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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30)방랑의길 5.집으로 강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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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2-08 11:24 조회2,118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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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집으로, 강화로

전 참령은,

"거 좋은 말씀이오. 지금 곁에서 듣는 바에도 대사의 고명하심을 흠모하오. 대사 의향이 어떠시오? 내가 내 자식놈 하나와 외손자놈들을 최 선생께 맡겨서 영천암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지금 있는 주지승이 성행이 불량하여 술만 먹고 도무지 음식 제절을 잘 돌아보지를 아니하여서 곤란막심하던 중이오"하고 내 허락을 청하였다. 나는 웃으며,

"소승의 방탕이 본래 있던 중보다 더할지 어찌 아시오?"

하고 한 번 사양했으나 속으로 다행히 여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구걸하기도 황송하던 터이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싶었던 까닭이다.

전 참령은 평양 서윤(平壤庶尹) 홍순욱(洪淳旭)을 찾아가더니 얼마 아니하여 '승 원종(僧圓宗)으로 영천사(靈泉寺) 방주(房主)를 차정(差定)함' 하는 첩지를 가지고 와서 즉일로 부임하라고 나를 재촉하였다. 이리하여서 나는 영천암 주지가 되었다.

영천암은 평양서 서쪽으로 약 40리, 대보산(大寶山)에 있는 암자로서 대동강 넓은 들과 평양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나는 혜정과 같이 영천암으로 가서 부모님을 조용한 방에 거처하시게 하고 나는 혜정과 같이 한 방을 차지하였다. 학생이란 것은 전효순의 아들 병헌(炳憲), 그의 사위 김윤문(金允文)의 두 아들 장손(長孫), 중손(仲孫), 차손(次孫)과 그밖에 김동원(金東元) 등 몇몇이 있었다.

전효순은 간일하여 좋은 음식을 평양에서 지워보내고 또 산밑 신흥동(新興洞)에 있는 육고에 영천사에 고기를 대기로 하여 나는 매일 내려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다가 끓이고 굽고 하여 중의 옷을 입은 채로 터놓고 막 먹었다. 때때로 최재학을 따라 평양에 들어가서도 사숭재(四崇齋)에서 시인 황경환(黃景煥) 등과 시화나 하고 고기로 꾸미한 국수를 막 먹었다. 그리고 염불을 아니하고 시만 외니 불가에서 이르는 바 '손에 돼지 대가리를 들고 입으로 경을 읽는' 중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시승(詩僧) 원종이라는 칭호는 얻었으나 같이 와 있던 혜정에게 실망을 주었다. 혜정은 내 심신이 쇠하고 속심(俗心)만 증장하는 것을 보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고기 안주에 술취한 중의 귀에 그런 충고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내 불심(佛心)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보고 영천암을 떠난다 하여 행리를 지고 나서서 산을 내려가다가는 차마 나와 작별하기가 어려워서 되돌아 오기를 달포나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로 간다고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도 내가 다시 머리를 깎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서 나는 머리를 기르고 중노릇을 하다가 그 해 가을도 늦어서 나는 다리를 들여서 상투를 짜고 선비의 의관을 하고 부모를 모시고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나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고 창수가 돌아왔으니 또 무슨 일 저지르기를 하지나 않나 하고 친한 이는 걱정하고 남들은 비웃었다. 그 중에도 준영 계부는 아무리 하여도 나를 신임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지금은 마음을 잡아서 그 중씨(仲氏)이신 아버지께도 공손하고 농사도 잘 하시건만은, 내게 대하여서는 할 수 없는 난봉으로 아시는 모양이어서,

"되지 못한 그 놈의 글 다 내버리고 부지런히 농사를 한다면 장가도 들여주고 살림도 시켜주지만 그렇지 아니한다면 나는 몰라요"

하고 부모님께 나를 농군이 되도록 명령하시기를 권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를 농군을 만들 뜻은 없으셔서 그래도 무슨 큰 뜻이 있어 장래에 이름난 사람이 되려니 하고 내게 희망을 붙이시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내가 농군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버지 형제분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동안에 기해년도 다 가고 경자년(更子年) 봄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계부는 조카인 나를 꼭 사람을 만들려고 결심하신 모양이어서 새벽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단잠을 깨워서 밥을 먹여 가지고는 가래질터로 끌고 나가셨다. 나는 며칠 동안 순순히 계부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아무리 하여도 마음이 붙지 아니하여 몰래 강화를 향하여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고 선생과 안 진사를 못 찾고 가는 것이 섭섭하였으나 아직 내어 놓고 다닐 계제도 아니므로 생소한 곳으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김두래(金斗來)라고 변명(變名)하고 강화에 도착하여서 남문 안 김주경의 집을 찾으니 김주경은 어디 갔는지 소식이 없다 하고 그 셋째 아우 진경(鎭卿)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나를 접대하였다.

"나는 연안 사는 김두래일세. 자네 백씨와 막연한 동지일러니 수년간 소식을 몰라서 전위해 찾아온 길일세"

하고 나를 소개하였다. 진경은 나를 반갑게 맞아 그 동안 지낸 일을 말하였다. 그 말에 의하면 주경은 집을 떠난 후로 3,4년이 되어도 음신(音信)이 없어서 진경이가 형수를 모시고 족카들을 기르고 있다 한다. 집은 비록 초가나 본래는 크고 넓게 썩 잘 지었는데 여러 해 거두지를 아니하여 많이 퇴락되었다.

사랑에는 평소에 주경이 앉았던 보료가 있고, 신의를 어기는 동지를 친히 벌하기에 쓰던 것이라는 나무 몽둥이가 벽상에 걸려 있다. 나와 노는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주경의 아들인데 이름이 윤태(潤泰)라고 한다.

나는 진경에게 모처럼 그 형을 찾아왔다가 그저 돌아가기가 섭섭하니 얼마 동안 윤태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소식을 기다리고 싶다고 하였더니, 진경은 그렇지 않아도 윤태와 그 중형(仲兄)의 두 아들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었건마는 적당한 선생이 없어서 놀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곧 그 중형 무경에게로 가서 조카 둘을 데려왔다.

나는 이날부터 촌 학구(學究)가 된 것이었다. 윤태는 동몽선습, 무경의 큰 아들은 '사략초권(史略初卷)', 작은 놈은 천자문을 배우기로 하였다. 내가 글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차차 학동이 늘어서 한 달이 못 되어 30명이나 되었다. 나는 심혈을 다하여 가르쳤다.

이렇게 한 지 석 달을 지낸 어떤 날 진경은 이상한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글세, 유인무(柳仁茂)도 우스운 사람이야. 김창수가 왜 우리 집에를 온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뜨끔하였으나 모르는 체하였다. 그래도 진경은 내게 설명하였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

유인무는 부평 양반으로서 연전에 상제로 읍에서 30리쯤 되는 곳에 이우(移寓)해 와서 3년쯤 살다가 간 사람인데, 그때에 김주경과 반상(班常)의 별을 초월하여 서로 친하게 지낸 일이 있었는데 김창수가 인천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후에 여러 번째 해주 김창수가 오거든 급히 알려달라는 편지를 하였는데 이번에 통진 사는 이춘백(李春伯)이라는, 김주경과도 친한 친구를 보내니 의심 말고 김창수의 소식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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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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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날씨가 추워서 몸은 움추려 지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행복한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