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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36) 민족에 내놓은 몸(2)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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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3-25 09:49 조회1,4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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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나는 여기서 김효영(金孝英) 선생의 일을 아니 적을 수 없다. 선생은 김용진의 부친이요. 김홍량의 조부다. 젊어서 글을 읽더니 집이 가난함을 한탄하여 황해도 소산인 면포를 사서 몸소 등에 지고 평양도 강계, 초산 등 산읍으로 행상을 하여서 밑천을 잡아 가지고 근검으로 치부한 이라는데, 내가 가서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벌써 연세가 70이 넘고 허리가 기역자로 굽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탈속하여 보매 위엄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신교육의 필요함을 깨닫고 그 장손 홍량을 일본에 유학케 하였다. 한 번은 양산 학교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에 무명씨로 벼 백 석을 기부하였는데 나중에야 그가 자여질(子與姪 ; 아들과 조카 즉 가까운 손아래 친척들 - 편집자주*)에게도 알리지 아니하고 한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나로 말하면 선생의 자질의 연배언마는 며칠에 한 번씩 정해놓고 내 집 문전에 와서,

"선생님 편안하시오?"

하고 문안을 하였다. 이것은 자손의 스승을 존경하는 성의를 보임과 동시에 사마골 오백금격이라고 나는 탄복하였다.

나는 교육에 종사한 이래로 성묘도 못하고 있다가 여러 해 만에 해주 본향(本鄕)에 가보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로 감개무량한 것은 나를 안아주고 귀애해 주던 노인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고, 전에는 어린 아이던 것들이 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막히는 것은 그 어른된 사람들이 아무 지각(知覺)이 나지 아니하여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예전에 양반이라는 사람들도 찾아보았으나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몽한 중에 있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면 머리를 깎으니 못한다고 하고 있었다. 내게 대하여서는 전과 같이 또라지게 하대는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이요, 한 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서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고향에 와서 이렇게 실망되는 일이 많은 중에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준영 계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었다. 항상 나를 집안을 망칠 난봉으로 아시다가 내가 장연에서 오 진사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것을 목도하시고부터는 비로소 나를 믿으셨다.

나는 본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가지고 온 환등(幻燈 ; 영화, 영사기 등을 말한다 - 편집자주*)을 보이면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삼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하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안악에서는 하계 사범 강습소를 마친 뒤에 양산 학교를 크게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고 김홍량이 교장이 되었다.

나는 최광옥 등 교육가들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고, 내가 그 학무총감(學務總監)이 되었다. 황해도 내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그것을 잘 경영하도록 설도하는 것이 내 직무였다. 나는 이 사명을 띠고 도내 각 군을 순회하는 길을 떠났다.

배천 군수 전봉훈(全鳳薰)의 초청을 받았다. 읍 못 미쳐 오리정에 군내 각 면의 주민들이 나와서 등대(等待)하다가 내가 당도한즉 군수가 선창으로,

'김 구 선생 만세!'

를 부르니 일동이 화하여 부른다. 나는 경황 실색하여 손으로 군수의 입을 막으며, 그것이 망발인 것을 말하였다.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하여서만 부르는 것이요, 황태자도 천세라고밖에 못 부르는 것이 옛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개 서민인 내게 만세를 부르니 내가 경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수는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개화 시대(開化時代)에는 친구 송영에도 만세를 부르는 법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나는 군수의 사제(私第)에 머물렀다.

전봉훈은 본시 재령 아전으로 해주에서 총순(總巡)으로 오래 있을 때에 교육에 많이 힘을 썼다. 해주 정내 학교(正內學校)를 세운 것도 그요, 각 전방(廛房) - 상점 - 에 명령하여 사환하는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게 하고 만일 안 보내면 주인을 벌하는 일을 한 것도 그여서 해주 부내의 교육의 발달은 전 총순의 힘으로 됨이 컸다. 그의 외아들은 조사(早死)하고 장손 무길(武吉)이 5,6세였다.

전 군수는 대단히 경골한(硬骨漢으로 추정 ; 뼈가 단단한 사람, 즉 뜻이 굳은 사람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 편집자주*)이어서 다른 고을에서는 일본 수비대에게 동헌(東軒)을 내어 맡기되 그는 강경히 거절하여서 여전히 동헌은 군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의 미움을 받았으나 그는 벼슬자리를 탐내어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전봉훈은 최광옥을 연빙하여 사범 강습소를 설립하고 강연회를 각지에 열어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최광옥은 배천 읍내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강단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황, 평 양서(서해의 황해도 평안도 두 도를 이르는 것 같다 - 편집자주*)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고 뜻과 재주를 아껴서 사리원(沙里院)에 큰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평양 안태국(安泰國)에게 비석 만드는 일을 맡기기까지 하였으나, 합병 조약이 되기 때문에 중지하고 말았다. 최광옥의 유골은 배천읍 남산에 묻혀 있다.

나는 배천을 떠나 재령 양원 학교(養元學校)에서 유림을 소집하여 교육의 필요와 계획을 말하고 장연 군수의 청으로 읍내와 각 면을 순회하고, 송화 군수 성낙영(成樂英)의 간청으로 수년 만에 송화읍을 찾았다. 이곳은 해서의 의병을 토벌하던 요해지(要害地)이므로 읍내에 왜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의 기관이 있어서 관사는 전부 그런 것에 점령이 되고 정작 군수는 사가를 빌어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머리카락이 가락가락 일어날 지경이었다.

환등회를 여니 남녀 청중이 무려 수천 명이니 군수 성낙영, 세무서장 구자록(具滋祿)을 위시하여 각 관청의 관리며 왜의 장교와 경관들도 많이 출석하였다. 나는 대황제 폐하의 어진영(御眞影 ; 임금의 사진 - 편집자주*)을 뫼셔오라 하여 강단 정면에 봉안하고 일동 기립 국궁(鞠躬 ; 몸을 굽혀 인사하는 것 - 편집자주*)을 명하여 왜의 장교들까지 다 그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벌써 무언 중에 장내에는 엄숙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연제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과거 일청, 일아(日露)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 일본이 강제로 우리 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우리는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병이 촌락으로 횡행하며 남의 집에를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하므로 우리는 배일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탁을 두드리며 외쳤다.

자리를 돌아보니 성낙영, 구자록은 낯빛이 흙빛이요, 일반 청중의 얼굴에는 격앙의 빛이 완연하고 왜인의 눈에는 노기가 등등하였다. 홀연 경찰이 환등회의 해산을 명하고 나는 경찰서로 불려가서 한인 감독 순사 숙직실에 구류되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위문대가 뒤를 이어 밤이 새도록 나를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하르빈 전보라 하여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은치안'이라는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은치안'이 누구일까 궁금하였더니, 이튿날 신문으로 그것이 안응칠 중근(安應七 重根)인 줄을 알고 십수 년 전 내가 청계동에서 보던 총 잘 쏘던 소년을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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