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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제학공파 선조님들(2)-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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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2-17 00:57 조회2,0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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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치(金 緻) 1577(선조10)∼1625(인조3).

조선의 문신.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심곡(深谷). 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이며, 증영의정 충무공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1597년(선조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假讀書)를 했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조참의(吏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간을 거쳐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다.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1623) 후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한때 대북(大北)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동래부사 (東萊府使)를 거쳐 1625년(인조3)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안흥군(安興君)에 봉해졌다. 천문(天文)에 밝았으며 저서로 <심곡비결(深谷秘訣)>과 시문집 <남봉집(南峰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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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2004. 12. 31. 항용(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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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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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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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석>(1957. 3. 중건. 2003. 5. 8. 항용(제) 촬영)

 

  <기타 자료 소개>

  1. 주요 서적 및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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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곡비결>(국립도서관 소장)                                   <수교(受敎.국립도서관소장)>

 

*<남봉공 교지 사진 자료 소개 (1985년 항용 촬영)>

   현재 후손 김태준, 김인응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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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하는 교지-1614년(광해 6년).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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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 (병조참지에 임명하는 교지-1620(광해 12년). 2.3)

 

* <김태준(제. 남봉공 12대손) 소장 사진 자료 (2004. 10. 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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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조참의 지제교에 임명하는 교지-1614(광해 6).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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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지제교에 임명하는 교지-1618년(광해 10). 4. 13)

*상기 교지를 포함한 전 자료는 후손 김봉회씨(별세. 자 태준)가 39점을 소장하고 있고, 3점(백곡1, 남봉공1, 화은군1)은 후손 김인응씨(서울 반포 거주)가 소장하고 있음(2002. 3. 김인응씨의 談)

*1985년 조사 당시의 총 소장(교지류-42점) 목록:김치(9), 김치 배위(1), 김득신(13), 김가행(15), 김한창(1), 김천주(1), 김가교 모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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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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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역 심곡비결> (金善浩 譯. 대유학당 간. 2001. 7. 1)  (2004. 10. 항용(제) 제공)

   지난 2004년 7월, 국역 <심곡비결>(深谷秘訣)이 간행되었다. 저자이신 남봉공(휘 김치) 선조님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아드님이시며 조선 선조때 文科를 하시고 사가독서(賜假讀書)를 거쳐 광해군, 인조때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신 바 있으며, 우리나라 자미두수 역술학계의 태두로 이름 높으신 분이시다. 이 국역본은 국내 최대 연구가인 이두(履斗) 金善浩 선생이 약 10여년간 심혈을 기울여 국역한 것이다.

이 <심곡비결>(규장각본)은 모두 5책, 875쪽이나 되는 방대한 서적으로 동양의 역술학(易術學) 중 자미두수 계열에 있어서 가장 방대한 역술서이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심곡비결>로는 1)규장각본(이승윤 기증본), 2)김구열본(남봉공의 묘에서 발견된 것의 복사본), 3)김학수본(경상감영의 기둥속에서 발견된 필사본), 4)국립중앙도서관본 등이 있는데 이번에 발간한 국역본은 가장 완전한 서적인 규장각본을 기초로 했다.

이 <심곡비결>은 동양의 어느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이론과 예제를 가장 자세하게 갖추고 있다는데 큰 가치가 있다. 남봉공 김치는 이 심곡비결의 역술법으로 인조 반정의 성공을 예언하는 등 높은 적중률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때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들은 이토록 유명한 남봉공에 대한 불안감과 자미두수로 운명을 점친 경상도 선비들이 과거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공을 유배보내고 심곡비결을 수거하여 불태우기도 하였다.


*<심곡비결> 대유학당 학술총서 61. 김선호 역.  2004. 7. 대유학당 간. 값 43,200원. 출판사 연락처 : 02)2249-5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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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한라산기>(제주도 문화재 위원이신 종친 益洙씨께서 남봉공의 시문 중 제주 관련 시문을 발췌하여 실어 놓은 서적. 2000. 3. 제주문화원 간.)

