미) 배중손 등이 사람들과 재물을 1000여 척의 배에 싣고 남쪽으로 내려감. 이숙진(李淑眞)과 윤길보(尹吉甫)가 남아 있는 삼별초군을 추적하여 구포(仇浦)까지 왔는데, 부락산(浮落山)에 이르러 바닷가에 가 무력을 시위하니 삼별초군들이 달아남.

     13일(신사) 김방경(金方慶)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임명함.  김방경의 개경정부군 60여 명과 몽고 송만호(宋萬戶) 군사 1천여 명이 남양(南陽) 앞 영흥도(靈興島)에 삼별초군이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그 위세에 눌려 싸우지 못한 채 도망함. 삼별초로부터 도망해온 1천여 명은 적의 도당이라 하여 송만호가 데려감.

 

 8월  1일(무진) 세자 심(諶)을 몽고에 보내어 황제에게 배중손이 항쟁한 상황을 보고함.

     19일(병술) 삼별초가 진도에 도착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여러 고을을 침범 약탈하며 황제의 명령이라 하여 전라도 안찰사(按察使)로 하여금 인민들을 독촉하여 가을 수확을 걷어 섬으로 들어가도록 함.

 

 9월  2일(기해) 전라도 토적사(討賊使) 신사전(申思佺)과 전주부사 이빈(李彬)이 도망하여 면직 당함.

      4일(신축) 양동무(楊東茂)와 고여림(高如霖) 등이 진도를 토벌하니, 삼별초가 장흥부(長興府)에 들어가 경졸(京卒) 20명을 죽이고, 도령(都領) 윤만장(尹萬藏)을 사로잡았으며, 재물과 곡식을 빼앗았음.

      7일(갑진) 김방경을 전라도 토적사로 임명하여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군사 1천 명으로 진도를 치게 함.

     이 달에    삼별초의 기세가 성하여 여러 고을이 삼별초에 항복함. 나주 금성산성은 삼별초가 함락시키지 못함.

 

11월  3일(기해) 삼별초가 제주를 함락시킴.

     이 달에    삼별초로부터 도망해온 홍찬(洪贊)이 김방경을 모함하여 삼별초와 내통한다하여 붙들려 왔다가 석방됨.

 

윤11월 이 달에  만호(萬戶) 고을마(高乙麻)가 군사 2백 명을 인솔하여 남방에 주둔하면서 삼별초를 방어함.

 

12월 15일(경술) 박천주(朴天澍)를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진도에 가게 해서 삼별초를 타이르게 함.

     22일(정사) 김방경이 진도에서 삼별초와 싸우다가 포위되었으나 양동무(楊東茂)가 구원하여 줌. 아해(阿海)는 겁을 먹고 싸우지 않았음.

 


1271년 (원종12)

 1월  5일(기사) 아해(阿海)가 삼별초와 싸우지 않자 황제에게 보고하여 면직 소환하게 함.

      6일(경오) 박천주(朴天澍)가 진도에 도착하자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면서, 몰래 병선(兵船) 20 척을 보내 관군을 습격하여 배 한 척과 군사 90 명을 죽임.

     22일(병술) 박천주가 진도에서 돌아와서, 함께 갔던 두원외(杜員外)를 삼별초가 억류하고 조서(詔書)를 받지 않았음을 보고함.

               밀성군 사람 방보(方甫) 계년(桂年) 등이 삼별초 항쟁에 호응하다가 죽임을 당함.

     29일(계사) 관청의 노비 숭겸(崇謙) 등이 관리들을 죽이고 진도의 삼별초 항쟁에 합류하려다가 발각됨.

 

 2월  1일(을미) 숭겸 등 4명이 참형 당함.

      5일(기해) 정자여(鄭子璵)를 몽고에 보내 방보, 숭겸의 반란을 보고함.

      7일(신축) 대부도(大部島) 사람들이 착량(窄梁)을 지키던 몽고 병사 6명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킴.

      9일(계묘) 삼별초가 장흥부(長興府)와 조양현(兆陽縣)에 침범하여 노략질하고 병선을 불태움.

 

 3월  3일(병인) 몽고가 흔도(欣都)와 사추(史樞)를 보내어 아해(阿海)를 대신하게 함.

      9일(임신) 삼별초가 합포(合浦)에 침입하여 감무(監務)를 잡아감.

     19일(임오) 몽고가 숭겸, 방보의 삼별초 호응을 구실로 고려의 요청을 불허함.

     21일(갑신) 삼별초가 동래군에 침입함.

     30일(계사) 인공수(印公秀)가 몽고에서 가져온 조서에 반역자들이 진압되지 않았으니 내조(來朝)하지 말도록 함.

     이 달에    곽여필(郭汝弼)을 몽고에 보내 삼별초가 김주, 밀성, 남해, 창선, 거제, 합포 등지를 침범하여 곡물징수가 어렵고, 바닷길이 막혀 운반이 더욱 어려움을 호소함.

