川沙 金宗德의 문학과사상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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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20 03:50 조회1,718회 댓글0건본문
川沙 金宗德의 문학과사상 05
학술대회장에서 보고 들은 바는 있지만, 사상과 철학이라는 것은 함부로 판단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일체의 사견을 배제하고 [川沙 金宗德의 文學과 思想] 학술대회 논문집에 수록된 주요부분과 저술설명 위주로 발췌해서 타이핑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 천사 김종덕선생의 生涯와 敎育 --- 金時晃 (경북대)
1. 머리말
천사 김종덕 선생은 조선후기 文運이 가장 旺盛하던 영조 정조 시대에,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여, 많은 학문적 업적과 후진 교육에 크게 공헌한 학자이다.
선생은 대산 이상정 선생의 문인으로 獨學力行하여 대산 선생의 학문을 嫡通으로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선생의 저술은
文集 19권 10책을 비롯하여
초려문답
고증
성학정로
성학입문
심경강록간보
입본
공문일통
석학정장
정본 등
尨大(방대)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와 같이 尨大한 선생이 남긴 글들을 계명한문학연구회에서 모두 모아 解題를 하여 資料叢書로 합본 간행함으로써, 공부하는 이들이 쉽게 볼수 있도록 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귀중한 자료들은 전혀 연구되지 않고 있으니, 이 분야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매우 부끄럽고 또한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뜻에서 이번 동방한문학회에서 선생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를 하게 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저자는 선생의 고상한 학덕에 대해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선생의 글을 미처 읽어보지 못했었다. 그러던 차 이번 선생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게 되어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선생의 年譜와 行狀 및 기타 일부 자료를 토대로 하여, 선생의 학자적 生涯와 선비 사상의 일면이나마 대강 살펴보고자 한다.
2. 선생의 生涯
1) 家系와 生涯
선생의 자는 道彦(도언)이며 안동인으로,
시조는 고려 중흥공신 상락군 휘方慶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북평사 휘克諧(극해)는 청백리로 이름 났고,
松隱處士 휘光粹(광수)는 학행으로 세상에 重望이 있었으며,
晩翠堂 휘士元(사원)은 陶山 문인인데 선생(=천사)의 6대조이다.
5대조는 예빈직장 휘濬(준)이고
증사복정 휘尙璘(상린)은 고조이며
증조는 휘賢佐(현좌)
조 휘는 履模(이모),
고 휘는 南應(남응)인데
모두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비는 순천김씨 처사 胄山+疑(주?)의 녀이다.
선생은 영조 원년 甲辰(1724)에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第에서 태어났는데, 선생 선조 충렬공이 안동부 西 회곡리에 살았고, 13대조 評議공이 의성으로 이거함으로써 세거하게 되었다.
선생의 가계는 아래와 같다.
시조 方慶(바경) 상락군 충렬공
2세 (선)
3세 承澤(승택)
4세 冕(면)
5세 九鼎(구정) 官도평의
6세 子瞻(자첨) 감목관 自안동移居 의성사촌
7세 孝溫(효온) 官사직 박팽년, 최항 同榜(동방)
8세 克諧(극혜) 官북평사 청백리
9세 光粹(광수) 호松隱 學行
10세 (당) 官기자전 참봉
11세 世佑(세우) 官인의 (조선시대 통례원의 종6품 벼슬, 조회와 제사 등에 관한 의식을 맡음)
12세 士元(사원) 호晩翠堂 退陶문인
13세 濬(준) 官직장
14세 尙璘(상린) 호養眞堂 贈사복시정
15세 賢佐(현좌) 官통덕랑
16세 履模(이모) 官통덕랑
17세 南應(남응) 有예서2권
18세 宗德(종덕) 호川沙 逸薦(일천)의금부도사 大山선생문인 有문집
-제 宗敬(종경) 호苟齋 문과 지평 首登大山門 문집5권
-제 宗發(종발) 호容淵 문과 장령 大山문인 문집4권 예서2권 유가요람3권
-제 宗燮(종섭) 호濟菴 생원 大山문인 문집4권
19세 慶進(경진) 호聲灘 통덕랑 深於성리지학 箸 史書集解
-질 原進(원진) 통덕랑
-질 川進(천진) 통덕랑
-질 彦光(언광) 出
-질 山進(산진) 통덕랑
-질 三進(삼진)
-질 經進(경진) 호白室 통덕랑 문집3권
20세 養觀(양관) 호錦洲 承習家學 師事외증조百弗庵門 有 遺稿
이상 가계를 살펴 보았고, 다음 선생의 수학 과정부터 학자 및 교육자로서의 일생을 연보를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본다.
영조6년 乙酉(1729) 6세
--- 선생이 어버이 곁에 뫼시고 있을 때 늘 까마귀가 울면 곧 얼굴 색이 변했는데, 俗言에 까마귀가 우는 것은 惡氣를 끌어온다 하므로, 혹 부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가봐 우려한 까닭이다. 이와같이 어려서부터 독실한 효심이 있었다.
7세 영조7년 (1730)
---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부지런히 배울 줄을 알아 어른의 ?督을 기다리지 않았다.
15세 영조15년 戌午 (1738)
--- 王考 통덕랑 공으로부터 독서법에 대한 훈계를 받았다. 선생은 이에 힘입어 뒤에 크게 성취하였다.
16세 영조16년 乙未 (1739)
--- 聘부인 한산이씨
17세 영조17년 庚申 (1740)
--- 재종숙부 處士공이 퇴계집을 타인에게서 빌려 왔는데, 선생이 빌려 밤낮으로 읽고 풀이하느라 침식을 잊었다.
< 중 략 >
순조6년 丙寅 (1806)
--- 문집 20권 10책 成 문인 종질 堂進 간사
순조14년 甲戌 (1814)
--- 행장 成 문인 이병운 撰
고종43년 丙午 (1906)
--- 초려문답 6건 3책 印役 成 拓庵 金道和 撰跋
乙酉 (1909)
--- 성학정로 전질1책 自청송 ?강서당 重刊
乙卯 (1915)
--- 士林議 不 (부조) 교리 이만규 撰고유문
丙子 (1936)
--- 성학입문 전질1책 刊役 成 연보급부록문자 동시刊出
이상 연보에 나타난 선생의 일생 이력을 대강 살펴 보았는데, 여기서 대스승인 대산선생을 숭모한 부분 및 自警自戒(자경자계), 그리고 자제 및 제자 교육에 대한 것은 별항으로 나누어 언급하였다.
선생은 과거시험에 네 번 합격하였는데,
29세때 향해양시 합격,
30세때 생원회시 합격,
36세때 별과향시 합격,
51세때 동당향시 합격 등이었다. 그러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學行으로 세 번 薦(천)을 받았는데,
45세때 道學으로 道伯의 薦
66세때 學行으로 薦을 받아 의금부도사를 제수
마지막 71세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역시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것을 보면 처음 젊었을 때에는 과거에 대한 생각을 버리지는 않았다가, 36세 이후에 대산선생에게 나아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하기 시작한 뒤부터는 벼슬에 대한 생각을 끝까지 하지 않았던 것이다.
▣ 김정중 -
▣ 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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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항용 -
▣ 김영환 -
▣ 김재익 - 수고 많습니다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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