 

  2. 제주도 방선문 암벽 마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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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방선문 암벽에 새겨져 있는 남봉공의 시>

<제주도 마애명>(2000. 2. 제주도동양문화연구소 간. 51P)에 실려 있음. 방선문은 제주도 제주시 오라2동(정실마을) 남쪽 오등동에 위치. 제주10경의 하나인 영구춘화로 불리는 곳이다. 1609년(광해1년) 가을, 남봉공이 제주판관 재직시 방선문에 올라 지은 시로 절창으로 손꼽히며 방선문에 남아 있는 마애시 중에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된 것이다. 2002. 8. 김익수(제). 자료제공

  <원시 및 해석>

착石非神斧   쪼개진 돌은 귀신이 도끼질 한 것이 아니라

渾淪肇判開   혼돈(카오스)에서 처음 열리기 시작할 때 그대로이니

白雲千萬歲   흰 구름 속 오랜 세월을

仙俗幾多來   신선은 속세에 몇 번이나 다녀갔는가.

    己酉 秋 金緻      기유년(1609) 가을 김치(金緻)

 

 <제주 자연사 박물관 내에 있는 남봉공의 <유한라산기> 현판 액자>

            -素菴 玄中和 先生 書 (2002. 11. 17. 항용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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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면, 전체 길이 약 3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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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2 사진은 부분 촬영한 것>(2005. 12. 11. 항용 촬영)

  <유한라산기 번역문>

 출전 : <탐라지>(1653년(효종 4)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편찬). 주요내용은 2002년 7월 "도서출판 푸른역사"에서 펴낸 "역주탐라지"에서 발췌함.

