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29) 방랑의길 4. 마곡사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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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2-02 10:28 조회1,395회 댓글0건본문
4. 마곡사를 떠나다
하루는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린 죄로 스님한테 눈알이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심하게 스님이 나를 나무라셨던지 보경당 노스님께서 한탄을 하셨다. 전자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는 상좌를 들여주었건마는 저렇게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어쫓더니 이제 또 저렇게 하니 원종인들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잘 가르치면 제 앞쓸이는 할 만하건마는 하고, 하은당을 책망하셨다. 이것을 보니 나는 적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沙彌)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우고 또 수계사이신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普覺書狀)'을 배웠다. 용담은 당시 마곡에서 불학만이 아니라 유가의 학문도 잘 아시기로 유명한 이였다. 학식만이 아니라, 위인이 대체를 아는 이여서 누구나 존경할 만한 높은 스승이었다.
용담께 시중하는 상좌 혜명(慧明)이라는 젊은 불자가 내게 동정이 깊었고 또 용담 스님도 하은당의 가풍이 괴상함을 가끔 걱정하시면서 나를 위로하셨다. '견월망지(見月忘指)'라, 달을 보면 그만이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시고, 또 칼날 같은 마음을 품어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 하여 '인(忍)'자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은당이 심하게 나를 볶으시는 것이 모두 내 공부를 도우심으로 알라는 뜻이다.
이 모양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반 년의 세월이 흘러서 무술년도 가고 기해년이 되었다. 나는 고생이 되지마는 다른 중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70, 80 노인이시니 그 분네만 작고하시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추수기를 보면 백미로만 받는 것이 2백 석이나 되고, 돈과 물건으로 있는 것이 수십 만 냥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청정적멸(淸淨寂滅)의 도법에 일생을 바칠 생각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인천옥에서 떠난 후에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도 그 후에 어찌 되셨는지 알고 싶고, 나를 구해 내려다가 집과 몸을 아울러 망쳐 버린 김주경의 간 곳도 찾고 싶고, 해주 비동의 고후조(高後凋) 선생 - 후조는 고 선생의 당호 -도 뵙고 싶고, 그 때에 천주학을 한다고 해서 대의의 반역으로 곡해하고 불평을 품고 떠난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 사과도 할 마음이 때때로 흉중에 오락가락하여 보경당의 재물에 탐을 낼 생각은 꿈에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보경당께 뵈옵고,
"소승이 기왕 중이 된 이상에는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 공부를 하고 일생에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보경당은 내 말을 들으시고,
"내 벌써 그럴 줄 알았다. 네 원이 그런데야 할 수 있느냐"하시고 즉석에 하은당을 부르셔서 한참 서로 다투시다가 마침내 나에게 세간을 내어 주신다. 나는 백미 열 말과 의발(衣鉢)을 받아 가지고 하은당을 떠나 큰 방으로 옮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다. 나는 그 쌀 열 말을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 가지고 마곡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수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해년 봄이었다. 그 때까지 서울 성 안에는 승니를 들이지 않는 국금(國禁)이 있었다. 나는 문 밖으로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다가 서대문 밖 새 절에 가서 하루 묵는 중에 사형 혜명을 만났다. 그는 장단 화장사(華藏寺)에 은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고, 나는 금강산에 공부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혜명과 작별하고 나는 풍기 혜정(慧定)이라는 중을 만났다. 그가 평양 구경을 가는 길이라 하기로 나와 동행하자고 하였다.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구경하고 나는 해주 감영을 보고 평양으로 가자 하여 혜정을 이끌고 해주로 갔다.
수양산(首陽山) 신광사(神光寺) 부근 북암(北菴)이라는 암자에 머물면서 나는 혜정에게 약간 내 사정을 통하고, 그에게 텃골 집에 가서 내 부모와 비밀히 만나 그 안부를 알아오되 내가 잘 있단 말만 사뢰고 어디 있단 것은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부탁해 놓고 혜정의 회보만 기다리고 있더니 바로 4월 29일 석양에 혜정의 뒤를 따라 부모님 양주께서 오셨다.
혜정에게서 내 안부를 들으신 부모님은 네가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 터이니 너만 따라가면 내 아들을 볼 것이다 하고 혜정을 따라 나서신 것이었다.
북암에서 하루를 묵어서 양친을 모시고 나는 중의 행색으로 혜정과 같이 평양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한 마디씩 하시는 말씀을 종합하건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 부모님은 해주 본향에 돌아오셨으나 순검이 뒤따라와서 두 분을 다 잡아다가 3월 13일 인천옥에 가두었다. 어머니는 얼마 아니하여 놓으시고 아버지는 석 달 후에야 석방되셨다.
그로부터는 두 분이 고향에 계셔서 내 생사를 몰라 주야로 마음을 졸이셨고, 꿈자리만 사나와도 종일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러하신 지 이태만에 혜정이 찾아간 것이었다. 만나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다행하나 중이 된 것은 슬프셨다 한다.
5월 초나흗날 평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여관에서 쉬고, 이튿날인 단오날에 모란봉 그네 뛰는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앞길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났다.
관동(貫洞) 골목을 지나노라니 어떤 집 사랑에, 머리에 지포관을 쓰고 몸에 심수의를 입고 두 무릎을 모으고 점잖게 꿇어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문득 호기심을 내어 한 번 수작을 붙여보리라 하고 계하에 이르러,
"소승 문안 아뢰오"
하고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 학자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가 인사를 한즉, 그는 간재(艮齋) 전 우(田愚)의 문인 최재학(崔在學)으로 호를 극암(克菴)이라 하여 상당히 이름이 높은 이였다.
나는 공주 마곡사 중이란 말과 이번 오는 길에 천안 금곡(金谷)에 전 간재 선생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하신 중이어서 못 만났다는 말과 이제 우연히 고명하신 최 선생을 뵈오니 이만 다행이 없다는 말을 하고 몇마디 도리의 문답을 하였더니 최 선생은 나를 옆에 앉은 어떤 수염이 좋고 위풍이 늠름한 노인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 진위대에서 참령으로 있는 전효순(全孝淳)이었다. 소개가 끝난 뒤에 최 극암은 전 참령에게,
"이 대사는 학식이 놀라우니 영천암(靈泉菴) 방주를 내이시면 영감 자제와 외손들의 공부에 유익하겠소. 영감 의향이 어떠하시오?"
하고 나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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