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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전을 1억번읽었다는 청백리 김득신(金得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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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회 작성일06-03-25 11:44 조회1,46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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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_04_pic03.gif김득신(1604~1684)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佰谷) 김치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참봉을 지내고 문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올라 안풍군에 습봉되었고 시인으로 이름을 얻었다 무덤은 증평읍 율치(栗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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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나 지금이나 학문이 높은 사람은 모두 부지런히 공부하여 이룬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글 잘하는 사람 중에서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은 일일이 꼽아 볼 수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은 문을 닫고서 책만 읽으며 밖을 내다보지 않다가 대청을 내려가서 낙엽을 보고 비로소 가을임을 알았으며 허백당(虛白堂) 성현(宬俔)은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외우면서 손에서 책을 놓은 일이 없었는데 변소에 갔다가 나오는 걸 잊었다고 했으며 김일손(金馹孫)은 「한유(韓愈)의 글」을 1천 번 읽었으며 윤결(尹潔)은『맹장』를 1천 번 읽었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은『논어』를 2천 번 읽었으며 백호(白湖) 임제(林梯)는『중용』을 8백 번 읽었다 간이(簡易) 최립(崔?)은『한서』를 5천 번 읽었는데 그 중에서 「항적전(項籍傳)」만 만 번 읽었으며 창주(滄洲) 차운로(車蕓輅)는『주역』을 5백 번 읽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은「두시(杜詩)」를 수천번 읽었으며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은「장자(壯子)」와「유정원(柳亭元)의 글」을 1천 번 읽었다 동명(東溟) 정군평(鄭君平)은 『사기』를 수천 번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성질이 느리고 둔해서 책을 읽는 공력을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들인다
『사기』,『한서』와 한유 유종원의 글은 모두 베껴서 만여번 그것은 1억1만3천 번이나 읽어 드디어 내 방을 ‘억만재(億萬齋)’라 이름을 짓고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진ㆍ한ㆍ당ㆍ송의 글을 두루 찾아서
입에서 침을 날리며 일만 번 읽었네
백이전의 기괴한 문체 가장 좋아하여
훨훨 달리는 기운 구름 넘어 올라가네

지난 경술년(1670)에 큰 가뭄이 들어 팔도에 흉년이 들었다 이 때문에 그 이듬해에 굶주림과 염병으로 서울과 시골에 쌓인 시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죽은 사람 수와 그대가 책 읽은 수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많은가?”하였다
이것은 내가 책을 되풀이하여 많이 읽는 것을 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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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김득신이 평생을 시만 공부하고 정신을 모아 시 한수를 짓는데 여러 번 글자를 바꾸고 글을 다듬기를 중국의 가도(賈島)와 같이 했다 그의 시에서

저녁 해는 백사장 아래로 지려는데
자려는 새들은 먼 숲으로 들어가네
떠나는 사람이 나귀를 타려다 말고
앞산에 비 들어오는 것을 근심하네
저녁 그림자가 백사장에 드리우니
가을 소리가 들녘 나무에서 들리네
목동이 송아지 몰고 집에 돌아오니
앞산에 나린비에 옷이 흠뻑 젖었네

같은 것은 중국 당나라 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김득신은 처음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택당(澤堂)이식(李植)이 그의 시를 보고 대단히 칭찬하고 조정의 선비들에게 소문을 퍼트려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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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김득신이 용호(龍湖)에서 지은 ‘고목한운리(古木寒蕓裡)’절구 다섯 수는 널리 읽히던 것이어서 내가 편집해 『기아(箕雅)』에 실었는데, 유독

오서를 다 지나고 진관(秦關)을 향하니
먼 길 가고 또 가느라 잠시도 한가치 않다
나귀 등에서 잠을 자다가 눈을 떠 보니
저녁구름 아래 눈 남은 건 무슨 산인가

라는 시는 그 용어와 운율이 매우 좋은데도 다른 책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듣고 보지 못했던 것이 한스럽지만, 이것이 이른바 ‘바다를 걸러서 구슬을 찾아도 월명주(月明珠)를 버려 두었다’는 격언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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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김득신의 절구 ‘용산(龍山)’의 첫 연(聯)은

고목한운리(古木寒雲裡)
추산백우변(秋山白雨邊)

인데,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瀷)이 이시를 『기아(箕雅)』에 실을 때 첫째 줄에서 ‘한(寒)’을 ‘황(黃)’으로 고친 까닭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둘째 줄 ‘백(白)’과 맞추기 위해 ‘황(黃)’으로 고쳤는지 몰라도, 나는 김득신과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그 시를 귀에 익도록 들었는데 분명히 ‘한(寒)’이고, 또 그의 『백곡집』에 실린 그 시에도 또한 ‘한(寒)’으로 돼 있다. 그러므로 『기아(箕雅)』에 실린 것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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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 김득신과 호곡 남용익이 한 곳에서 만났다. 피차에 시를 잘 짓는다는 이름을 일찍부터 듣고 있었으므로 서로 시부(侍賦)로 우열을 결정하기로 하고 김득신이 먼저 운(韻)을 부르니 남용익이 읊기를,

나그네가 청주의 비를 흩어버리니
구름이 상당성(上堂城)에 모이네
저녁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떨구니
돌아가는 말이 가을 소리를 밟누나

라 하니, 김득신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괴산의 문장가 김득신이 한양의 재주꾼 남용익에게 항복합니다.”했다.
김득신이 일찍이 친구 집 화첩(畵帖)머리에 쓴 시에,

늙은 나무 연기 속에 서있고
가을산에 가랑비가 나리는데
저녁 강바람에 물결 높아지니
고기잡던 이 뱃머리를 돌리네


이라 썼는데, 동명(東溟) 김익겸(金益謙)이 이를 보고 매우 좋은 글이라고 칭찬했다. 김득신이 그를 우연히 물가에서 만났는데 김익겸이 먼저 읊기를,

서리 나린 정자에 낙엽만 뒹굴어도
물이 빛나고 산이 물드는 석양에
술잔을 권하며 단풍 속에 앉았으니
사람 얼굴과 가을이 똑같이 붉었네

하니, 김득신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조선의 문장으로 다른 사람에게 지고 있는 것은 바로 초백(楚伯)과 왕천(王天)이 나를 망친 것이다.”라 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백곡께서 남용익과 김익겸에게 시로써 항복한 이야기는 매우 재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