“내 일찍이 한라산이 바다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듣고 등정(登頂)하여 장하게 유람하고자 마음먹고 있었으나,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1609년(광해군 1)초봄에 천관랑(天官郞)으로 임금님의 은혜를 입어 특별히 제주통판(通判;판관)에 임명받았다. 이 해 3월 비로소(제주로)건너가게 되었다. 바닷길에서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니 그다지 험준하지 않은 듯하였다.
길다랗고 커다란 산록(山麓)이 한 면에 가로질러 있을 뿐이었다. 몰래 스스로 말하기를,
‘세상에서 소위 영주(瀛洲) 라는 곳은 곧 이 산이니 삼신산(三神人)의 하나로 신선이 산다고 하여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한 게 아닌가! 언뜻 인정이란 귀로 듣는 것을 귀하다 하고, 눈으로 보는 것은 천하다고 그럴 것인가! <산을>찾아가서 살피어 의혹을 깨뜨리고 싶지 않겠나’ 라고 하였다.
부임하고 10여 일 만에 마침 민응생(閔應生)군과 함께 한라산의 승경(勝境)에 대해 말을 나누었다. 민군(閔君)은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조만간 당신께서 틈을 타서 한번 오른다면 이 사람도 따라 나서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선경(仙境)은 만나기 어렵고 인사(人事)는 어그러지는것이니, 공무에 바빠 거의 겨를이 없다‘고 하자 ’옛 사람이 이르기를 공무를 다 마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치 관사(官事;관청일)를 다 완료하길 기다린다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까? 라고 하였다.
마침내 갈 계획을 결심하고 민군과 이효성(李孝誠) 및 정기수(鄭麒壽) 등과 함께 말을 타고 성(城)을 나섰으니, 때는 마침 4월8일이었다. 오던 비는 개어 따뜻한 날씨는 화창하고 들판은 손바닥 같은데 예쁜 푸새가 펼쳐 있었다. 무쉐내(鐵川) 냇가의 물을 따라 말을 타고 올라가니 철쭉과 진달래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 빛나며 눈으로 볼수록 조용히 읊으니 모두 그림 가운데 있는 듯하다. 가다가 20여 리에 이으러 언덕 가에 쉬면서 낭떠러지의 시냇물을 굽어보니 온갖 골짜기의 푸른 숲이 우거져 사랑스럽다. 얘기하며 발걸음을 옮기니 이미 정오(正午)가 되었다. 드디어 말을 타서 산으로 들어가니 한 줄기의 길은 마치 뱀처럼 얽혀 돌아 구부러졌다. 고죽(苦竹:참대)은 땅을 덮고 교목(喬木:곧은 큰 나무)은 하늘을 가렸다.
비스듬히 모자를 쓰고 녹음(綠陰)아래를 지나니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 나로 하여금 몸과 맘이 모두 상쾌함을 느끼게 하였다.
노로오롬(獐嶽)을 거쳐서 삼장골(三長洞)에 들린 다음 삼장(三長)에서 볼레오롬(浦涯岳)을 넘어 비슬거리며 남쪽으로 향하여 한 정사(精舍)에 이르렀는데 높은 곳은 안개와 구름이고 얕은 아래는 푸른 바다를 압도하니 이곳이 곧 존자암(尊者菴)이다. 8,9칸이나 되는 판자집은 띠로 지붕을 덮어 사치스럽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았다. 한 외국의 승려가 문 밖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맞아 선당(禪堂:참선하는곳)으로 안내하기에 그 스님의 이름을 물으니 수정(修凈)이라고 하였다.
내가 좌우를 돌아보며 일러 말하기를 “이 산은 아득하여 먼바다 2천리 밖에나 떨어진 곳인데<우리가 유람하는 것은>실로 평생 꿈에서도 오지 못할 곳이거늘, 우리가 오늘 놀러 찾아온 것이 운수가 좋은 게 아닌가!” 하니,모두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웃으며 말을 끝맺지도 못했는데 산색(山色)이 갑자기 캄캄해지며 천둥소리가 바위를 울렸다. 모두 생각한다는 것은 다 헛되어 비어버리고 불등(佛燈)만이 반짝거여 밤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짤막한 율시(律詩)를 읊으며 지어 민군에게 보였다.