 

 4월  8일(신축) 삼별초가 김주(金州)에 침입하여 약탈해 감.

     14일(정미) 삼별초가 흔도(欣都)를 진도로 불렀으나 거절당함. 흔도는 홀림적(忽林赤), 왕국창(王國昌)과 길을 나누어 삼별초를 토벌해야 한다고 건의함.

     19일(임자) 몽고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아들인 희(熙), 옹(雍) 에게 군사 400명을 인솔하여 진도를 토벌하게 함.

     24일(정사) 몽고가 조서를 보내와 ‘몽고군을 보내도 바로 도착하기 어려우니, 장마가 오기 전에 우선 근처 군사 6천 명으로 진도를 공격하라’ 함.  또 중서성의 공문에 ‘삼별초가 섬 30여 개를 점거하고 점차 세력이 왕성해지고 있으니, 현재 보유하고 있는 260척 외에 140척을 더 동원하여 장마 전에 진압하라’ 함.

 

 5월   1일(계해) 홍다구(洪茶丘)가 군대를 거느리고 진도를 토벌함.

      2일(갑자) 경군(京軍)을 더 징발하고, 충청도, 경상도의 군대도 동원하여 군대를 증강시켜 보냄.

     10일(임신) 변량(邊亮) 이수심(李守深) 등이 수군 3백 명을 인솔하여 진도를 토벌했는데, 4품관 이상의 집에서 종 1명씩을 내어 수수(水手)에 충당함.

     15일(정축) 3군이 진도를 토벌함. 김방경과 흔도의 중군은 벽파정(碧波亭)으로, 홍다구와 희옹의 좌군은 장항(獐項)으로, 김석(金錫)과 고을마(高乙麽)의 우군은 동면(東面)으로부터 들어가서 진도를 쳐서 삼별초군을 크게 격파하고, 승화후 온(承化侯溫)과 아들 환(桓)을 죽임. 강도에서 끌려간 사녀(士女)와 진도의 주민들이 몽고군사에 잡혀감.

               김통정(金通精)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탐라로 들어감. 삼별초 남천 초기에 바다로 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참설을 말한 안방열(安邦悅)은 김방경에게 투항하려다 죽임을 당함. 유존혁(劉存奕)이 남해현에서 노략질하다가 진도가 토벌되었다는 말을 듣고 배 80척을 이끌고 탐라로 감.

     28일(경인) 정자여(鄭子璵)를 몽고에 보내 진도의 삼별초를 평정한 데 대해 감사를 표함.

 

 6월 16일(무신) 원나라에 표문을 보내 고려의 물자 축적이 삼별초의 피해로 거의 없음을 알림.

     23일(을묘) 남해의 해로가 삼별초에 막혀 몽고의 물품 요구에 다 응할 수 없는 사정을 몽고 중서성에 알림.

     이 달에    삼별초의 진도에서 붙들려 온 사람들 중에 삼별초에 위협을 당해 끌려갔던 사람들에 대한 대책을 원나라와 논의함.

 

 9월  9일(경오) 재상들이 흔도(欣都)가 있는 오산(烏山)에 가서 진도에서 데려온 삼별초군 이외의 무고한 백성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함.

 

10월  7일(정유) 제주에서 전사한 고여림(高汝霖) 김수(金須) 등의 아들에게 품계를 올려 주고, 절조를 지킨 현문혁의 처와 정문감의 처는 자손에게 관직을 주도록 함.

 

11월 23일(계미) 이창경(李昌慶) 등을 몽고에 보내 제주의 삼별초 항쟁군을 섬멸해 주기를 청함.

     26일(병술) 추토사 김방경이 돌아오자 관직을 올려줌.

 


1272년 (원종13)


 1월  1일(경신) 백양(白羊)이 원나라로 돌아가면서 진도에서 포로로 끌려 온 선비의 부녀자들을 많이 데려감.

 

 3월  9일(정묘) 금훈(琴熏)을 제주역적 초유사(招諭使)로 임명함.

     15일(계유) 삼별초의 잔당들이 회녕군(會寧郡 : 長興근처)에 침입하여 조운하는 배 4척을 빼앗아 감.

 

 4월 15일(임인) 금훈 등이 배를 타고 제주로 떠남. 이후 보마도(甫麻島)에서 삼별초군 김희취(金希就) 등의 배 4 척이 와서 사신의 배를 빼앗고 추자도에 데려다 놓은 후, 김통정의 지시에 따라 일행 4명과 뱃사람들을 죽이고, 작은 배에 태워 돌려보냄.

     29일(병진) 금훈이 살아남은 뱃사람 3명과 함께 육지로 돌아옴.

