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하여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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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우 작성일02-04-20 01:06 조회2,069회 댓글0건본문
아래의 글은 김가네 홈에서 관리자가 올린 글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모두들 알지계 김씨가 맞는다고 하는데 왜 헷갈리게 하는지 모르겠군요.
안녕 하세요 창우님!
1. 님의 뿌리 찾기 열성에 박수를 보냅니다만,
2. 일단 김항용님의 수고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3. 님의 말씀 마따나 어디에도 알지계인지 가락계인지 기록이
없고, 가승보 간행시 선대님도 확실히 기록하지 못하신것을
지금 김해김씨라고 하신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는 추론입니다.
4. 일전 님께서 이야기하신 내용은 안동김문에서 분파된 교하김씨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생각엔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남의집 먼 과거 집안 이야기
를 잘 모를 수 밖에 없어 안타까울 수밖에요.
5. 왜냐하면 이제껏 님이 추적하신바로는 파조이신 "달"자
할아버님(병조판서)은 분명 "대구김씨"로 모든기록이 있으니
까요. 그런데 선대의 선조님들이 일치하지 않아 다시 미궁에
빠지셨다면서요.
6. "우리 김씨는 가락국의 시초에 성(姓)을 얻어"와
"선대는 김해(金海)시절에 있었으므로"란 구절이 님을 더욱
혼미하게하고, 다른 해석자들에게도 아리송게 한것 같습니다.
7. "삼세(三世)를 머리로 기록에 올려 이후 합보(合譜)하게
될 때 고증에 편하게 하였다"란 구절을 유추 해석해 보면
교하에 "명업" 선조님이 정착하기전 증조,조,부 3세를 기록
하시어 나중에 선대를 찾는 근거로 삼의 셨던것은 아닐까요?
(1세; "달", 2세: "우", 3세; "영난")
8. " 참고:기록에 의하면 김씨는 김씨인데 선대를 알 수 없는
김씨들 즉 김해(가락)김씨, 경주김씨, 양근김씨들이 모여
일단 "김해김씨"라 하고 파보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슴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란
님의 정보엔 더욱 아리송 하게 합니다.
분명 "명업"할아버님의 아드님인 "인만"할아버님이
청나라 강희 10년 신해생이시면, 대략 조선중기 입니다.
그때까지 신라계 김해김씨도 그대로 "김해김씨"란 본관을
사용하다가 조선 말기 고종의 왕명에의해 "김녕김씨"로
개칭 하도록 하였음을 님도 아실것입니다.
어떤 근거로 신라계 김씨들과 님의 족보를 만드는데
관여 하신 "김해김씨" 가 가락계 라고 단언 하신지 잘 모르겠
습니다. 혹시 신라계 김해김씨와 경주김씨, 양근김씨가
아닐까요?
9. 시조가 다른 김씨들이 모여 족보를 만들다니요?
물론 보학이 상식이었고, 양반들이 남의족보까지 줄줄 외우는
시절이어서 도와 주러 참석 할 수도 있다고 가정 할 수도
있습니다만.
10. "명업"할아버님의 외 할머님이 "인동 장씨"이시고
휘가 "사?(師?)이시니 할머님들의 부친 휘의 기록을 중심으로
외가쪽 족보를 검색하시는것도 한가지 방법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결과 고대하며,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시길......
김가네 사이트 답글 2
안녕 하세요 창우님!
1. 님의 질문인 "경주김씨 일 가능성은?"엔 논리의 비약이
너무 하신것 같습니다.
2. 왜냐하면
"오직 우리 일파(一派)는 명업(命業)에서부터 영(嶺)을 넘어
경기로 들어와 드디어 교하(交河)에서 옮겨 살았는데
그 시초를 생각하면 매우 고달펐던 것이나 백년 이후에
차차 자손이 번성하는 기약이 있었으니,
즉 이는 선세(先世)의 덕이 후세에까지 끼치어 좋은 경사가
있게 된 것이다. "란 구절과
"영해(嶺海)의 선대는 감히 개략하지 못하였다.
모두가 기대하므로 보(譜)의 시초를 보잘 것 없이 작성하며,
널리 재주껏 증거를 만들어 바야흐로 완편하는 뜻을
이루었다고 할 뿐이다"란 구절을 보건데.
님이 소장하신 족보는 명업 할아버님으로부터 약 100년이 지나서
제작 되지 않았나 생각되어지며,
그당시 님의 족보를 작성할때 도와주신 다른(경주,김해,양근)분
들도 정확한 정보가 없어 "재주껏 증거를 만들었다"고
하시고 계시군요
위 경주,김해,양근김씨들중 확실한 친척 관계가 있었다면,
분명 본인이 소장하고있는 족보의 상계를 기술하여 족보를
완성 하였을것 입니다.
고로 분명 위 3김씨는 아니지 않을까요?
3. 그럼 "달"자 할아버님의 아드님이신 "우"할아버님이
"대구김씨"족보에 왜 실려있지 않을까요?
왜 "명업"할아버님은 고향(영남)을 떠나 그당시엔 멀고 친척도
없는 경기도 교하로 이주를 하셨을까요?
조선 시대엔 서자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심했습니다.
죄송하고 죄송한 상상 입니다만, 혹시 "우"할아버님은
서자가 아니시었는지요?
- 조선때 병조판서("달"자 할아버님) 란 벼슬은
대단한 벼슬 입니다.
그분의 친자가 족보에 올라 가지 않은것도 문제려니와
아버님(김달)을 따라 함경도로 가시지 않고 대구에 남아
계시어 함경도에 사시는 일가분들이 후일 족보를 만드실때
(상당 기간이 흐른후 최초 대구 김씨 족보가 만들어 졌을것
으로 생각됩니다) 먼 대구 까지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대구에 일가분들이 살고 계시는것을 몰랐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 모든 추측 자료와 생각은 잘못된것이지만, 그가능한 추측을
근거로 자료를 찾는것은 현재 할 수있는 최대한의 방법일것
입니다.
4. 할머님들중 부친의 "휘"(돌아가신분의 이름)를 근거로
조사해 보시면 한가닥 길이 있지 않을까요?
5. 다른 방법은 현재의 자료를 근거로 족보를 만드시는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제 부질없는 소견으로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함을
매우 안타까웁게 생각합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이 함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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