새벽에 큰바람이 불어 그 성난 바람소리가 산악을 흔들더니 민군이 놀라서일어나 창문을 열면서 말하기를, ‘풍세(風勢)가 몹시 사나워 날씨가 자못 침침하여 비록 산정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멀리 바라보기란 어렵습니다. 후일을기다려 유람하여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은 참으로 옳다. 다만 옛 사람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묵묵히 기도하면 형악(衡岳)의 그름도 걷히게 된다.‘고 했으니,정성을 드리면 잘 풀려나갈 수 있다. 나의 현명함이 비록 만(萬)에 하나 미치지 못한다고 하지만 마음속의 정성은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니 그대는 좀 천천히 기다리지‘라고 대답하였다. 동이 터 밝하오자 과연 바람은 잔잔해져 드디어 일찍 식사를 마쳐 갈길을 재촉하였다.
스님 수정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니 겹겹이 중첩된 언덕과 오름이 겹쳐 길은 매우 위태로웠다.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빽빽한 골짜기를 헤쳐 나서니 점차 아름다운 경지(境地)로 들어섰다. 6,7리나 지나 영실(靈室)에 다다르니 골짜기가 자못 넓게 트인 바로 이곳이 옛 존자암의 터전이다. 천길 푸른 절벽이 둘러 있어 마치 병풍처럼 우뚝하며, 위에는 괴석(怪石)이 마치 나한(羅漢)처럼 500여 개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래는 샘이 잔잔하게 졸졸 흘러 그 소리가 거문고 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스님 수정이 나에게 알리기를, ‘골짜기 속에는 백록(白鹿)이 영주초(瀛洲草)를 뜯어먹어 왕왕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본답니다. 실로 여기가 신선이 산다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나는 흥겨워 시(詩)로써 읊어 마치기도 전에 종자(從子;따라 다니는 사람)가 말하되,여기에서 봉우리를 오르기까지는 아지고 멀어 오래 쉴 수가없습니다.‘라고 하여 부득이 다시 골짜기를 나섰다. 골짜기 동남쪽 산자락에 한 석굴(石窟)이 있어 이름하여 수행(修行)이라고 하였다. 옛날 한 도승(道僧)이 그 안에 살았더니 무너진 온돌이 지끔껏 남아 있다.
수행굴(修行窟)을 나서 10여 리 지나니 칠성대(七星臺)에 다다랐다. 이 대(臺)에서 동쪽으로 다시 5리쯤 지나 쳐다보니 석벽(石壁)이 깍아지른 듯 우뚝 서서 기둥처럼 하늘을 떠받쳤다. 이것이 곧 이른바<한라산>상봉(上峰)이란다. 이에 말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밀고 당기며 올라가니 험한 돌길이 구름에 닿아 인적이 통하지 않았다.
온 산이 향나무요, 위로는 우거진 숲으로 해를 가리우고 아래로는 둥굴레가 바위 위로 얽혔다. 뭇 풀과 온갖 꽃은 그런 틈에 뿌리도 박혀 있지 못했으며 층층 봉우리와 절벽에는 얼음과 눈이 아직도 쌓여 있어 가죽 겹옷을 입었어도 추운 기운이 몸에 스며들어 움츠러져 실로 인간 세계가 아니로다. 정오(正午)에 비로소 정상 위에 닿아 혈망봉(穴望峰)을 향하여 대좌(對坐)하였다. 이 봉우리는 한 구멍이 꿰뚫어 건너 통해 볼 수 있으니 그런 까닭으로 지어진 명칭이다. 사면이 봉우리로 둘러 마치 성곽 속에 연못이 있는 듯, 그 깊이는 장여(丈餘;한 길 남짓)쯤 된다. 이를 백록담(白鹿潭)이라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뭇 신선이 이 연못에서 백록(白鹿)에게 물을 마시게 하였으니,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때에 햇볕이 거울에 비추듯 하고 해색(海色)이 옷 다려놓은 듯, 위아래로맞닿아 가없이 아득한데 맑은 바람은 솔솔 불고 기특한 향기는 코를 찔렀다. 바위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불며 망건(網巾)을 걷어 멀리 살펴 바라보니 동남쪽은 영파(寧波).유구(琉球). 남만(南蠻;남쪽오랑캐). 일본(日本). 마라(磨羅;지금의 마라도).지귀(地歸;지금의 지귀도). 무협(巫俠). 송악(松嶽).산방(山房). 성산(城山)이요 서북쪽은 백량(白粱). 청산(靑山). 겅두(鯨斗). 추자(楸子). 사서(斜鼠). 비양(飛楊). 화탈(火脫) 등 크고 작은 온 섬과 가까운 뭇 산이 모두 손 닿을 곳에 들어온다.
삼읍(三邑)의 보루(堡櫐)가 솔밭처럼 정립(鼎立)하고 바둑판 같이 펼쳐져 또렷하게 내 눈 밑에 깔려 얽혀진 개미 떼가 구릉(丘陵)에 기생(寄生)하는 듯하다. 다만 하늘은 더욱 높고 바다는 더욱 트였으니 형체는 더욱 작아지고 시야는 더욱 멀어만 가서 내가오른 봉우리는 바로하늘 끝 펀펀히 빈 곳에 떠 있는 듯하다. 바람에 나부끼는구나! 마치 세속을 잊어버리고 홀로 신선이 되어 훨훨 나니 말로나 문자로 가히 형용할수 없다. 지난번 맘속에 간직한 의혹은 통쾌히 풀릴 수 있어 비로소 그 실속과 명성을 믿게 되었다
