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37)민족에 내놓은 몸 3. 산발적인 저항의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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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6-03-27 16:06 조회1,520회 댓글0건본문
3. 산발적인 저항의 불씨
나는 내가 구금된 것이 안중근 관계인 것을 알고 오래 놓이지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나를 불러내어서 몇 마디를 묻고는 해주 지방 법원으로 압송함이 되었다. 수교(水橋)장을 지날 때에 감승무(甘承武)의 집에서 낮참을 하는데 시내 학교 교직원들이 교육 공로자인 나를 위하여 한턱의 위로연을 베풀게 하여 달라고 호송하는 왜 순사에게 청하였더니 내가 해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면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곧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검사정에 불려 안중근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나는 그 부친과 세의(世誼)가 있을 뿐이요, 안중근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검사는 지나간 수년 간의 내 행적을 적은 책을 내어 놓고 이것저것 심문하였으나 결국 불기소로 방면이 되었다.
나는 행구를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서 박창진(朴昌鎭)의 책사로 갔다가 유훈영(柳薰永)을 만나 그 아버지 유장단(柳長端)의 회갑연에 참례하고 송화서 나를 호송해 올 때에 왜 순사와 같이 왔던 한인 순사들이 내 일의 하회를 알고 가려고 아직도 해주에 묵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 전부를 술집에 청하여서 한턱을 먹이고 지낸 일을 말하여서 돌려보내었다. 한인 순사는 기회만 있으면 왜 순사의 눈을 피하여 내게 동정하였던 것이다.
안악 동지들은 내 일을 염려하여 한정교(韓貞敎)를 위해 해주로 보내어 왔으므로 나는 이승준(李承駿), 김영택(金泳澤), 양낙주(梁洛疇) 등 몇 친구를 방문하고는 곧 안악으로 돌아왔다.
안악에 와서 나는 양산 학교 소학부의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군 북률면(北栗面) 무상동(武尙洞) 보강 학교(保强學校)의 교장을 겸무하였다. 이 학교는 나무리벌의 한 끝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내어 세운 것이었다. 전임 교원으로는 전승근(田承根)이가 있고, 장덕준(張德俊)은 반 교사 반 학생으로 그 아우 덕수(德秀)를 데리고 학교 안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내가 보강 학교 교장 된 뒤에 우스운 삽화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 세 번이나 도깨비불이 났다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에 옆에 있는 고목을 찍어서 불을 때었으므로 도깨비가 불을 놓는 것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부군당에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다들 말하였다.
나는 직원을 명하여 밤에 숨어서 지키라 하였다. 이틀만에 불을 놓은 도깨비를 등시(登時) 포착하고 보니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그는 학교가 서기 때문에 서당이 없어져 제가 직업을 잃은 것이 분하여서 이렇게 학교에 불을 놓는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를 경찰서에 보내지 아니하고 동네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이 지방에 큰 부자는 없으나 나무리 크고 살진 벌이 있어서 다들 가난치는 아니하였다. 또 주민들이 다 명민하여서 시대의 변천을 잘 깨달아 운수(雲水), 진초(進礎), 보강, 기독(基督) 등 학교들을 세워 자녀들을 교육하는 한편으로는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여 농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등 공익 사업에 착안함이 실로 보암직하였다.
의사 나석주(羅錫疇)도 이곳 사람이다. 아직 20 내외의 청년으로서 소년, 소녀 8,9명을 배에 싣고 왜의 철망을 벗어나 중국 방면으로 가서 마음대로 교육할 양으로 떠나가 장연 오리포(梧里浦)에서 왜경에게 붙들려서 여러 달 옥고를 받고 나와서 겉으로는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한다 하면서 속으로 청년간에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힘을 써서 나무리벌 청년의 신망을 받는 중심 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도 종종 나무리에 내왕하면서 그와 만났다.
하루는 안악에서 노백린(盧伯麟)을 만났다. 그는 그때에 육군 정령(陸軍正領)의 군직을 버리고 그의 향리인 풍천에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안악을 지나는 것이었다. 나는 부강 학교로 갈 겸 그와 작반하여 나무리 진초동(進礎洞) 김정홍(金正洪)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김은 그 동네의 교육가였다.
저녁에 진초 학교 직원들도 와서 주연을 벌이고 있노라니 동네가 갑자기 요란하여진다. 주인 김정홍이 놀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설명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진초 학교에 오인성(吳仁星)이라는 여교원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그의 남편 이재명(李在明)이 와서 단총으로 오인성을 위협하여 인성은 학교 일을 못보고 어느 집에 피신하여 있는데 이재명은 매국적(賣國賊)을 모조리 죽인다고 부르짖으면서 미쳐 날뛰며 방포를 하므로 동네가 이렇게 소란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노백린과 상의하여 이재명이라는 사람을 불러왔다. 그는 22, 23세의 청년으로서 미우(眉宇)에 가득하게 분기를 띠고 들어섰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리 나라가 왜에게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두어 달 전에 환국하였다는 말과, 제 목적은 이완용(李完用) 이하의 매국적을 죽임에 있다 하여 단도와 권총을 내어보이고, 또 자기는 평양에서 오인성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그가 남편의 충의의 뜻을 몰라본다는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장차 서울 북달은재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찌를 의사 이재명이 될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한 허열에 뜬 청년으로만 보았다.
노백린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어서 그의 손을 잡고,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일을 할 무기를 가지고 아내를 위협하고 동네를 소란케 하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간곡히 말하고 그 단총을 자기에게 맡겨두고 마음을 더 수양하고 동지도 더 얻어 가지고 일을 단행하라고 권하였더니 이재명은 총과 칼을 노백린에게 주기는 주면서도 선선하게 주는 빛은 없었다.
노백린이 사리원 역에서 차를 타고 막 떠나려 할 때에 문득 이재명이 그곳에 나타나서 노에게 그 맡긴 물건을 도로 달라고 하였으나, 노는 "서울 와서 찾으시오"하고 떠나 버렸다.
그 후 일삭이 못하여 이 의사는 동지 몇 사람과 서울에 들어가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천주교당에 다녀오는 이완용을 찌른 것이었다. 완용이 탔던 인력거꾼은 즉사하고 완용의 목숨은 살아나서 나라를 파는 마지막 도장을 찍을 날을 주었으니 이것은 노백린이나 내가 공연한 간섭으로 그의 단총을 빼앗은 때문이었다.
나라의 명백이 경각에 달렸으되 국민 중에는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에 일변 깨달은 지사들이 한데 뭉치고 또 일변 못 깨달은 동포를 계발하여서 다 기울어진 국운을 만회하려는 큰 비밀 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신민회(新民會)였다.
안창호(安昌浩)는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평양에 대성 학교(大成學校)를 세우고 청년 교육을 표면의 사업으로 하면서 이면으로는 양기탁(梁起鐸), 안태국(安泰國), 이승훈(李昇薰),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주진수(朱鎭洙), 이 갑(李甲), 이종호(李鍾浩), 최광옥(崔光玉), 김홍량(金鴻亮) 등과 기타 명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4백여 명 정수 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훈련 지도하다가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갇혔다.
합병이 된 뒤에는 소위 주의 인물을 일망 타진할 것을 미리 알았음인지, 안창호는 장연군 송천(松川)에서 비밀히 위해위(威海衛)로 가고 이종호, 이 갑, 유동열 등 동지도 뒤를 이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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