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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초당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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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6-02-21 12:01 조회1,71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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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상경한 길에 대종회관에 잠시 들려서 옛 족보를 들추어 보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1739년 간행 기미보 (김방경 부분 후미)

---按朴翠琴彭年所撰車原부雪寃記中成三問註公有草堂日記---

 

 

박팽년(1417-1546)이 <차원부설원기>를 지었는데, 내용중에 성삼문(1418-1546)이 주를 달기를 '김방경은 초당일기가 있다' 라고 적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1739년 기미보 간행당시에는 실전하여 매우 애통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박팽년, 성삼문은 우리 가문의 김대래(부), 김질(익, 1422-1478)과 매우 친밀하였고, 특히 박팽년은 김휴(전)의 사위 박안생의 손자이기도 했으므로, 조선초기 세종 시대에는 우리 가문에 소장되어 있던 <초당일기>를 박팽년, 성삼문이 보고 상기와 같이 적은 것 같습니다. 또는 <초당일기>가 있었다는 기록만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당일기>는 1739년 기미보 간행당시에 이미 실전한 상태이므로, 세종 시대에 <초당일기>가 있었다면 아마도 1592년 왜란, 1636년 호란을 거치는 와중에 잃어 버렸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일설에 <초당일기>를 신광사 라는 절에서 목판으로 찍었다고도 하고, 그 내용이 <문화유씨 세보>에 실려 있다고도 하는데, 추론하여 보면 충렬공께서 1283년 벼슬에서 물러나시고 안동 회곡리에 초당을 짓고 유하시면서 <초당일기>를 쓰신 것을, 손자대(영돈, 영후)에 해주에 있는 신광사(원 순제가 대청도 유배시 원찰로 삼아 많은 후원을 하였다고 함)에서 목판으로 찍어낸 것이 조선초에는 우리 가문에 전해온 것이 아닌가 볼수 있습니다.

 

우선 박팽년이 지었다는 <차원부설원기>와 <문화유씨 세보>부터 찾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박팽년과 성삼문의 문집, 그리고 해주 신광사 관련 자료를 검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미암공 (휘 大來대래)

密直副使를 지낸 부사공(天順천순)의 손자이고, 通禮門奉禮郞을 지내고 戶曹佐郞에 증직된 좌랑공(談담)의 아들이다. 영락 정유에 생원이 되어 벼슬은 중군섭부사정 증한성부참군 이다.

충남 결성현 개산아래(忠淸道 結城縣 蓋山下) 살면서 母夫人을 극진히 봉양하였다. 성삼문, 박팽년과 교유가 많았다. 당시 학덕이 높아 세종조에 집현전을 확충할 때 박팽년이 추천하였다고 한다. 박팽년은 당숙 김휴의 사위 박안생의 손자이기도 했다.(김구---김성목---김휴---여+박안생(박팽년의 조부) /김구---김천순---김담---김대래)

 

14)문정공 김질(文靖公 金石質) (1422년 세종 4년∼1478년 성종 9년)

공의 호는 쌍곡(雙谷) 동추공 김종숙의 장남, 1450년 세종 32년 식년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서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부인은 영의정 정창손 따님이다.

후일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드디어 님의 노력으로 충렬공의 유고집인 초당일기의 꼬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 우리 모두 박팽년이 지었다는 &lt;차원부설원기&gt;와 &lt;문화유씨 세보&gt;를 찾아 떠납시다. 그리고 해주의 신광사도 검색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