수정(修淨)이 나서면서 ‘예로부터 이제까지 이 산을 유람하는 자 중에서 등정(登頂)한 자 그 수를 알 수 없지만 늘 구름과 비바람으로 컴컴하여 지척(咫尺)을 가리지 못하니 모두 어쩔 줄 모르고 돌아 나섰습니다. 일찍이 승경(勝境)을 샅샅이 탐색한 이가 없는데 이제 명석한 당신께서 왔기 때문에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날씨가 쾌청하여 하늘과 땅의 신비함이 드러났습니다. 참으로 선골지인(仙骨之人;신선의 골격)이 아니면 어찌 이런 데 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놀이에 능히 갖출 수 있겠습니까! 고 하니 좌중이 활짝 웃었다.
나도 무릎을 치며 탄식하여 이르되, “우리는 모두 속세의 사람으로 선경(仙境)을 밟아 수성(壽星;남극 노인성)을 굽어보며 인간의 탈을 벗어 삼생(三生)의 빛을 갚아 내 가슴이 시원하다. 극히 흉중(胸中)이 넓어져 운몽(雲夢)을 삼킬 듯 할 뿐만 아니라 얻은 바가 크지 않았겠는가!
원미지(元微之)의 시에, ‘내 옥황상제(玉皇上帝)의 향안리(香案吏)일세, 귀양살이로 봉래산(蓬萊山)에서 살리라.‘고 하였으며, 간재(簡齌)의 시에 ’올해 귀양살이 아니었으면 이 기특한 일을 다투어 이루었으리.‘ 하였다.
<원미지. 간재>두 사람은 바로 오늘을 말한 것이리라.‘하고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 돌을 씻은 다음 써서 승적(勝迹;뛰어난 자취)을 기록하고 꽃 자기(磁器) 사발에 술을 부어 실컷 취하려 하니 좌우는 모두 사양하여 마시지 않았다. 한 순배 돌아 마셔 멈추자 주방(廚房) 사람이 향기로운 잎새를 따서 찻물을 끓여 내놓았다. 한 잔을 시음(試飮)했더니 청향(淸香;맑은 향기)이 뼛속에 스며들어 신선이 되고 바람을 타서 먼 곳을 노닐며 다니니 비록 경옥(瓊玉)같은 음료라도 이를 넘지 못할 것이다. 요리조리 다니고 있을 무렵 종자(從者;심부름꾼)가 알려오기를, “날이 벌써 저물었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산 북쪽을 따라 부축하면서 내려와 늘 기봉(奇峰)과 험한 절벽을 만나면 지팡이에 의지하여 간혹 돌 뒤에 앉아 쉬고 나서 10여 리를 지나 비로소 말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언덕 가의 그윽한 꽃은 울긋불긋 혹은 새하얗게 서로비추고 이때에 진기한 길짐승과 괴이한 날짐승이 안개 자욱한 숲 속에서 지저귀며 날아갔다.
이생(李生;李孝誠)이 나에게 말하기를 “휴대하고 온 술을 다시 가지고 돌아갈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잠깐 시냇가에 멈추어 다시 한번 마셔 취하고 달빛을 밟으며 돌아가는 것이 또한 좋지 않습니까?고 하니 나는 ”그렇게 하자“고 맞장구쳤다.
가시덩굴에 앉아 주량에 따라 마셨다. 마시고 나서 서로 재촉하여 산을 내려 오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헤어지기 섭섭한 듯하였다. 마치 친구를 이별하듯 유달리 그리워지는 감회에 젖어들렀다. 소사(小使;심부름꾼)가 갑자기 ‘저 해상의 신기루는 역시 하나의 신기한 광경입니다.’라고 일러주었다. 내가 그곳을 보니 층층 누각(樓閣)이 우뚝 솟아올라 떨어지는 해와 없어지는 노을의 광채가 서로 비추어 없어졌다가 보이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이(말로) 형용하기란 어려웠다. 모두 서로를 돌보며 ‘생각하건데 하늘이 님(판관 김치를 지칭)에게 속인(俗人)들이 볼 수 없는 경관(景觀)을 전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까! 온갖 기기괴괴(奇奇怪怪)함이 기쁘고 즐거우며 놀랍고 두렵다는 것이 차제(次第;차례)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님이 대단하신 것을 하늘이 알아주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손뼉치며 웃어댔다.
갑자기 어둠이 들자 새들은 모두 날아가고 산에서 달이 떠 드디어 제주성으로 들어서니 성문은 닫아 있지 않았다. 며칠 뒤에 민 군이 나에게 ‘앞서 한라산을 유람한 자취가 인멸(湮滅)되어 전하지 못할 수 있으니 님께서 글로 써서 오래 남게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자 나는 문장이 졸렬하나 사양하지 못하고 이 글을 썼노라..