     이 달에    삼별초가 해제(海際 : 무안근처), 해남(海南)에 침범하여 노략질하고 조세 운반선을 빼앗음.

 

 5월  4일(신유) 삼별초가 대포(大浦)에 침입하여 조운하는 배 13척을 빼앗아 감.

      8일(을축) 경상도 안찰사가 삼별초군의 간첩 2명을 잡아 보냄.

      9일(병인) 금훈(琴熏)이 제주도로부터 돌아옴. 삼별초군이 항복할 뜻이 없음을 보고함.

     20일(정축) 삼별초가 탐진현(耽津縣)을 불사르고 약탈함.

     27일(갑신) 금훈을 원나라에 보내 제주 삼별초 항쟁에 대해 쓴 표문을 전하게 함.

     이 달에    삼별초가 회녕현(會寧縣)을 크게 노략질함.

 

 6월  2일(무자)  삼별초군의 배 6척이 안행량(安行梁)을 지나 서울로 향하고 있다고 전라도 지휘사가 보고하자 개경의 인심이 흉흉해짐.

     14일(경자) 삼별초에서 도망해 온 노효제(盧孝悌)가 삼별초군이 배 11척에다 군사 390명을 싣고 경상, 전라도의 조세운반선을 빼앗으려 한다고 보고함.

     26일(임자) 이유비(李有庇)를 원나라로 보내 삼별초 항쟁군에 의한 피해가 곡식 3천2백여 석, 피살자 12명, 잡혀간 자 24명 등이라 보고하고 구원해줄 것을 요청함.

     29일(을묘) 나유(羅裕)에게 군사 1천5백 명을 주어 삼별초를 토벌하게 함. 이 때 삼별초는 제주에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견고하게 쌓고 더욱 창궐하여 연해지방이 소란함.

 

 8월  1일(병술) 원나라가 왕잠(王岑)을 파견하여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삼별초 정벌을 상의하게 함. 홍다구는 개경에 있는 삼별초 일당을 회유하고 난 후 정벌할 것을 건의했고, 김통정의 조카인 김찬(金贊) 등 5명을 제주에 파견하여 회유하였으나 김찬만 남겨두고 4명의 사신은 모두 삼별초가 죽임.

      7일(임진) 삼별초가 전라도의 공미(貢米) 800석을 빼앗아 감.

 

 9월 13일(무진) 삼별초가 고란도(孤瀾島)에 침입하여 병선 6척을 불사르고, 홍주부사(洪州副使) 및 결성(結城), 남포(藍浦) 감무(監務)를 붙잡아 감.

 

11월 15일(기사) 삼별초가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에 침입하여 부사 공유(孔愉) 부부를 붙잡아 감.

     21일(을해) 삼별초가 합포(合浦)를 침입하여 병선 20척을 불사르고 몽고군 4명을 붙잡아 감.

     24일(무인) 삼별초가 거제현에 침입하여 병선 3척을 불사르고 현령(縣令)을 붙잡아 감.  또 영흥도(靈興島)에 와서 배를 정박하고 근방을 돌아다니므로 왕이 흔도(欣都)에게 기병(騎兵) 50명을 청하여 왕궁을 지키게 함.

 

12월 11일(을미) 원나라가 왕에게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한 군사 6천 명과 수군 3천 명을 뽑으라는 조서를 보내옴

 


1273년 (원종14)

 1월  6일(경신) 김방경(金方慶)을 판추토사(判追討使)로, 변윤(邊胤)을 추토사로 임명함.

     22일(병자) 삼별초의 배 10척이 낙안군(樂安郡)에 침입함.

     28일(임오) 마강(馬絳)과 송분(宋玢)이 병선들을 돌아봄.  삼별초가 합포(合浦)에 침입하여 병선 32 척을 불사르고 몽고 군사 10여 명을 죽임.

 

 2월 13일(병신) 흔도(欣都) 등이 제주 삼별초를 토벌한다는 조서를 전달함.

     20일(계묘) 김방경이 정예 기병 8백 명으로 삼별초를 토벌하러 가는데 왕이 부월(鉞)을 줌.

 

 3월 20일(계유) 삼별초가 탐라현(耽羅縣)에 들어가 방수산원(防守散員) 등 15명을 죽이고, 11명을 붙들어 감.

 

 4월  1일(계미) 정토군(征討軍)의 식량 공급에 대해 의논함.

     28일(경술) 김방경이 흔도, 홍다구 등과 더불어 전라도 병선 160 척과 군사 1만여 명의 병력으로 제주를 공격하여 삼별초 무리를 붕괴시킴. 김원윤(金元允) 등 6명을 죽이고, 항복한 자 1,300여 명을 배에 싣고 돌아옴, 장군 송보연(宋甫演)과 군사 1천명을 남겨 지키게 함.

 

 5월 24일(을해) 김방경이 아들 김수(金綏)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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