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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28)방랑의길 3. 중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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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1-31 18:38 조회1,7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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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이 되다

나는 함평을 떠나 강진, 고금도, 완도를 구경하고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갔다. 보성서는 송곡면 - 지금은 득량면이라고 고쳤다 한다 - 득량리에 사는 종씨 김광언(金廣彦)이라는 이를 만나 그 여러 댁에서 40여 일이나 묵고 떠날 때에는 그 동네에 사는 선(宣) 씨 부인한테 필낭 하나를 신행 선물로 받았다.

보성을 떠나 나는 화순, 동복, 순창, 담양을 두루 구경하고 하동(河東) 쌍계사(雙溪寺)에 들러 칠자아자방(七字亞字房)을 보고 다시 충청도로 올라와 계룡산 갑사에 도착한 것은 감이 벌겋게 익어 달리고, 낙엽이 날리는 늦은 가을이었다.

나는 절에서 점심을 사먹고 앉았더니, 동학사(東鶴寺)로부터 왔노라고 점심을 시켜 먹는 유산객 하나가 있었다. 통성명을 한즉, 그는 공주에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였다. 연기는 40이 넘은 듯한테, 그가 들려주는 자작의 시로 보거나 그의 말을 보거나 퍽 비관을 품은 사람이었다.

비록 초면이라도 피차가 다 허심탄회한 말이 서로 맞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기에 나는 개성에서 성장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강산 구경을 떠나서 삼남으로 돌아다닌 지가 1년이 장근하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마곡사(麻谷寺)가 40리밖에 아니 되니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을 읽을 때에 서화담 경덕(徐花潭 敬德)이 마곡사 팥죽 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서 동지 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길을 걸으면서 이 서방은 홀아비라는 것이며, 사숙에 훈장으로 여러 해 있었다는 것이며, 지금은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려 하니 나도 같이 하면 어떠냐고 하였다. 나도 중이 될 마음이 없지는 아니하나 돌연히 일어난 문제라 당장에 대답은 아니하였다.

마곡사 앞 고개에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여 '유자비춘풍(遊子悲秋風)'의 감회를 깊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 있어서 풍진에 더럽힌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하였다. 뎅뎅, 인경이 울려온다. 저녁 예불을 아뢰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이 서방이 다시 다진다.

"김형, 어찌하시려오? 세사를 다 잊고 나와 같이 중이 됩시다."

나는 웃으며,

"여기서 말하면 무엇하오?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안개를 헤치고 고개를 내려서 산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간다. 걸음마다 내 몸은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옮아가는 것이었다. 매화당(梅花堂)을 지나 소리쳐 흐르는 내 위에 걸린 긴 나무다리를 건너 심검당(尋劍堂)에 들어가니 머리 벗어진 노승 한 분이 그림 폭을 펴놓고 보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한다.

이 서방은 전부터 이 노승과 숙면이었고, 그는 포봉당(抱鳳堂)이라는 이였다. 이 서방이 나를 심검당에 두고 자기는 다른 데로 갔다. 이윽고 나를 위하여 밥이 나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앉았노라니, 어떤 하얗게 센 노승 한 분이 와서 내게 공손히 인사를 한다.

나는 거짓말로 본래 송도 태생이더니, 조실부모하고 강근지친(强近之親 : 아주 가까운 일가)도 없어서 혈혈단신이 강산 구경이나 다니노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그 노승은 속성은 소(蘇) 씨요, 익산 사람으로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지가 50년이나 되노라 하고, 은근히 나더러 상좌가 되기를 청하였다.

나는 본시 재질이 둔탁하고 학식이 천박하여 노사에게 누가 될까 저어하노라고 겸사하였더니 그는 내가 상좌만 되면, 고명한 스승의 밑에서 불학을 공부하면 장차 큰 강사가 될는지 아느냐고 강권하였다.

이튿날 이 서방은 벌써 머리를 달걀같이 밀고 와서 내게 문안을 하고 하는 말이, 하은당(荷隱堂)은 이 절 안에 갑부인 보경(寶鏡) 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부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으므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扈德三)을 따라서 냇가에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 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섬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언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당에서는 종이 울렸다. 나의 득도식(得度式)을 아뢰는 것이었다. 산내 각 암자로부터 착가사 장삼한 수백 명의 승려가 모여들고 향적실에서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있었다. 나도 감은 장삼 붉은 가사를 입고 대웅보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곁에서 덕삼이가 배불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은사 하은당이 내 법명을 원종(圓宗)이라고 명하며 불전에 고하고 수계사 용담(龍潭) 화상이 경문을 낭독하고 내게 오계(五戒)를 준다. 예불의 절차가 끝난 뒤에는 보경 대사를 위시하여 산중에 나 많은 여러 대사들께 차례로 절을 드렸다. 그리고는 날마다 절하는 공부를 하고 진언집을 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읽고 중의 여러 가지 예법과 규율을 배웠다. 정신 수양에 대하여는,

'승행에는 하심이 제일이라'

하며 교만한 마음을 떼는 것을 주로 삼았다. 사람에게 대하여서만 아니라 짐승, 벌레에 대하여서까지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어젯밤 나더러 중이 되라고 교섭할 때에는 그렇게도 공손하던 은사 하은당이 오늘 낮부터는,

"얘, 원종아!"

하고 막 해라를 하고,

"이놈 생기기를 미련하게 생겨 먹었으니 고명한 중이 될까 싶지 않다. 상판대기가 저렇게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가서 나무도 해오고 물도 길어!"

하고 막 종으로 부리려 든다. 나는 깜짝 놀랐다. 중이 되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망명객이 되어 사방으로 유리하는 몸이 되었지마는 영웅심도 있고 공명심도 있고 평생에 한이 되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양반이 되어도 월등한 양반이 되어서 우리 집을 멸시하던 양반들을 한 번 내려다보겠다는 생각을 가슴속에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중놈이 되고 보니 이러한 허영적인 야심은 불씨 문중에서는 터럭끝만치도 용납하지 못하는 악마여서 이러한 악념이 마음에 움틀 때에 호법선신(護法善神)의 힘을 빌려서 일체법공(一切法空)의 칼로 뿌리째 베어버려야 한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데를 들어왔나 하고 혼자 웃고 혼자 탄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기왕 중이 되었으니 하라는 대로 순종할 길밖에 없었다. 나는 장작도 패고 물도 긷고 하라는 것은 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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