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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제주 유적답사기(5-終)-항파두리성과 삼별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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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6-02-17 00:50 조회2,6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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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애월읍으로 되돌아갔다가 우회전하여 항파두리로 올라가는 길은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파군봉은 그 너머에 우뚝 서 있었다. 애월읍 古城里의 항파두리(缸坡頭里)란 지명에 대해 궁금했다. 우선 일반적인 다른 지명과 비교해 볼 때 어감상 특별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익수씨께서 우리 홈에 기고해 주신 적도 있지만(2002. 7. 14. <김방경과 제주>) 이 지명은 제주에서도 많은 이론이 있어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익수아저씨께서는 일찍이 깊이 연구하신 바 있었다. 1992년 11월  26일자 제민일보에 소개된 내용 일부를 잠시 정리해 본다.

 "---항파두리의 어원을 살펴보면 항파와 두리의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항파(缸坡)는 고려때에는 缸破로 표기되었던 것이 조선조에 와서 缸波, 缸坡로 쓰이게 된 것으로 본다. 고성리가 해변이 아니므로 波에서 坡로고쳐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缸破>가 제일 먼저 나온 출전은 <高麗史>의 열전 중 裵仲孫條와 <高麗史 節要>의 元宗順孝大王庚午十一年條이다.

  즉 고려사의 배중손조 중에 「…적이 능히 지키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이에 함선을 모아 公私의 재화와 자녀를 모두 싣고 남으로 내려가니 仇浦에서 缸破江까지 배들의 꼬리와 머리가 서로 닿아 무려 천여 척이나 되었다…」고 했고 <고려사 절요>의 元宗 庚午 十一年條에도 똑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중략) 仇浦란 지금의 강화도의 서쪽 內加面 外浦里의 外浦港을 일컫는다. 缸破江은 龍津鎭, 廣城堡, 德津鎭, 草芝鎭에 이르는 江華島 東岸의 남쪽 狹水路를 말함이다. 특히 좁은 곳은 急水門 또는 孫乭목이라고 부른다.

  江華島와 金浦반도와의 사이 수로를 고려시대에는 江이라고 불렀다. <新東國與地勝覽>에 江華府의 궁궐조의 <公衙>중 鄭以吾의 記文에 「…이로써 바닷길이 오래도록 맑으며 전에 떠난 백성이 강을 건너 돌아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을 지어 삶을 편안히 하며 업을 번성히 했다…」고 하여 海路를 江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고려사 배중손조에도 「…국인이 크게 모였다가 혹 달아나 사방으로 흩어지고 배를 다투어 타고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았다. …」라고 하여 강화도와 육지 사이를 江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강으로 보았던 것이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화부의 진들 중에 草芝鎭 옆에 舟工頭浦鎭이 있다고 했으며 강화지도에도 舟頭鎭이 동남쪽에 나와 있다. (중략)

 다음에 <두리>는 무엇인가? 頭里란 바로 <두레>의 한문표기인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중략) 두레는 삼남지방에 아직도 남아 있는 말로서 협동체, 공동체의 호칭으로 군사단체, 근로단체, 유희단체, 신앙단체, 공제단체, 경기단체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레는 徒의 뜻인 <들>(무리)이 그 어원이란 지적이다. (중략)

 그러므로 <항파두리>를 풀이하면 缸破江을 떠나온 항몽집단체 내지 군사단체란 해석이 된다. (중략) 보다 정확한 기록에 근거한다면 위에 논증한 바와 같이 <缸破두레城>으로 불러야 될 것으로 본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익수아저씨의 해박하신 어원 분석에 감탄과 아울러 이를 정리해 두고 싶어 옮겨 적어 본 것이다. 익수씨는 아직도 지역 주민들은 그저 아무 어원 근거도 없이 그렇게 불러 왔다고 만 말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토로하신다.  

 城 가까이 가니 약간 우뚝 솟은 터에 토성이 길게 연하여 쌓여 있다. 동편 문으로 들어 가니 넓은 터가 나온다. 입구에서부터 웅장하다. 당시의 규모를 알만 하다. 불과 2년만에 이곳에 들어온 삼별초가 환해장성을 쌓고 또 이 토성을 인력으로 만들었으니 당시의 土役工事에 시달린 제주민들의 고역을 상상만 해도 아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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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파두리 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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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의 안내도>(성곽 전체의 표시)

   성의 중앙으로 가니 담을 두르고 건물을 세운 항몽 유적 전적지가 있었다. 문 입구의 안내판에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사적 제 396호)>라고 적고 삼별초군의 항몽사적과 정신을 찬양하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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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파두리 안내판>

  입구의 문에는 <순의문>이라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삼별초의 지휘부 건물이 있던 곳이란다. 커다란 돌에 새겨진 비석이 있다. 전면에는 <抗蒙殉義碑>라 적혀 있고 뒷면에는 삼별초의 항몽정신을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역시 무인시대였던 1977년 박정희 정권 때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분향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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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의 안내판과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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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몽 순의비 비석>

 한 역사를 어느 정치가의 세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마치 정설인 양 호도하고 어떤 건축물을 세운다 해도 결국은 사필귀정이라. 이 건물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입구의 좌측에 있는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니 당시에 사용하던 각종의 유물과 삼별초의 사건을 7폭으로 그린 그림들이 대형으로 걸려있다. 더러는 미화도 시키고 왜곡도 되어 있다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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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의 항파두리 전쟁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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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내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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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앞의 항파두리 성내의 삼별초 건물 돌쩌귀 유물들>