 

3. 묘비문 소개 (2003. 6. 20. 항용(제) 제공)

  安興君 南峰 김치(1577~1625)의 묘갈은 顯宗15년(1674년)  증평읍 율리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아들인 柏谷 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자 사위인 崔 渲이 썼다.

 1)원 문

  先君碑陰記

  公姓金, 諱緻. 字士精, 號南峰. 十三世祖高麗上洛公方慶, 以功食采于安東, 新羅敬順王後也. 傳十一世, 諱忠甲. 司憲府持平贈議政府左贊成, 公之大考也. 初娶翰林金神童女, 生諱時晦. 丁卯登第, 秉史筆而名位不大, 公之考也. 再娶內禁衛李成春女, 生諱時覺時敏時愼時進. 時敏娶學生徐應文女, 無子. 以晋州判官, 値海寇與戰大剋之, 陞拜兵馬節度使. 又大戰, 賊三敗北. 親自巡城, 竟中流丸而卒. 以豊功茂著, 贈領議政, 封上洛君, 公之養考也. 考配尙衣院直長楊彦漑女.

  以萬曆丁丑七月初七日生公. 公生而魁傑. 其性甚聰敏. 丁酉 捷謁聖科, 爲承文正字. 己亥, 以春坊說書. 陞司書, 轉拜兵曹佐郞 弘文館修撰 司憲府持平. 出宰海美興德, 恩威幷施, 吏 而民懷. 戊申, 復入玉堂薇垣, 轉爲吏曺佐郞, 兼賜暇湖堂. 己酉, 除濟州判官, 廉 直持身, 廓革苛政, 疲氓 蘇, 歷成均司藝宗簿司僕正. 癸丑, 爲嶺南均田使正田役, 入爲兵曺參知司諫院大司諫吏曺參議. 乙卯, 丁養大夫人喪. 戊午, 除兵刑工參議承旨, 皆不就. 當是時, 光海政亂倫 廢大妃之論起. 公憤 大言曰. 時蕁乎, 遂居龍湖. 足不到城市者六年, 詩酒自娛. 逮仁祖反正, 印萊接倭重地, 拜公府使. 不但爲才局, 且以弗干廢妃故也. 公視民如傷, 刪其衆弊, 民鑄銅碑立. 待倭宴餉之餠精潔, 歲弊之給, 亦得其宜. 倭亦感德, 送寶 奇器. 乙丑, 爲慶尙道觀察使, 宿病復 , 五月二十七日. 卒于安東客舍. 得年四十九, 葬淸安縣南栗峙. 丁酉, 夫人以疾終, 葬公之墓左. 公宇量深 , 喜 不形於色, 宏略出衆, 一松沈相喜壽, 以公可爲都元帥薦之. 盖從時議, 配吏曺參判泗川睦詹女. 生一男得臣, 文科掌令. 得臣娶掌令金聲發女,

  生男女五. 一男天柱, 娶學生柳成廈女, 生四男. 一女而早死. 二女歸文科縣監崔渲. 生一男二女. 三男天 , 娶進士李繼道女, 生五男一女. 四女歸縣監李重輝, 生一男. 五男天揆, 娶幼學李承淵女, 生三男一女. 副室出長曰得齡爲司馬. 次曰得成得平. 嗚呼, 至情無文. 只序列世系子孫, 不記事實, 則後人何觀焉?

男 通政大夫 掌樂院正 兼知製敎 得臣 撰

孫  通政大夫 掌 院 判決事 崔演 書

崇禎 紀元 四十七年 甲寅 九 月 日 立

 

 2)번역문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요, 휘(諱)는 치(緻)이다. 자(字)는 사정(士精)이요, 호(號)는 남봉(南峰)이다. 13세조(十三世祖)는 고려(高麗)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이니, 공(公)을 세워 안동(安東)에 식채(食采)했는데, 신라 경순왕(新羅敬順王)의 후손이다. 11세를 전해 내려오니 휘(諱)는 충갑(忠甲)이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시니 공(公)의 할아버지이시다. 처음 한림(翰林) 김신동(金神童)의 딸에게 장가가서 휘(諱) 시회(時晦)을 낳았다. 정묘(丁卯)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사필(史筆)을 잡아 명성과 지위가 크지는 않았으니, 공(公)의 아버지이다. 두 번째 내금위이성춘(內禁衛李成春)의 딸에게 장가가서, 휘(諱) 시각(時覺)·시민(時敏)·시신(時愼)·시진(時進)을 낳았다. 시민(時敏)은 학생(學生) 서응문(徐應文)의 딸에게 장가갔으나 아들이 없었다.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왜적을 맞아 싸워 크게 이겨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승진했다. 또 크게 싸웠는데 적이 세 번 패배(敗北)했다. 친히 성을 순시하다가 마침내 유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많은 공이 드러나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니, 공(公)의 양아버지이다. 아버지의 배필은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 양언개(楊彦漑)의 딸이다.