 이어 옆에 있는 관리실 안으로 들어가 삼별초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책 하나를 얻어 나왔다. 그리고 서쪽으로 나왔다. 이곳 토성 앞은 낭떠러지의 계곡이 천연 해자(垓字)로 잘 갖춰져 있었다. 토성 옆으로 난 북쪽 길을 따라 차로 돌았다. 토성의 위와 아래에서 싸우던 당시의 전투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다시 동편 입구 가까이로 오니 <구시물>이란 곳이 나왔다. <구시>란 나무나 돌로 수로를 파서 만든 것이란 뜻인데 물이 귀한 제주에서 삼별초가 식수로 쓰던 우물이다. 잘 만들어져 있다. 토성 밖인 이곳에 또 작은 성을 쌓아 보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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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별초의 식수터-구시물>

 당시의 고려 관군과 삼별초의 전투를 잠시 생각해 본다. 어제까지 한 군 부대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이 갑자기 적이 되어 눈을 부릅뜨고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죽이고 죽어야 하는 비극이 이곳에 있었다. 지정학적인 비극의 한반도 역사가 여기에 또 있어야 했다. 그 한 가운데에 우리 충렬공할아버지의 고뇌와 슬픔, 실행하고 싶지 않은 전쟁과 살육의 비극이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죽은 이들은 누구며 그때 죽인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오늘의 우리는 또 어떤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가! 민족의 숙제인 이 한반도 관문국가의 괴로운 국제간 문제가 언제야 풀어 지려는가--- 가까운 저쪽의 파군봉(破軍峰)을 본다.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 김통정과 부인 이화선이 함께 자진하였던 곳이다.

 이제 날이 시나브로 어두워진다. 차의 라이트를 켰다. 급히 차를 몰아 가까이 있는 만호대를 찾았고 이어 옆에 있는 명월성지를 보았다. 더 이상 보고 싶어도 완전한 어둠으로 이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이내 차를 몰아 제주시로 들어갔다. 익수아저씨는 미리 예약해 두신 고급 일식집으로 우리를 데려 가신다. 처음 보는 산해진미의 음식이 연달아 나온다. 나도 아이들도 눈이 커지고 신기한 듯 이 음식 저 음식을 살핀다. 허기진 배, 지친 다리, 강행군으로 다닌 답사에 신기한 맛은 입을 놀라게 한다. 여기서도 익수씨의 해박하고 논리적이며 구수한 설명은 계속된다. 가끔 가다가 섞는 제주도 사투리에 향토색이 달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를 염려하여 알아듣기 쉬운 방언만 골라 하시는 것 같다.

 저녁 9시 30분, 그래도 한 곳의 답사가 남았다고 하며 우리를 제주목사가 있던 관아로 안내한다. 서치 라이트 조명을 받아 밤이지만 전체를 잘 관람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복원된 목사의 관아라 한다. 밤 10가 넘었다. 작별하고 호텔로 들어가는 우리에게 갑자기 집 가까이 차를 정차시키더니 특별히 준비해 둔 밀감 한 박스를 주신다. 우리는 감사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 고마움을 어찌 다 갚을 수가 있을까?

 제주에서의 밤은 아무래도 낯설다. 몇 잔의 술로 객수를 달래고 잠을 청한다. 내일은 7시에 일어나야 한다.

 26일부터 이틀간 관광 버스를 타고 우리 가족은 일반 여행을 했다. 그 때도 틈틈이 익수씨는 우리를 챙기신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가 탔던 <하나로 관광> 여성 가이드(김명희. 40대 초반. 제주 태생. 20년 가이드 경험)의 각 여행지 해설이 노련하기에 옆으로 슬그머니 찾아가 질문을 했다. 항파두리의 항몽 유적지에 대한 여행사 가이드의 설명내용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가이드는 항파두리는 일반 관광팀 코스에는 없고 대체로 중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단과 대학생들의 여행 코스에 넣는다고 한다. 그리고 예상대로 삼별초의 항몽정신과 민족, 自主 국방정신, 殉義정신을 강조한다고 한다. 그렇게만 설명하고 만다면 가이드의 해설 내용에 구체적인 거명은 없었지만 상대편 관군의 수장이었던 우리 충렬공 할아버지는 당연히 반민족주의자요 외세 의존주의자요 사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는가! 이것도 우리가 제주의 관광협회에 충분한 역사적 해설문을 보내어 바른 역사관에 의한 설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이 앞으로의 남은 과제라고 생각했다.

 여행 마지막 날, 익수아저씨는 비행장으로 전송을 나오셨다. 한 박스의 맛있는 밀감과 함께 몇 개의 답사 관련 자료를 급히 만들어 오셨다. 보잘 것 없는 나에 대한 님의 따뜻한 보살핌과 애정에 고개가 숙여진다. 너무도 감사하다. 아이들이 감사하여 더 어쩔 줄 몰라한다. 혈육의 정과 깊은 인간적 애정을 가슴속에 꼭꼭 담아 주신다. 비행기 탑승을 위해 출구로 들어가는 우리들의 마지막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님은 우리에게 손 흔들어 아쉬움을 보내신다. ---

 8시 5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한 시간 여를 날아 김포에 도착했다. 11시가 넘자 서울 우리집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 왔다. 피곤했다. 그러나 보람과 기쁨이 가득한 여행이었기에 이렇게 가슴 뿌듯할 수가 없다. 컴퓨터가 보인다. <안동김씨 홈페이지>가 궁금하다. 전원을 키는 내 등 뒤에서 우리 홈을 더 걱정하는 우리집 아이들이 지켜본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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