  만력(萬曆) 정축(丁丑;1577년) 7월7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公)은 태어나서 몸집이 크고 건장했으며 성품이 기특하고 매우 총민(聰敏)했다. 정유년(丁酉年(1597년))에 알성과(謁聖科)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에, 춘방설서(春坊說書)가 되었다. 사서(司書)로 승진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를 제수 받았으며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나아갔다. 해미(海美)와 흥덕(興德)의 원으로 나아갔는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 아전들을 온화(溫和)하게 하고 백성들을 품었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에 다시 옥당 미원(玉堂 薇垣)으로 들어와, 이조좌랑(吏曺佐郞)으로 전보(轉補)됐으며 겸(兼)하여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에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제수 받았는데 렴직(廉直)으로 자신을 지켰으며(持身), 가혹한 정치를 크게 개혁하고 피폐(疲弊)해진 백성들을 이에 소생(蘇生)시켰으며, 성균사예종부사복정(成均司藝宗簿司僕正)를 지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영남균전사정전역(嶺南均田使正田役)이 되었으며 병조참지사간원대사간이조참의(兵曺參知司諫院大司諫吏曺參議)으로 들어왔다. 을묘년(乙卯年: 1615년)에 양(養)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병형공참의승지(兵刑工參議承旨)에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당시(當時), 광해군(光海君)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윤리를 어겨 대비(大妃)를 폐비(廢妃)한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공(公)이 분격하면서 크게 말하기를 "시국이 좋지 않구나." 라고 하고 드디어 용호(龍湖)에 거처했다. 성시(城市)에 나아가지 않은 지가 6년이 되었으며,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동래(東萊)에 왜를 접촉할 때 땅을 중히 여겨, 공(公)을 부사(府使)로 제수했다. 재주와 국량(局量)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폐비(廢妃)에 관한 일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성을 상처 보듯이 했으며 대중들의 폐(弊)를 줄여주어 백성들이 돈으로 비(碑)를 세웠다. 왜(倭)를 대접할 때 향연(饗宴)의 음식을 정결히 하고 세폐(歲弊)를 지급하여 또한 그 마땅함을 얻었다. 왜가 또한 덕에 감동하여 보검(寶劍)과 기이한 그릇을 보냈다. 을축(乙丑)년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되었는데, 묵은 병이 다시 재발되어 5월 27일 안동객사(安東客舍)에서 졸(卒)했다. 연세가 49세인데 청안현 (淸安縣) 남쪽 율치(栗峙)에 장례(葬禮)지냈다. 정유(丁酉)년에 부인(夫人)이 병으로 임종(臨終)하여 공(公)의 묘(墓) 왼쪽에 장례(葬禮)지냈다. 공(公)은 기량(器量)이 깊고 침착하여 기뻐하고 노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큰 지략이 출중 (出衆)하여, 재상인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가 공(公)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추천했다. 대개 당시의 논의에 따라 이조참판(吏曺參判) 사천목첨(泗川睦詹)의 딸을 배필로 맞았다.

  일남 득신(得臣)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장령(掌令)이 되었다. 득신(得臣)은 장령(掌令) 김성발(金聲發)의 딸에게 장가가서, 1남2녀를 낳았다. 1남은 천주(天柱)로 학생(學生) 유성하(柳成廈)의 딸에게 장가갔다. 4남을 낳았다.  1녀는 일찍 죽었다. 2녀는 문과(文科) 현감(縣監) 최선(崔渲)에게 시집가서 1남2녀를 낳았다. 3남 천척(天척)은 진사(進士) 이계도(李繼道)의 딸에게 장가가서 5남1녀를 낳았다. 4녀는 귀감(歸監) 이중휘(李重輝)에게 시집가서 1남을 낳았다. 5남 천규(天揆)는 유학(幼學) 이승연(李承淵)의 딸에게 장가가서 3남1녀를 낳았다. 부실(副室)이 낳은 장남은 득령(得齡)으로 사마(司馬)에 합격했다.  그 다음은 득성(得成)과 득평(得平)이다. 아! 지극한 정은 글로 할 수 없다. 다만 세계 자손(子孫) 서열(序列)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후인이 어찌 알아보겠는가?

 

男 通政大夫 掌樂院正 兼知製敎 得臣 撰

孫壻 通政大夫 掌隸院 判決事 崔演 書

崇禎 紀元 四十七年 甲寅 九 月 日 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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